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1970년대 취재수첩 15]


'싸우면서 건설하자'

급박 처절했던 세월

吳源哲 전 수석, 중화학, 방산 주도

金善弘 전 회장도 그때 그 시절 증언


2014-01-03_101009.jpg 북한 김일성은 1970년대가 오기 전에 대한민국의 숨통을 끊으려고 시도했다. 5·16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성공하여 남한의 공업력이 북한을 능가하게 되면 적화통일의 기회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당시 북한의 공업력과 군사력은 남한을 압도했다. 게다가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 7사단은 1970년 초 철수했다. 김일성은 이때 결정적인 대남 적화통일 시기가 성숙했다고 오판하게 됐다. 그렇지만 반정부 세력은 이 시기의 절박하고 처절했던 국가안보 태세를 정권 유지용이라고만 혹평했다.
그리고 오늘의 집권세력은 ‘그때 그 세월’의 국가적 악몽을 모른 채 ‘안보독재’ 시절이었다고 악평하니 대한민국이 통곡하고 하늘이 진노할 노릇이 아닌가.


급박하고 숨 막히던 시절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고 대한민국 심장을 파괴하려던 무지막지한 도발이었다. 그 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해군 방송선 납치, 국립현충문 폭파사건 등 끊임없는 도발과 침략 야욕이 나라의 안정과 성장을 뒤흔들었다.
당시 국립현충문에 원격 조정 폭탄을 장치하여 박 대통령을 저격하려던 음모는 그 뒤 1983년 10월 아웅산 묘지 폭파사건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목을 겨냥한 음모로 재현 되었었다.
이 무렵 미 지상군의 철수를 자주 거론한 닉슨 독트린은 결과적으로 김일성의 야욕을 부채질 했다. 1970년 7월 미 7사단이 철수한 후 1974년 11월 남침용 땅굴이 발견되었다. 땅굴은 남방 한계선을 1.1㎞나 남하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남침용 땅굴은 계속 발견되어 제4 땅굴까지 드러나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북의 노골적인 침략에 대응하여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은 정부의 기본 임무였다. 정부는 ‘1면 건설, 1면 국방’ 방침을 발표하며 ‘싸우면서 건설하자’고 했고 민간 부문에서는 ‘일하면서 싸우자’고 했다.
이 시기의 민·관은 국가안보에 관한한 이론이 있을 수 없었다. 국가안보 최우선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도 없었다. 이 결과 김일성의 야욕을 분쇄하고 경제발전과 오늘의 민주화까지 성공한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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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통을 교주로 중화학 선도


정부는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비군을 창설하고 방위세를 신설했다. 중화학공업 선언과 방위산업 육성계획도 이때 나왔다.
1971년, 청와대에 중화학 전담 제2경제비서실을 신설하고 상공부에서 중공업 정책을 맡고 있던 오원철(吳源哲) 씨를 임명했다. 오 수석은 10·26으로 박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중화학과 방위산업의 화신으로 역할 했다.
기본적으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상호 보완적 발전관계이다. 민수용 공장의 경우에도 일단 유사시에는 방산용으로 전용할 수 있다. 별도로 방산공장들을 지정했지만 역시 민수용과 겸용토록 했다.
이보다 앞서 1970년에는 병기류와 무기체계 연구 및 시작품 제작과 실험을 위해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전문 인력 양성과 국가기술자격 검증제도 등을 정비했다.
중화학공업은 정밀공업이 뒷받침 한다. 최소한 1천분의 1미리 정밀가공이 필수이기 때문에 정밀공업 육성을 서둘렀다. 또 특수강과 동제련, 철강과 비철금속 및 전자부품도 육성해야만 했다.
1973년 7월 준공된 포항종합제철을 비롯하여 삼미특수강, 온산 동제련, 여천 제2 석유화학, 창원기계공단, 구미전자공단, 옥포조선과 삼성조선 등이 이 시기의 중화학공업 육성과 자주국방이라는 큰 밑그림에서 나왔다.


중화학과 방산으로 국력 역전


중화학공업 선언은 북의 직간접 침략에 전전긍긍하던 수세에서 정면으로 국력증강을 통해 대응하겠다는 공세였다. 그리고 국민들에게는 필승의 자신감을 안겨주어 총력 안보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1973년 1월 12일의 중화학 선언 때 1980년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목표를 제시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당시 여건으로 80년도 수출 100억 달러는 가당치도 않는 과욕이라는 지적을 받았지만 이를 1977년에 달성했으니 당시 민·관 합동의 총력태세가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중화학과 방위산업은 국가안보 차원의 남북대결 성격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수출산업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 정부는 ‘전 산업의 수출 산업화’를 국책과제로 설정하여 방위산업의 수출화도 동시에 추진했다.
이 결과 남북의 국력은 역전되기 시작하여 북의 대남 공작도 다소 바뀌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공산당에게는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었다. 아마도 김일성이 무수히 간첩을 내려 보내면서도 일면 남북대화를 생각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화학 화신에게 과잉투자 올가미


중화학과 방산의 화신 오원철 수석은 10·26 사태 후 부정축재라는 엉뚱한 혐의로 구속되는 신세가 됐다. 당시 신군부가 부정축재 혐의를 씌운 것은 특별한 사연이 따로 있었지 않았을까 짐작되는 항목이 적지 않다.
오 수석이 방산 분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에 공군 수뇌부를 비롯한 군부 실력자들과 마찰을 빚은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수석은 방위산업 추진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국익과 자주국방 차원에서 박 대통령을 움직였겠지만 이때 군부의 일부 세력은 자기네 이익이 손상됐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하나 오 수석에게는 중화학과 방산 분야의 중복, 과잉투자라는 올가미가 씌워졌다. 10·26 이후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오 수석이 단죄의 대상이 됐다. 당시 신군부에게는 과잉투자를 조정한다는 명분으로 통폐합 조치를 단행하기 위해서는 속죄양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떤 경우이건 박 대통령이 사라진 후 오원철 수석은 무사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를 국보급 충신으로 아꼈지만 신군부 집권세력의 입장에서는 무리하게 과잉투자를 이끌어 낸 간신으로 분류시켜야만 했다.
이 때문에 오 수석은 박 대통령 집권 시에는 김일성의 저격 표적이 됐고 10·26 후에는 신집권세력의 처단 표적이 됐다고 믿어진다.


침실에 2중 자물쇠와 엽총


실제 70년대 중화학과 방산을 생각하면 오 수석은 박 대통령의 자주국방과 조국 근대화 신념의 열성신도였다. 박 대통령 서거는 오 수석이 교주를 잃고 몰락한 운명이었다.
그 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오 수석은 끝내 재기하지 못한 채 이름 없는 야인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 오 수석은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을 만들었나’(동화문화사)라는 저서를 통해 그때 그 세월을 온갖 자료를 통해 소상히 밝혔다. 중화학공업이 결코 과잉투자나 중복투자가 아니었으며 박 대통령을 교주로 삼아 권력을 남용하거나 사익을 추구할 입장이 아니었음도 잘 해명했다.
80년대 말 야인으로 방황하며 이따금씩 소주 집에서 만날 수 있었던 오 수석을 반포아파트 자택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부인이 사망한 후 혼자 기거하며 등산으로 소일하고 있던 시기였다.
듣던 소문대로 아파트 거실과 침실 주변은 육중한 자물쇠가 겹겹이고 창문은 2중 철조망으로 보호되고 침실에는 엽총이 놓여있고 파출소와 연결된 비상 호출망이 가동하고 있었다.
엽총은 JP의 형 김종낙(#金鐘珞) 코리아타코마조선 사장이 호신용으로 구해다 준 총이라고 했다. 언제인가 청와대 수석실로 찾아온 김종낙 씨가 북의 암살 대상자 최상위 순위에 오 수석이 올라 있다는 첩보를 들러주며 엽총을 선물했다고 한다.
중화학과 방위산업을 밀어붙인 오 수석에게 김일성이 얼마나 분노하고 괘씸하게 여겼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70년대 국가안위가 위태로운 시절의 생생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북한 공업력 ‘별것 아닙니다’


2014-01-03_103205.jpg 오 수석은 황해도 송화군 풍천면에서 태어난 집념과 의지의 인물이다. 1945년 경성공전 화공과(서울공대 전신)를 나와 6·25때는 공군 기술 장교로 복무하고 시발자동차 공장장으로 있다가 5·16 후 상공부 화공과장, 공업 1국장 등을 거쳐 박 대통령 사람이 됐다.
닉슨 독트린에 자극 받은 박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염두에 두고 중화학과 방산 육성을 추진하자 김정렴(#金正濂) 비서실장의 추천으로 청와대 제2경제수석으로 발탁된 것이다. 오 수석의 전문 분야가 중화학이었으므로 국가안보 차원에서 보면 박 대통령과 오 수석의 만남은 국운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1973년, 박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에서 북한 선전영화를 보며 중공업 분야의 발전상에 놀라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던 적이 있었다. 그 뒤 청와대 회의에서 모든 참석자들이 기가 죽어 아무 말도 못할 때 오 수석이 나서 “그거 별것 아닙니다”라고 용감하게 진언하여 박 대통령이 용기백배 했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이때부터 중화학과 방산은 사실상 오 수석의 주도 하에 대기업의 투자와 정부의 전폭적 지원으로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중화학의 수출산업화는 국가안보를 고려하여 양패(兩肺) 기능이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한곳에만 집중시켰다가 북의 도발로 기능이 정지될 위험에 대비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제2석유화학단지, 제2제철 및 자동차와 조선소의 분산 배치 등이 이를 말해준다.


미완의 가로림만 프로젝트


오 수석은 최근의 저서 ‘박정희는 어떻게…’에서 1976년 행정수도 이전계획과 국토개편 계획 등도 이 같은 국가 차원의 장기 프로젝트였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가로림만(加露林灣)을 미완성 프로젝트로 소개했다. 국토개편 대구상으로 남부공업지구와 중부공업지구 등을 검토하다가 서해안 가로림만을 착상했다.
오 수석은 가로림만이 수심 20m의 좋은 조건을 구비하여 중국의 상해, 청도, 천진 보다 유리하고 북의 남포항 등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동양 최대의 항구로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헬기에 정주영 회장을 동승시켜 가로림만 일대를 시찰한 후 동북아 허브항의 적지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10·26으로 이 프로젝트는 빛을 잃고 말았지만 오 수석은 서해안 시대나 동북아 중심국이라는 최근의 국가적 프로젝트에 비춰보면 아직도 유효한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자동차 그만하고 대포 만드세요


2014-01-03_103607.jpg 김선홍(金善弘) 전 기아그룹 회장을 통해서도 70년대 국가안보가 절박했던 시대상황과 오원철 전 수석의 맹렬 역할에 관해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김 전 회장은 오 수석과 서울공대 동문 사이로 몰락한 오 수석이 오갈 데 없을 때 기아그룹 고문으로 초빙하여 예우한 적이 있었다.
김 전 회장이 남긴 ‘아직도 갈 길이 멀다’(93년 발행)라는 책에 따르면 1975년 10월, 오 수석으로부터 청와대 호출을 받아 갔더니 “자동차는 그만하고 대포나 만드세요”라고 권유했다. 깜짝 놀라 “대포를 어찌 생산하느냐”고 반문했더니 “이는 나라가 맡기는 사업”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급히 창원에 기아기공을 설립하고 번개같이 이듬해 4월까지 대포를 생산하는 설비를 갖춰 가동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아에 이어 현대, 대우, 삼미, 한화 등 많은 대기업들이 방산에 참여한 것도 이와 유사한 권유와 동기가 작용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국산 브리사 시판허용 지시


김 전 회장과 오 수석 사이에는 국내 최초의 국산모델 브리사(BrisA)승용차를 통한 인연이 쌓여 있었다.
브리사를 개발한 후 상공부의 시판허가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해 식목일 날, 당시 김선홍 상무가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을 지키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의 기습 방문을 받았다. 수원에서 식목 행사를 마친 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가다가 용변 때문에 소하리 공장에 들렸었다.
이때 박 대통령이 브리사 시제품을 보고 “무슨 자동차냐”고 묻자 김 상무가 국산모델로 개발하여 시판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답변했다. 귀로에 박 대통령이 김정렴 실장에게 내용을 알아보도록 지시하자 김 실장이 카폰으로 상공부 장관에게 귀띔하여 브리사 시판이 허용되어 택시용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던 것이다.
그 뒤 광주의 아세아자동차 공장이 부도위기에 빠졌을 때 오 수석이 박 대통령에게 권유하여 기아가 이를 인수토록 주선하는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삼성 거부로 기아가 아세아 인수


광주 아세아자동차는 이문환 씨가 버스공장으로 세웠으나 준공 1년 만에 산업은행 관리로 넘어 갔다가 다시 동국제강이 인수했지만 경영난이 심각했다.
이태리 피아트사와 제휴하여 피아트 124를 생산하기도 했으나 승용차 시장규모가 영세한 시절이라 부도를 막기 어려웠다. 박 대통령은 호남지역 유일의 자동차 공장 부도를 몹시 걱정하여 김용환(金龍煥) 재무장관에게 “부도를 막을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곤란합니다”는 답변이었다.
이때 오 수석이 방위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있던 삼성그룹에 인수토록 권유하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여 박 대통령이 이병철(李秉喆) 회장에게 요청했지만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당시 이 회장은 “각하의 염려사항”이라 깊이 검토했지만 “방위성금을 많이 내는 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라고 거절했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이를 매우 섭섭하게 여겨 폭음을 하는 자리에서 기아자동차 김선홍 상무를 이야기 하여 아세아자동차를 인수케 했다.
당시 병환 중이던 김철호 기아 회장은 대통령의 관심사항이라는 말에 무조건 인수를 지시했다고 한다.


007 극비 작전으로 장갑차 생산


기아가 아세아를 인수하자 박 대통령은 울산의 현대차, 경기도의 대우차, 광주의 아세아자동차로 3사의 분산이 잘됐다고 흡족히 여겼다. 아울러 아세아의 경영안정을 위해 군용차량 독점 생산권을 부여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공장을 방문 격려했으며 외아들 박지만 군이 여름휴가 때 진해로 내려가기에 앞서 아세아공장을 둘러보고 인사하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그 무렵 김선홍 상무는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전두환(全斗煥) 장군의 호출을 받았다. 전 장군은 북한이 AN2 무인 경비행기로 요인들을 저격하려는 첩보가 있어 장갑차를 만들어야겠으니 기아가 책임지고 생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문제는 서독의 벤츠 모델을 도입해야 하지만 NATO 비회원국에게는 엔진을 팔지 못하도록 규제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기아는 산업스파이 역할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몰래 샘플을 확보하여 국적 불명의 수송기 편으로 LA를 거쳐 김포공항까지 날라 오기까지 숨 막히는 007 작전을 벌였다. 박 대통령과 오 수석의 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를 심지어 공항에 나와 있던 정보 요원들과 육군 수뇌부까지도 낌새를 못 차리고 있었다고 하니 그 당시 국가안보를 위해 목숨을 건 극비작전이 얼마나 무시무시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머리털 뽑아 가발 수출이라도… 전통


기아가 방위산업에 헌신적으로 공헌한 것이 헛되지 않아 70년대 북의 적화공작을 잘 방어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기아는 김철호 회장 타계 후 김선홍 회장 체제로 앞을 내다보고 아사만 시대를 개척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시절 김선홍 회장이 전두환 장군의 요청으로 국산 장갑차를 생산한 인연이 살아남아 기아의 아산만 시대가 개막될 수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1985년, 기아는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 일대 공장 부지를 마련했지만 수도권 정비위원회의 규제로 공장을 지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전두환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간담회를 갖는 자리에서 김 회장이 이를 직소했다. 자동차 수출을 본격화 하자면 아산공장 건설이 시급 하지만 수도권 규제에 묶여 착공을 못하고 있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은 수출을 촉진하자면 규제를 풀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내가 머리털을 뽑아 가발 수출이라도 해야 할 판국인데 보다시피 맨머리이니…”라고 농하며 경제수석에게 지시하여 87년 5월 공장을 착공, 90년 11월에 완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기아가 이란에 600대의 지프를 수출코자 부산항에 대기시켜 놨다가 미국 인공위성에 찍혀 미 대사관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미국은 이란에 군수물자 수출을 강력 통제하고 있을 때였다.
김 회장은 전 대통령에게 군용 지프가 아닌 산림 감시용인 민수용이라고 우겨 해명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이 김재익 수석을 불러 “산림 감시용이니 선적토록 조치하라”고 지시하여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국가안보가 다급했던 세월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소감이다. 요즘처럼 분배와 복지가 강조되고 인권과 평화가 중시되며 남북관계도 화해와 협력시대로 발전한 시점에 그때 그 시절을 제대로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싸우면서 건설하자’와 ‘일하면서 싸우자’는 절박한 구호 아래 모진 삶을 살아온 경험 세대에게는 눈물겨운 추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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