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현재 국내외적으로 중대한 위기국면에 처해 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에 포위당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정치권의 소모적인 정쟁과 노동계의 불법파업 및 폭력화된 시위문화로 인해 국가 전체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더구나 북한의 끈질긴 도전으로 인해 국가의 신인도가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다.
특히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잔인한 숙청사건이 국내외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한국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현재 선진국 문턱까지 온 우리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의문시되고 있다.
본지는 난국타개와 경제부흥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역대정권 경제각료부터 그들의 과거 업적과 혜안을 알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제2의 한강기적을 찾다 1]


관료주도 경제개발 회고

중동특수 창조특명

高炳佑 전 건설부장관 이야기

글/ 최택만(편집위원,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사채동결 ‘긴급명령’ 시절


2014-01-28_095547.jpg 중동특수를 일으킨 주인공이 해외진출 국내건설업체들이고 중동 붐을 적극 유도한 주인공은 정부이다. 정부 내에서 해외 건설행정을 주도한 관료 가운데 한사람이 고병우(高炳佑) 전 건설장관이다. 고 장관은 초기부터 중동신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정부의 중동 진출 업체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집행한 각료이기 때문이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 경제비서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해서 1993년 건설부장관이 된 고 장관은 관료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비화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자 신중한 표정으로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제가 입안한 보고서를 보시고 흡족하시며 결재란에 큰 글씨체로 ‘박정희’라고 쓰셨습니다.”며 비화를 소개했다. 고 비서관이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 직접 관여한 주요 시책은 해외건설 업체에 대한 지원조치, 8.3 사채동결과 물가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 등이다. 재무부 재정차관보로 자리를 옮긴 뒤 담당했던 주요업무는 매년 100개씩 기업이 공개한 8.8조치, 증권감독원과 신용보증 신설, 건설신화를 창조한 중동 진출업체에 대한 각종 지원대책 등이다.
1993년 건설부장관으로 임명된 후 김영삼 대통령이 선거 당시 공약한 그린벨트 해제 조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중대한 정책결정에 고심했다. 김 대통령은 고 장관에게 임명장을 준 뒤 그 자리에서 “그린벨트 문제도 있고 건설부에 어려운 일이 많으니 잘해달라”는 특별당부가 있었다.


중동건설 관련 박 대통령의 특명


고 장관과 필자와의 대담은 청와대 건설담당 비서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1973년 중동에는 때마침 석유감산시책이 발표되면서 원유값이 폭등, 달러가 넘쳐났다. 그러자 중동 각국이 오일달러로 앞다투어 도로를 개설하고 주택을 대량 건설하는 동시에 항만은 축조해 바다를 메우는 공사 등으로 인해 대량공사 붐이 불어 닥쳤다.
2014-01-28_095838.jpg 베트남에서 미군공사를 도급받아 건설을 하던 한국건설 업체들이 1974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쫓겨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우리 업체들 가운데 대다수 업체가 중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내 건설업체들이 중동에 진출해보니 “달러가 길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중동건설 시장에서 건설공사를 수주하려면 2개의 국내은행 보증서가 필요했다. 월남에서와 다른 절차가 필요했다.
“중동건설 업체들이 공사수주를 하려면 먼저 입찰과정에서 국내은행이 발행한 입찰보증서(B본드)가 필요했어요” 또 “입찰에 성공한 뒤에는 공사를 차질없이 시행하겠다는 이행보증서(P본드)를 제출하지 않으면 공사 수주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 비서관은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국내은행들이 B본드 발행을 해주지 않는다는 진정서가 재무부에 쇄도했습니다.”
당시 우리 건설업체 대부분이 자산이나 담보능력이 부족해서 은행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또 너무 많은 업체가 중동에 진출, 과당경쟁을 하고 일부일체는 부실공사로 발주회사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자 박 대통령이 건설비서관에서 경제수석 대행으로 승진한 고 수석을 불러 지시했다.
2014-01-28_100102.jpg “한국 건설업체들이 중동에서 과당경쟁과 덤핑 수주를 하고 어떤 업체는 부실공사를 하고 있으니 철저히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대통령은 또 부실공사는 건설업체의 신인도가 떨어지는 동시에 국위선양에도 배치되는 일이니 철저히 조사해서 대응책을 세우라고 부연 설명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고 수석대행은 며칠 밤을 새워가며 대책을 강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중동 진출 업체의 부실공사를 사전에 막기 위해 이미 중동에 진출해 있는 14개 업체에 한해 중동공사를 하도록 한다.
② 과당경쟁을 막기 위해 한나라에 2개 회사씩만 진출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고 수석대행의 보고서를 본 뒤 흡족해하시며 결재란에 크게 ‘박정희’라고 사인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서류나 보고서가 마음에 들면 크게 사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은 글씨체로 서명하거나 결재를 보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5인위원회가 지급보증 여부 판정


중동에 건설업체들이 진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잇따라 발생했다. 1975년부터 업체들의 대형공사 수주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동진출 업체들로부터 “주거래은행이 지급보증서를 써주지 않아 공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진정서가 잇따라 들어왔다. 이렇게 되자 은행은 은행대로 고충이 있었다. “천만달러 이상에서 억달러에 이르는 공사의 보증서를 발부했다가 만일 잘못되면 은행이 망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항변했다.
2014-01-28_100258.jpg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때 고 경제수석대행은 재무부 재정차관보로 자리가 옮겨 있었다. 청와대에서 하던 해외 건설업무를 재무부로 옮겨서도 그 업무를 맡아야 했다. 은행의 지급보증 문제는 재무부가 소관부처이고 장관 이외의 최고책임자는 재정차관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 차관보는 자신과 경제기획원 협력차관보, 건설부 관리실장, 중동업체담당 중앙정보부 국장, 해당 은행의 여신담당 상무 등으로 지급보증업무처리 5인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회의가 개별업체의 지급보증 발급여부를 심의했다. 이 회의에서 통과되면 해외진출 건설회사가 담보력이 부족해도 국책사업처럼 은행이 무조건 지급보증서를 발부해야 한다. 일단 지급보증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몇십억원의 담보능력도 없는 건설업체가 500억 이상의 지급보증서를 주거래은행이 책임지고 발부해도 은행은 책임이 없지만 5인위원회 위원들은 공사가 잘 안 되고 부도가 나기라도 하면 문책을 당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문제는 현지의 기업들이 어떤 수준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다행히 중앙정보부의 중동국장이 현지 대사관으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듣고 판단한 개별기업자료를 제시했다. 5인위원회가 중앙정보부 자료를 토대로 ‘해당회사가 공사를 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할 수 없는지를 판정했다.
이 위원회가 신속한 결정을 해주고 지급보증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생기면서 중동 건설은 한층 더 활력을 받게 되었다. 물론 정부도 보증서 발행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한국은행 이우영 차장을 부장으로 승진시켜 현지 총감독관으로 임명하고 그 밑에 여신은행들로 하여금 유능한 책임자로 공사 진행과 자금지출을 체크하고 은행에 보고케 했다. 또 공사업체로부터 공사가 부실할 때에는 언제든지 다른 업체에 이관한다는 서약서를 받아 두었다.
공직자들이 그 당시 몸을 사리고 나 몰라라했으면 우리나라 중동 붐은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건설 선수금 환전으로 통화량 급증


중동건설 붐은 진출업체의 부도 말고도 고 차관보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1978년 1월 1일 새벽 3시경 재무부 금융정책과의 연말 계수를 담당하고 있던 연원영 사무관이 긴급보고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1977년도는 경제성장도 빨랐지만 유신경제 목표인 1,000달러 국민소득 달성, 100억달러 수출이 2년을 앞당겨 조기 달성된 해라서 모든 지수와 개별목표가 달성되었다. 이로 인해 1977년 중 통화목표를 몇 번씩 수정하여 연간 28%에서 안정되었다고 대내외에 발표되었다.
2014-01-28_100547.jpg 국회에서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가 국회의원의 질문을 받고 31% 수준이 될 것 같다고 보고하는 것을 고 차관보가 김 총재 옆으로 가서 발언을 수정하며 28%를 지키겠다고 답변하도록 종용했다. 그런데 그날 연 사무관이 집계를 해보니 “41.5%의 증가로 나타났다”며 큰일이라고 호소해왔다. “원인을 알아보았느냐”고 물으니 12월 31일 은행마감 후 오후에 “현대건설이 외환은행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 건설공사의 선수금 2억달러를 환전해 가서 1,000억원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1,000억원이면 전체통화량의 꼭 10%에 해당된다. 당시는 중동달러를 원화로 환전할 수 없었다.
재무부는 한국은행 총재의 국회답변이 정확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발표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낮게 발표하도록 한 것이다. 현대건설이 선수금(달러)을 원화로 환전해 감으로써 당초 통화량이 31.5%에서 45.1%로 무려 10% 포인트가 늘어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고 차관보는 날이 밝자 1월 1일 김용환 재무장관과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새해인사와 더불어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대한 사후조치는 외환은행담당 상무와 실무책임자를 문책하는 선에서 끝났다.
중동진출 건설업체 제한은 오래 지속되었으나 진출희망 업체가 너무 많이 생겼기 때문에 1976년부터는 34개 업체로 늘었다. 그러나 1978년 후반에 당시 건설부장관인 신형식씨가 당초 유신목표 100억달러 수출 실적을 조기달성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해외건설업체 동향보고를 하면서 “중동진출을 희망하는 업체수를 늘이고 업체당 1년에 1억달러씩만 수주해오면 한국의 총수출목표 100억달러를 해외건설만으로 가능하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건설업체가 급증하게 되었다.


부실공사에도 터무니없는 항변


중동진출 업체수가 크게 늘어나면서부터 부실공사를 하는 업체가 생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박 대통령은 그러한 정보를 입수한 뒤 재무부 재정차관보인 고병우씨를 다시 불러 “중동건설 현장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주무부서도 아닌 재무부의 재정차관보가 중동건설 현지조사단장이 되어 건설부 기획관리실장(정재덕)을 부단장으로 경제기획원, 상공부, 보사부, 노동청 등의 국과장급 10여명과 함께 바레인, 이란,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요르단 등 중동 각국 한국건설업체 현장을 상대로 조사를 했다.
조사결과 어떤 건설업체는 항만축조공사를 하면서 엄청난 부실공사를 한 것이 적발되었다. 이 업체가 시행한 항만축조공사의 경우 곳곳에 구멍이 나 물이 샐 정도로 날림공사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공사책임자는 “공사가 끝나면 물이 잠기는 부분이니 아무 걱정말라”고 기막힌 대답을 했다고 한다.
다른 업체는 주택건설을 하면서 안방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 집을 지었다. 그러고도 “아랍사람들은 모래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방문이 제대로 맞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 차관보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장차 대한민국 건설업의 미래가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반면에 다른 많은 업체들은 공사를 잘해서 발주한 회사로부터 “감사하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고 차관보는 중동현장을 돌아본 뒤 주의해야 할 사항과 업체 건설현황 및 신인도를 총정리하여 청와대와 건설부 등 관련 부서에 보고하고 시정상황을 더 조사하여 중동건설업체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고 차관보는 대담이 끝날 무렵 흥미 있는 비화를 털어놓았다.
“현대건설은 사우디 주베일 항만 공사 선수금 1억달러(1000억원)를 환전해서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지었습니다”라고 자신이 징계를 당할 수도 있었던 선수금 환전사건의 내막을 솔직히 말해주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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