?[2013년 9월호]

2013-08-31_212502.jpg 6.25 참전 언론인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
대한언론인회, 33명의 수기집 발간

대한언론인회(회장 洪元基)가 6.25에 참전한 후 언론계에서 활약한 23명의 수기를 모아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396쪽 2013.8.10)를 발간했다. 이 책속에는 6.25 종군기자 10명의 취재기도 함께 실었다.

소년 학도병, 갑종간부, 통역장교 등

참전용사들은 6.25발발 당시 중학교 졸업반(고교 3년) 또는 대학 1학생의 나이로 자원입대한 경우가 많았다. 10대의 학도병으로 소총수로 참전한 경우도 많고 갑종간부로 소대장이나 해병대 장교 또는 미군과 연락장교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2013-08-31_212630.jpg
이들 언론인들은 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수도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어 피난을 가지 못한 채 적치(敵治) 3개월간 숨어 지내다가 1.4후퇴로 대구나 부산으로 피난하여 입대한 경우가 많았다. 참전 후 포항, 안강전투 및 낙동강 방어전에서 사선(死線)을 넘기고 북진대열을 따라 평양탈환을 거쳐 압록강 변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작전 및 서울 재탈환 작전에도 참가했다.
해병대 장교로 참전한 용사들은 원산 앞바다 여도를 지키고 서해안 백령도에서 진남포 앞 도서까지 장악했다가 휴전협정으로 철수한 참전수기로 오늘의 NLL이 탄생한 배경을 실감나게 증언했다.

육군특공대 지원, 안강전투 혈전

지용우(池龍雨)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은 보인상업 5학년 때 형을 대신하여 대동청년단 비상소집에 따라 수원 임시 신병훈련소에서 육군특공대에 지원했다. 2013-08-31_212649.jpg 일제 99식 소총으로 훈련받다가 급히 조치원으로 후퇴하면서 북의 야크기 공습으로 1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쟁의 참화를 목격했다.
다시 대전으로 후퇴하여 M1소총을 지급받아 강훈을 받으면서 일부 도망병이 즉결처분되는 장면도 지켜봤다. 경북 의성에서 400m 고지 사수작전 때 첫 전투를 경험하고 안강전투에서 밤 불꽃놀이 같은 격전을 겪고 백병전을 체험했다.
수도사단장에 사무라이 김석원(金錫源) 장군이 부임한 후 다부동 전선에서 ‘총알을 두려워 말라’는 독전을 받았다. 김일성이 8.15까지는 부산까지 점령하라고 독전할 때 대한민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피아간 수많은 사상자간 속출하는 혈전통에 적 수류탄 파편으로 중상을 입고 경주야전병원, 대구종합병원을 거쳐 부산에서 정일권(丁一權) 총장 명의의 명예 제대증을 받고 전역했다.
대구매일, 영남일보에서 활약한 오판룡(吳判龍)씨도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안강, 기계전투에서 포병 관측병으로 활약했다. 북진 후 설악산 전투를 거쳐 청진, 회령까지 진력했었지만 부상으로 묵호를 거쳐 포항육군병원에서 전역했다.

다부동 혈전에서 학도병 참전

박기병(朴基秉) 6.25참전언론인 회장도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경우이다. 춘천사범 3학년 졸업반 때 6.25을 만나 포탄운반으로 국군을 지원하다 유격대에 입대하여 양구전투에 참전했다. 그 뒤 포병모집에 응모하여 포병 16대대에 편입되어 홍성, 힁령을 거쳐 영주, 봉화전투를 근접지원 했다. 전세가 역전된 후에는 영월, 평창, 인제, 원통전투 등에 참전했다.2013-08-31_212705.jpg
부산일보, 영남일보에서 활약한 김한길(金漢吉)씨는 17세의 학도병으로 3년간 참전기록을 세웠다. 중학 4학년생으로 친구와 함께 부산 태종대로 낚시 갔다가 6.25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 지원 1주일 뒤 미군 LST 편으로 제주도 화순항에 도착, 한라산 숙영지에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참가했다.
전쟁 중에도 한라산 동굴에 공비들이 많아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가 나오고 기습공격에 의한 학살과 약탈이 극심하여 “전방 보다 후방에 전사자가 더욱 많다”는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경동고 2년생이던 송두빈(宋斗彬)씨도 17세의 소년병으로 입대했다. M1소총 사격훈련도 못 받고 1.4후퇴 작전 등에 참가했다. 특히 영월 주천일대 산악전에서 중대원 100여명 가운데 겨우 20여명만 생존한 치열한 전투를 체험했다. 당시 적 1개 중대 소탕작전 명령을 받고 전투를 개시했지만 알고 보니 적은 군단병력이었다.
문준철(文俊撤)씨는 전북 군산중 5년, 18세 소년으로 입대하여 부산 동해여중까지 도보로 행군, 실탄 8발 사격훈련을 받고 1사단 11연대 소총수로 배치됐다. 낙동강 전선을 사수해야 대한민국이 살아남는다는 절박한 위기 때 가산산 남동 674m 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다부동 전선은 B-29기의 융단폭격으로 버티면서 하루 600~7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북이 점령하고 있던 674m 고지 탈환에는 성공했지만 계속하여 6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공방전이 계속됐다. 그 뒤 영천, 신령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부산 3육군병원을 거쳐 19세의 소년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명예제대 했다.

인민군 소위로 귀순 후 9월산 유격대

신태양, 현대경제, 현대공론 등 많은 매체에서 필명을 남긴 고 이경남(李敬南)씨는 황해 안악 출신으로 인민군 소위로 참전했다가 국군에 귀순하여 반공전선에 헌신했던 유공자이다.2013-08-31_212720.jpg
고인은 평양사범 국문과 재학중 입대하여 반공 인민군 병사들을 이끌고 국군 6사단 7연대에 집단 귀순했다. 그는 생시에 “작전 중에도 국군에게 총 한방 사격하지 않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귀순 후 인민군들은 포로수용소로 이송됐지만 이경남 소위는 임부택 연대장의 정보문관으로 남아 북진을 안내했다.
부대가 압록강변 초산에 이르렀을 때 고향으로 귀환하여 ‘반공청년단장’이 되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할 때는 구월산 유격대로 들어갔다. 통키 10연대의 작전참모, 참모장으로 30개월간 혁혁한 전공을 세워 반공전선에 명성을 쌓았지만 휴전으로 서해 도서들을 포기하고 눈물로 돌아와 국군에 편입되어 육군중위로 전역했다. 고인이 될 때까지 유격전우회 회장으로 먼저 간 전우들의 전공을 기록하고 각종 매체를 통해 6.25의 진실을 홍보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원산 앞, 영흥만일대 해병대 장악

한국일보, 동화통신, MBC에서 활약한 공대식(孔大植)씨는 대학 1학년 첫 강의를 듣고 대구로 피난했다가 육본간부 후보생 모집에 응모하여 해병간부 4기생으로 중위로 2013-08-31_212743.jpg 임관됐다. 원산 앞바다 영흥만 일대를 경비하는 여도에 첫 부임하여 7개섬을 지켰다. 당시 원산 앞바다는 미군 구축함이 24시간 순회 경계하여 북한군의 발목을 묶어 놓았다. 7개 섬 가운데 최전방 무인도인 황토도에 해병 1개 소대를 전진 배치했다가 북의 특공대 야간기습으로 모두 전사당한 참담한 경험을 했다. 그렇지만 영흥만 일대는 정전이 될 때까지 해병대가 완강히 방어했다.
서울대 영어영문과 출신 안광식(安光植)씨도 해병대 장교로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 연락장교로 여도를 지켰다. 당시 시간당 적의 포탄 200발을 견디어 냈다고 회고한다.
또 경향신문, 동아일보 출신의 윤양중(尹亮重)씨도 해병대소위로 서해 5도를 지킨 참전을 통해 오늘의 NLL 사태를 증언했다. 해병대와 유격대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서해 도서들을 정전협정으로 북측이 돌려주고 철수했다는 증언이다.

부자 신병 가운데 5대독자 전사

동아일보에서 활약한 김준하(金準河)씨는 고대 정외과 1학년 때 6.25소식을 듣고 학생대표를 국방부에 보내 “우리에게 무기를 달라”고 청원했던 분이다. 이미 동국대 운동장에는 인민공화국 깃발이 날리고 대포소리가 잦아 피난길에 나서 걸어가다 기차타고 부산 피난민 수용소에서 주먹밥 얻어먹다 자원입대 했다.
미군이 상륙할 때 “영어 아는 이 있느냐”는 물음에 손들고 나가 신병훈련 2주 받고 미 25사단 야포대대에 편입됐다. 미 25사단이 서울을 수복할 때 미군작전을 지원하고 북진 행렬이 개성에 이르렀을 때는 미군에게 선죽교 내력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 평양 탈환 후 북진하면서 선천, 개천등지의 양민 학살 시체들을 보고 압록강변 팔원지방 논바닥에 천막을 치고 야영하다 중공군 기습공격으로 후퇴했다가 서울을 다시 수복하는 전투 과정에 끝까지 참가했다.
평양 태생인 김집(金鏶)씨는 단신 월남, 제주도에서 자원입대하여 한라산 무장공비 소탕하다 6사단 7연대에서 38선 경계하다 6.25를 만났다. 춘천전투에서 3일간 인민군의 진격을 막고 음성전투에서 적 1개 사단을 섬멸하여 1개급 특진으로 1등 중사가 됐다.
당시 신병들은 M1소총 실탄 장전도 서툴러 신령으로 가는 길에서 사격훈련을 했다. 신병 가운데 43세의 ‘늙은신병’과 20세의 신병은 부자간이었다. 딱해 보여 ‘늙은신병’을 대대 취사병으로 보낸 후 전사자들을 조사하니 아들 신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5대 독자였다.
9.28 수복 후 북진 속도가 인민군의 후퇴속도를 앞질렀다. 순천을 점령하고 개천에 도착했을 때 인민군 총좌를 생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압록강변에 도착하여 통일을 외치다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걸려 후퇴하면서 인민군 패잔병 2명을 생포하여 감자를 나눠먹었다. 인민군이 북으로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데려와 국군에 편입시켰다.


이등병 참전 후 다시 통역장교

이밖에도 황해도 연백출신의 이구열(李龜烈)씨는 1.4후퇴시 남하하여 갑종간부 포병소위로 감화지구 전투에 참전했고 성대 영문과에 재학중이던 유승택(柳承澤)씨는 경찰특공대를 거쳐 공군 헌병으로 참전했다.
한국논단 이도형(李度珩) 발행인은 이등병으로 참전하여 중공군의 수류탄 공격에 부상을 입고 포천 5이동외과 병원에서 40일간 입원했지만 나중에 제대증을 분실하여 병역기피자로 몰렸다가 다시 통역장교 시험을 거쳐 육군대위로 전역했다.
연합신문, 한국일보를 거친 이세환(李世煥)씨는 청주사범 6학년생으로 대구에서 공군사관학교에 입교, 특무대로 차출되어 특수교육을 받고 원산 앞바다 첩보기지에서 활약했다. KBS 전국 뉴스부장 출신 안현태(安顯泰)씨는 갑종장교 소위로 6사단 19연대 소대장, 한국일보 견습 1기생인 이순기(李淳紀)씨는 연대 1학년 때 입대하여 7사단 5연대 분대장으로 오봉산 백병전을 치렀고 조선일보 출신의 이종식(李鍾植)씨는 육군 위생병으로 저격능선과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경향신문 사진부 홍성혁(洪性革)씨는 북한 의용군에 끌려가다 탈출하여 육군통신학교를 거쳐 통신병으로 북진에 참가했고 대구매일 출신 황대연(黃大淵)씨는 하사관으로 헌병사령부 행정요원으로 근무하면서 게릴라 수색작전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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