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총선결과는 야당이 승리했다. 고병우 당시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은 총선 직전 부가가치세법 시행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는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이 선출되기 때문에 야당표의 총수가 여당표보다 3%가 많았다. 이 결과 문책론이 제기되어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용환 재무부장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이 경질됐다.

[제2의 한강기적을 찾다 2]

국보위시절 강제퇴임 그후

YS정부 건설부장관

그린벨트 민원 입씨름 끝에 시행령 개정

쌍용그룹, 취임수락 않은채 급료 보내와

글/최택만(편집위원,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국보위 ‘살생부’ 올라 80년 8월 숙청

2014-03-12_091007.jpg 문책인사로 남 부총리와 김용환 장관은 옷을 벗고 김정렴 실장은 주일 전권대사로 옮겨갔다. 고병우 실장은 부가가치세와 직접 관련이 없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 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수사를 담당했던 전두환 보완사령관이 ‘12.12사태’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 무렵 고병우 실장은 보안사 간부로부터 전 사령관을 소개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국변사태 중에 군이 정권을 탈취하면 ‘나라발전은 후퇴한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당시 서울신문 경제부장 대우로 재무부를 출입하던 필자도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이때 전 사령관 면접을 통해 선발된 국보위(國保委) 위원들이 전 사령관에게 충성할 사람과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YS와 DJ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 고급관료들을 색출한 살생부가 나돌았다. 고병우 실장은 경우도 살생부에 올라 1980년 8월 13일 통지를 받고 퇴직했다.

쌍용중공업 거쳐 쌍용증권 사장

고 전 실장은 1981년 2월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이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회장실을 방문했더니 “쌍용에 와서 쌍용중공업을 맡아달라”고 말했다. 고 전 실장은 전 정권에 의해 숙청자 취업금지 조치에 따라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사실을 김 회장에게 말하고 회장실을 물러 나왔다.
김 회장은 그달부터 취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정액의 월급을 보내주었다. 그는 출근도 않는 상태에서 월급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월급을 돌려보냈다. 그런데도 쌍용 측은 쌍용중공업의 현황과 업무계획서를 검토해서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용역형식으로 월급을 보내왔다. 이렇게 해서 고 전 실장은 쌍용그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1981년 7월 13일 쌍용중공업 대표이사 부사장이 된 것이다. 쌍용중공업에서 사장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부족자금의 융자를 얻어오는 일이었다. 연간 매출액이 연간 지불해야 하는 이자보다 적은 회사에 대출을 해줄 은행이 없었다.
이익이 많이 나는 쌍용양회가 지급보증을 한다 해도 상대해줄 은행이 없었다. 소위 주거래은행이라고 하는 상업은행은, 행장은 물론이고 상무도 영업부장도 고 사장이 찾아가겠다고 해도 만나주지도 않는 상태였다. 다행히 주거래은행도 아닌 조흥은행에서 동기 동창인 송기태 행장이 고맙게도 융자를 해주었다.
쌍용중공업의 매출을 10배나 올리고 회사가 막 돌아가고 있는데 김 회장이 고 사장을 불렸다.
김석원 회장이 고 사장을 보자 본론부터 꺼냈다.
김 회장은 “이번에 저희 쌍용에서 효성증권을 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쌍용그룹에는 금융이나 증권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고 사장께서 이번에는 증권을 맡아 주십시오. 중공업은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지 않았습니까?”
고 사장은 그 자리에서 회장의 부탁을 거절하고 물러났지만 1983년 9월 18일 효성증권 사장으로 부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사장은 선진국 증권사의 경영기법을 배우려고 노무라증권과 야마이치증권을 차례로 순방하며 ‘개인교습’을 받았다. 이어 미국으로 가 메릴린치와 골드만삭스 등 5대 회사를 선정해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다. 신입사원들과 함께 교육을 받은 그의 열정을 보고 어느 미국 회사 사장은 “이런 분이 계시는 걸 보니 한국 증권회사들이 곧 선진화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거래소 이사장으로 주식시장 첫 국제화

고 사장은 우선 자신이 증권맨으로 탈바꿈한 뒤 우수한 대학생을 대거 모집, 교육시켜 우수한 직원으로 만들었다. 인사에 있어서만은 외부청탁을 거절하는 등의 경영쇄신을 통해 쌍용증권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회사를 이끌어갔다. 이 회사는 후일 굿모닝한신증권으로 탈바꿈하여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시기에 한국경제는 국제화가 진전되어가고 있었고 무역규모 면에서도 자본시장을 세계에 개방할 필요가 있을 만큼 성장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내국인끼리의 거래로 두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이럴 때 정영의 재무부장관으로부터 “증권거래소 이사장을 맡아 달라”는 전언이 왔다.
고 사장은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쌍용증권 자리를 떠났다. 고 이사장은 곧 뉴욕증권거래소에 가 이사장을 만나 한국증권거래소의 전산화와 자동감시시스템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몇 번의 모의시험 등을 거쳐 1992년 연초에 증시개방을 선언, 외국인 투자자들도 거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한국 주식시장은 국제화로 가는 획기적인 계보를 내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한국증권거래소를 떠나면서 사내복지기금을 만들어 1천만원을 기탁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50억원이 넘게 모여서 직원들의 복지향상에 쓰이고 있다.

건설부장관 부임하며 그린벨트 민원과 입씨름

2014-03-12_090749.jpg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얼마 되지 않아 막 취임한 장관들의 축재와 비리가 터져 4명이 교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곧 새로운 장관을 물색하게 되었고, 고 이사장이 건설부장관으로 낙점되었다. 고 건설부장관 이외에 법무부장관에 김두희씨, 보사부장관에 여성출신 송정숙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시장에는 이원종씨가 임명되었다. 김 대통령은 임명장을 주면서 고 장관에게 “그린벨트 문제도 있고 건설부에 어려운 일이 많으니 잘해달라”고 각별히 당부했다. 그가 장관으로 있으면서 정한 목표는 ①부실공사 예방을 위한 건설공사 감리제도 ②민간자금으로 주택공급을 위해 임대주택법 개정 ③그린벨트 문제의 해결이었다. 이 가운데 그린벨트 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그린벨트는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영국의 그린벨트를 보고 우리도 대도시의 무절제한 확산을 사전에 막고 대도시의 환경관리를 쾌적하게 하기 위해 설정한 ‘원대한 도시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린벨트를 설정하면서 실무자들이 세밀하게 측량하지 않고 바쁜 가운데 지도상에서 설정하여 인구밀집지역까지도 그린벨트 안에 포함시킨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린벨트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그린벨트 해제하라”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또, 김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그린벨트 해제를 내세운 점을 들어 “그린벨트 해제”를 요청하면서 건설부 과천청사 잔디관장에서 연일 데모를 벌였다.
부임한 지 두 달째 되는 5월부터 고 장관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반 동안 민원인을 직접 만나 민원사항을 청취했다. 민원사항을 들은 뒤 즉석에서 불편사항을 해결해주는 민원상담실을 운영하였다. 민원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그린벨트 해제였다.

도시계획법 시행령 개정으로 일단락

고 장관은 앉아있으면서 민원을 청취하던 방법을 현장방문 청취로 바꾸었다. 한편으로는 “그린벨트를 해제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굳히어 갔다. 아무리 대통령 공약이라고 해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원대한 도시계획’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주민불편을 해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그린벨트 개선방안을 마련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만약 그 당시 그린벨트를 해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했다. 고 장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필자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국토개발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주고 단시일 안에 개선안을 만들어 오도록 요청했다. 2개월이 되자 국토개발원의 안건혁 박사를 비롯한 연구팀이 개선안을 가지고 장관실로 와 보고 했다. 1998년 7월 이 개선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난제는 또 있었다. 환경운동가와 언론인의 그린벨트 해제 반대운동이었다. 언론인을 상대로 세미나를 벌여 의견을 수렴했다.
“그린벨트는 해제하지 않는다. 다만 주민들의 생활불편을 최대한 해결한다”는 최종 결론을 내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건설부에서 1893년 9월 27일 발표되었다. 다행히 그린벨트 개선안은 입법사항이 아니라 도시계획법 시행령을 개정하면 되었다. 이 해 12일 21일 시행령이 개정되었다. 이로써 그린벨트 문제는 그 막을 내렸다.
고 장관은 그린벨트 문제가 해결되자 국토의 숨통을 틔우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국토의 난개발을 막기 위해 마련된 국토이용관리법이 주택이나 산업시설을 지을 수 있는 공간을 지나치게 억제하는 부작용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기업들은 공장을 확장하고 물류가 편리할 곳에 생산시설을 옮겨야 하는데 공장을 지을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 주거를 위한 주택도 증개척에 제한이 너무 많아 불편이 많았다. 그래서 국토이용관리법과 수도권정비계획법을 현실에 맞게 그리고 융통성 있게 개정키로 했다. 국토이용관리법을 개정하여 전 국토의 7.6%밖에 이용할 수 없었던 국토를 43.6%를 이용이 가능토록 확대함으로써 주민들의 생활불편과 기업의 산업시설 확장에 숨통을 트게 했다. 또한 국제화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법을 입법하기로 했다. 우리는 외국에 가서 집도 사고 땅도 사는데 외국인은 한국에 오면 집도 땅도 사지 못하는 법 체제는 국제화 개방화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인도 소정의 절차를 거쳐 허가를 받으면 집과 땅을 쉽게 살 수 있는 외국인 토지소유법안을 만들어 국회의결을 거쳐 시행하도록 했다.

객원교수 거쳐 동계유니버시아드까지

고 장관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쌀을 제외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든 국무위원이 일괄사표를 내는 바람에 1993년 12월 16일 사임하게 된다.
퇴임 후 두 달이 지난 1994년 2월 21일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사흘 뒤 김영삼 대통령이 오찬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김 대통령은 식사가 끝나자 “일을 해야 한다. 꼭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고 전 장관이 우루과이라운드 쌀 개방문제로 억울하게 퇴임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김 대통령과 만난 후 1개월쯤 되어 한이헌 경제기획차관이 전화를 해왔다. 한 차관은 “대통령께서 장관님의 신상을 걱정하시고 계시니 곧 다른 일을 맡게 되겠지만 일을 할 때까지 정부에서 고위공직자들의 브레인풀(Brain Pool)을 만들어 지방대학에 정부가 봉급을 직접 지급하는 객원교수로 활용하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에 참여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고 전 차관은 고향인 군산대학교 객원교수가 된다.
1994년 5월 30일 청와대 김정남 교문주석비서관이 “1997년 1월, 무주와 전주에서 열리는 동계유니버시아드 조직위원장직을 맡으라”는 김 대통령의 하명이 있어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고 전 장관은 할 수 없이 그 자리를 맡아 유니버시아드대회를 동계올림픽 수준으로 격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는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은 공로가 인정되어 군산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건설 회장으로 노사개혁 사례 남겨

1998년 5월쯤 동아건설 부도사태로 최원석 회장이 모든 것을 포기한 가운데 정부와 거래은행이던 서울은행으로부터 회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회사일은 순탄치 않았다. 노조와의 협상 문제, 분식회계 처리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을 풀어야만 했다. 당시 회사 팀별로 혁신과 변화를 주도할 리더를 선발했고 그들은 TCA(Team Change Agent)라고 불렀다.
이들을 통해 현장의 소리를 듣고 경영개선에 반영하는 등 조직에 활력소를 이끌어 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들 간의 모임에서 ①워크아웃 기업에 대한 정부의 긍정적인 홍보 ②해외진출에 있어 일반회사와 동일한 지급보증 ③주거래은행을 부실한 은행(Bad Bank)에 속하지 않게끔 조치하는 등의 건의를 하면서 실질적인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동아건설에 있으면서 △스톡옵션제 △워크아웃 △대표이사 공모 △사내워크아웃 전개 등을 도입하였고 지금도 이러한 제도들은 성공사례로 활용되고 있다. 고 전 장관 2002년부터 경륜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봉사에 나서기 시작했고, 그러한 일환으로 ‘한국경영인협회’라는 경제단체(산업자원부)를 설립, 그 단체에 몸담고 있다. 2003년부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과 가장 신뢰받는 기업’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그리고 바른 사회, 바른 기업을 위한 경영포럼과 현역 경영인을 규합하여 ‘한국경영인포럼’을 조직, 100여명의 회원들이 월 1회 세미나나 간담회를 열고 있다.

혼이 담긴 공무원이 국민에게 봉사한다

고 전 장관은 필자가 공직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요청하자 이렇게 강조했다.
“공직자는 국민을 놀라게 하지 말아야 하고 불필요한 기구와 인원은 과감히 정리하며, 외국인들이 한국에 쉽게 투자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업이 나라를 키우므로 세계시장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하고 대통령은 공무원들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신명 나는 일자리, 혼이 담긴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믿고 지원해야 합니다”라며 힘주어 말했다.
2014-03-12_091059.jpg 또 고 장관이 쌍용그룹과 동아건설에서 최고경영자로 있으면서 느낀 점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노와 사는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노사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대국적 견지에서 일해야 근로자, 국민, 정부 모두가 상생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 전 장관의 마지막 말은 필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고 그 여운이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밀물처럼 밀려왔다. (경제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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