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인민공화국’ 지도자 세 사람(두 사람은 이미 저세상에 갔지만)은 한결같이 불가사의 인물이다. 해방되고 김일성이라는 30대의 젊은이가 소련군의 등에 업혀 평양에 나타났을 때 명성이 자자했던 김일성(金一成) 장군이 아니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같은 김일성이지만 일성(日成)과 일성(一成)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김성주(金成柱)라는 강반석 어머니의 아들이 왜 김일성이 되어 돌아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북한임금님’ 정상인가

사랑 있기에 인생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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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길(연세대 명예교수, 태평양위원회 이사장)

‘북의 임금님들’ 그 속 어찌 알까

김일성을 두고 주체사상 운운하는 사람들을 나는 한심하다고 본다. 그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본받아 북한 전역에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다. 내가 알기에는 매우 양심적인 지주였지만 단지 지주(地主)라는 죄목 때문에 농민들의 죽창에 찔려 죽은 훌륭한 여장부였다. 함경남도 영흥의 한 시골에서 벌어진 참극이다.
김일성의 적위대(赤衛隊), 즉 Red Army라는 조직이 저질렀는데 이것이 인민군의 전신이다.
평양 시내에서 소련군 병사들의 도둑질이 빈번하던 때의 일이다. 피해 주민들이 인민위원회에 이를 호소했을 때(그때만 해도 항의할 수 있었다) 담당자는 “해방군인데 좀 봐줍시다”라며 감싸주는 것을 보고 민족정신이 없는 놈들이라 생각했다.
그 뒤 김일성의 변태는 전 세계가 다 아는 일이다. 그의 복장과 태도와 동작행태는 결코 정상인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그의 식성, 취미, 여자관계 등이 지금은 많이 알려지고 있는데 아무리 김일성의 아들이라 해도 그가 ‘김씨왕조’를 계승한 사실은 한반도를 위하여, 나아가 전 세계를 위해 크게 불행한 일이었다.
김일성의 손자,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은이 등극하여 권력의 2인자로 알려진 고모부 장성택과 그의 추종자들을 단칼에 해치우는걸 보고 세계가 깜짝 놀랐다. 박수를 건성건성 친다는 죄목도 내세워 모조리 죽여버리고도 실실 웃으며 돌아다니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된다. ‘북의 임금님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 아닌가.

양극화된 한국형 정치판

2014-03-14_161633.jpg 고대 최장집 명예교수가 학자들의 정치참여와 관련하여 “양극화된 정치판에서 지식인이 할 일은 미미하다”면서 자신이 안철수 진영에 참여했던 일을 후회한다고 했다. 그 시간에 공부나 하는 것이 옳았다는 것이 그의 소신인 듯하다.
정치참여를 갈망하는 교수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대한 냉엄하고 양심적인 경고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 교수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후진들을 가르칠 생각은 않고 정치판을 넘보게 됐을까. 내가 보기에는 대학이 옛날만큼 흥미롭고 보람있는 일터가 아니기 때문에 떠나고 싶어하는 교수들이 많은 것 같다.
옛날과는 달리 박사학위를 받아들고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이들이 하도 많아서 대학의 전임강사 자리 얻기도 하늘의 별 따기라고 들었다. 게다가 유능한 신진 후배들을 배척하는 과(科)의 ‘노틀들’이 도사리고 있어 요행수로 취직이 됐다고 해도 학과 내 반목과 알력 때문에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들이 빠져나갈 길을 찾아 헤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양극화된 정치판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양극화는 결국 극우와 극좌의 대립인데 누가 극우이고 누가 극좌인가. 야당이 한 번도 집권한 일이 없는 대한민국 역사가 아닌가. 김영삼이 야당 지도자로 대통령이 되었는가. 천만에, 그가 여당으로 들어가서 대통령이 됐다. 또 대통령이 된 YS의 도움이 없었다면 김종필씨가 ‘공동정부’라며 김대중과 손잡고 나서지 않았다면 DJ가 그의 당을 이끌고 15대 대통령이 당선되는 일은 아예 없었을 것 아닌가.
정치판의 양극화를 운운할 단계도 아닌 한국적 정치 기현상을 염두해 두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꽃보다도 아름다운 것

내가 평양 상수공립심상소학교(上需公立尋常小學校)에 입학한 것은 1935년 봄이었다. 어머님이 준비해 주신 모자를 쓰고 가방 메고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모자 벗어 가방 위에 올려놓고 한참 걸어온 까닭은 어머님이 “너 모자는 어쨌니”라고 물으실 때 가방 위의 모자를 꺼내 “여기 있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도 장난기가 많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모자가 없어졌다. 흔들며 걸어오다 길에 떨어뜨린 모양이다. 하도 놀라서 말도 못하고 울고 말았다. 그때 어머님이 “괜찮아”라고 하시며 웃으셨다. 그때의 어머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날 어머님의 미소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어머님의 미소는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나는 무슨 일로 국법을 어겼다고 재판을 받아 15년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어 이럭저럭 1년을 살았다. 뒤에 오재경 선생(전 공보처 장관)을 만났더니 어느 추운 겨울날 나의 누님 김옥길 이대 총장실로 찾아가니 방이 너무 썰렁하여 “왜 이토록 추운 방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동생은 교도소의 냉방에서 고생하는데 내가 어떻게…”라고 말씀하더라고 들려주었다.
출소 후에 그 말을 듣고 혼자 많이 울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형제간의 사랑이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을 떠난 한 여인을 오늘도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나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것을 저어하여 말없이 떠나 말없이 살다가 저세상으로 간 그 사람의 사랑이 없으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것이다.
천성을 향하여 오늘도, 노인다웁게, 천천히 나는 간다. 거기서 나는 나를 그토록 간절히 사랑해준 꽃보다 아름다운 그이들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꿈 아닌 꿈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가는 것이다.

‘사랑의 날’이 따로 있는가

발렌타인(Valentine)이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가 서기 270년경 순교했다는 전설은 있지만 왜 순교자가 됐는지는 분명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독신으로 일관해야 할 그가 어떤 여자와 깊은 사랑에 빠져 처형됐다는 말도 있는데 해마다 서양에서는 2월 14일을 ‘성 발렌타인의 날’로 지키고 있고 ‘애인의 날’(Day of Lovers)로 여기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것이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불필요한 축제의 날이라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사랑의 날’이 있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날 때문에 큰 덕을 보는 사람들은 애인들이 아니라 초콜릿 장사들이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날이 젊은이들만의 사랑의 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누구에게나 사랑이 필요한데 애송이들만 사랑을 알고 결혼한 지 20~30년 또는 50년 된 내외에게는 이날이 무의미하다고 단정하면 큰 잘못이다. ‘젊은 사랑’보다 ‘늙은 사랑’이 더 무르익는 것이고 향기도 짙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노래가 있다는데 ‘너는 가고 나만 남은’ 그런 사랑도 있을 것 아닌가. 그런 이들에게 이날은 ‘사랑을 추억하는 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늙은이도 사랑 없이는 못 사는 게 인생이라는 영원한 수수께끼 때문에 인생은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생각합시다. (경제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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