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재무부장관 유임, 장관 2명 추천 비화

1980년 5월 31일 신군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켜 사실상 국가통치의 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당시 국보위는 과거 체제의 관행에 대한 차별화와 혁신을 명분으로 내세워 정치 전면에 나섰으며 그 핵심은 구조조정과 인적교체였다. 이 당시 재무부를 담당하는 국보위위 고위 운영위원이 재무부 내 인적교체 명단을 가져왔다. 1급 간부와 이재국 4개과 가운데 3개과 과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보위 시절 호남출신 은행장 선임 비화

이 무렵 이승윤 재무부장관은 “이분들은 실력이 있는 분인데 이렇게 대거 바꿔야 하느냐”며 난색을 표했지만 국보위는 그대로 인사조치 했다. 재무부 산하 금융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책은행과 시중은행 은행장과 전무를 모조리 경질하라는 요구였다.

▲ 재무부 장관 시절의 이승윤.

당시 관치금융 아래 있었던 일부 병폐의 청산이라는 명분은 없지 않으나 주무장관으로서 은행장의 전면 교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고 이 장관은 술회했다. 하지만 은행 고위층 교체도 단행되었다. 당시 교체대상 은행은 국책은행과 시중은행을 포함해서 20개에 달했다. 이 장관은 전부 교체하라고 하니 “그 많은 은행장과 전무를 어떻게 찾느냐”는 것이 고민스러웠다.

이 장관은 입각하기 전 5년동안 금융통화운영위원을 지냈기 때문에 금융계인사와 인적 메커니즘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대규모 인선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금융인명사전을 보고 한국은행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부터 2~3명씩 후보 명단을 인선했다.

국책은행장 후보명단을 작성해서 전두환 국가보위 상임위원장을 만났다. 한국은행 총재부터 설명하자 전 위원장이 “이 장관 그거나 잘 모릅니다. 이 장관이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 금융기관장을 교체하라고 하면서 “알아서 하라”고 하니 아무리 신군부 인사라 하더라도 ‘어처구니없는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이때 이 장관은 ‘금융권 인사에서 지역안배를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최종 인사안을 갖고 안가(安家)로 전 위원장을 찾아가 “이번에 옷을 벗는 행장 가운데 호남출신이 둘이 있으니 지역안배 좀 해야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 위원장은 “아 그럴 필요 없어요. 실력이 있으면 어느 출신인들 시키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위원장님 생각처럼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정부 인사에 어느 정도 지역안배는 하는 것이 국민화합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적어도 두 사람은 호남사람을 시키면 어떻습니까?”

“그럴 필요 없는데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오”

그렇게 해서 발탁된 호남출신이 송병순 국민은행장, 장재식 주택은행장, 임재수 조흥은행장이다. 이들이 이렇게 해서 은행장이 된 것은 금융권이 몇 사람 이외는 모르는 비화(秘話)이다.

미국계와 일본은행 유치 배경

이 재무부장관이 재직하면서 중점 시책 가운데 하나는 시대에 맞는 금융체제의 도입이다. 당시 한국금융은 실물경제를 지탱하기엔 너무 부실했고 자금동원도 한계점에 이른 상태였다. 그래서 재무부는 금융산업으로서의 세 가지 요인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경쟁력 강화정책 마련에 착수했다.

그 골자는 ①금융기관의 대형화 추진으로 자금조달 및 공급능력 확충 ②금융의 국제화로 국내은행과 해외금융의 교류증진과 선진금융기법 도입 ③금융의 능률화를 통한 각 금융기관의 균형 있는 발전 등이다. 이를 위해 재무부는 당시 미국은행의 국내 설치와 우리나라와 비슷한 관습과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일본의 금융기업을 도입하기 위해 일본과의 합작은행을 추진했다.

미국계는 BOA(Bank of America)를 들여오는 것은 경제논리 이외에 정치논리로 볼 때도 절실한 과제였다. 분단체제하에서 북한의 무력적인 위협에 놓여있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사실 70년대 말부터 ‘주한미군 철수’설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BOA에 이어 미국 거대 재벌계의 은행인 체이스맨해튼(Chase Manhattan) 은행과 씨티은행(Citi Bank) 유치도 추진했다. 일본과의 합작은 당시 재일 한국인 신용협동조합 협의회장인 이희건 씨의 권유로 신한은행이 국내에 설립되었다.

천명기 보사, 김기철 체신 추천 사연

1982년 9월 1일 전두환 전권이 공식 출범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은 최규하 내각의 3명 장관을 빼고는 전부 개각했다. 그때 이 장관은 유임되었다. 전두환 위원장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8월 하순 이 장관이 전 위원장에게 업무 보고한 자리에서 갑자기 “이 장관 어디 좋은 사람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전 위원장은 “학계에도 있었고 국회의원을 해서 사람들을 많이 알지 않습니까! 기획원 장관을 포함해서 내각에 들어갈 좋은 인물 있으면 추천 좀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장관은 내각 추천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서 대답을 하지 않자 재촉이나 하듯이 “되도록이면 화합형의 인물이면 좋겠습니다. 필요하면 야당출신도 좋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장관은 은행장 추천 때 “화합형 인물을 행장으로 추천하겠다”고 보고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장관은 신군부가 김대중 씨를 구속하고 광주사태를 강제진압한 장본인으로서 인사를 통해서나마 당시 흉흉한 민심을 누그러트리려는 생각을 비로소 갖게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 장관은 며칠간 고심을 계속하다 천명기, 김기철, 유옥우, 최영근 씨를 추천하기로 하고 ‘국보위 상임위원장 비서실’에 면담 신청을 했다. 그런데 비서실에서 대통령 취임 준비로 일정조정이 안 된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 장관은 추천을 체념하고 있을 때 국보위 운영위원장인 이기백(전두환 정권 때 국방장관 발탁) 씨가 재무부 장관실로 찾아왔다. 이 장관은 그를 보자 “전 위원장 부탁으로 인사추천 명단을 만들었는데 비서실에서 면담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전해줄 수가 없다”는 말을 꺼내자 이기백 씨가 “아 그래요. 거참 중요한 일인데” 하더니 무릎을 탁 쳤다.

이 위원장은 “내가 26일 국보위원장을 만나기로 돼 있습니다. 그 시간을 이 장관한테 드리지요” 그러자 마자 이 위원장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실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26일 나와의 면담시간을 이승윤 장관으로 바꾸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이 장관은 전 상임위원장이 대통령 취임을 6일 앞둔 8월 26일 전 위원장을 만나 명단을 전했다.

9월 2일 발표된 내각명단을 보니 천명기 씨가 보사부 장관, 김기철 씨가 체신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천 장관은 김대중 씨 비서실장을 지냈고 김 장관은 김수환 추기경의 측근으로 천주교 평신도회의 회장이었다. 이 장관은 명단발표 뒤 두 사람에게 추천 경위를 설명하고 정부 내에서 서로 협조를 구했다고 한다.

금리인하 놓고 신병현 부총리와 격돌

이 장관은 재임기간 동안 25~30%에 달하는 초고금리를 조정하면서 수출과 투자를 활성화시키는 점진적 금융완화정책을 폈다. 이러한 금융완화정책은 정부 내에서 적잖은 논란을 불러왔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할 때 경제실세로 자리 잡은 김재익 경제수석과 신병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마찰을 빚었다. 이 장관은 오버킬(Over Kill), 초긴축과 살인적인 초고금리는 기업활동을 과도하게 위축시키고 장기적으로는 한국경제에 부담으로 온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김 수석과 신병현 부총리는 물가를 잡기 위해 초긴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80년 10월 이 장관은 신 부총리에게 기업투자 활성화를 위해 금리를 인하하는 것이 좋겠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신 부총리는 반대를 했고, 몇 번에 걸쳐 설득을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이 장관은 신 부총리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남덕우 국무총리에게 “경제부처 장관 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회의에서 금리조정 문제를 논의해서 결론을 내면 이 장관도 그 결과에 따르겠다는 결심이었다고 전했다.

마침내 총리실에서 경제장관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신 부총리, 이승윤 재무부장관, 이경식 청와대 경제수석, 서석준 상공장관 등이었다. 남 총리가 주재 하에 회의 안건은 금리하향 조정문제였다. 남 총리가 “한국경제를 순조롭게 운용하기 위해 무엇이 타당한지 심도 있게 논의하자”고 모두 발언을 한 다음 이 장관이 금리하향조정에 대한 제안 설명을 했다.

이어 신 부총리가 “안정기반을 더 다져야 한다”는 반대취지의 설명을 했다. 그런 뒤 남 총리가 다른 참석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경제수석, 상공부 장관 등 거의 모두가 점진적 금리하향조정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안정기반을 다져야 하지만 너무 안정에 치우쳐서 기업의 투자의욕 상실, 투자감퇴가 오래 지속되면 한국경제가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니까 금융정책의 방향이라도 금리를 점진적으로 인하해야 한다는 의견에 경제각료들이 손을 든 것이다. 신 부총리도 따르겠다고 했다.

재무부는 그 후 조금씩 금리를 하향 조정해 나갔다. 그러자 신 부총리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81년 3월 어느 날 김준성 한국은행 총재와 상의한 후 금융통화운영회를 소집해 금리를 내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같은 금리인하 결정을 하고 당정협의를 위해 민정당사로 가고 있는데 김 한국은행 총재한테서 전화가 왔다. “신 부총리가 금리를 내리지 말라고 하는데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합니까”라고 물어온 것이다. 이 장관은 “내리세요. 제가 부총리에게 얘기하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민정당사로 갔다고 했다.

마침 당정회의에 신 부총리가 참석하였다.

이 장관은 신 부총리에게 “내려주십시오. 기업들이 이런 고금리 하에서는 투자를 못 한다며 엎드려 있는데 인하해야 합니다” 신 부총리는 “지금의 안정기조로 가야 합니다” “좋습니다. 그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이라도 내려 줍시다” “아직은 안됩니다”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결국 고성이 오갔다고 한다.

“금리문제의 최후 결정권은 재무부장관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양보할 수 없습니다” “제 책임하에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은 극에 달한 채 헤어졌다. 이 장관은 1%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당시 서울신문 경제부장 대우로 재무부를 출입했던 필자는 부총리와 재무부장관 간의 금리인하를 둘러싼 ‘대격돌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 곡절을 겪다가 이 장관은 1982년 11월 재무부장관에서 물러난다. 그 퇴임 후 사우디아라비아 대사에 임명된다거나 부총리로 발탁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당시 이범석 외무부 장관은 “대통령께서 이 장관을 부총리로 생각하고 계신다”며 “조금만 기다리시오”라고 전언했다는 이야기다.

우회곡절 끝에 해외건설협회장

1983년 재무부장관 시절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해외건설과의 인연(?)으로 해외건설협회장이 된다. 이 회장이 협회장을 맡기 전인 1981년을 정점으로 해외건설수주액이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하여 84년에는 65억달러로 반토막이 났다. 1981년 136억달러 사상 최고수준을 기록했던 수주액이 1984년 65억달러에 그쳤던 것이다.

우리나라 해외건설수주액의 85.9%를 차지했던 중동 산유국들이 유가하락과 석유소비 감퇴로 외화수입이 급격히 감소하자 허리띠를 졸라매는 동시에 공사자금까지 시공사가 끌어오는 이른바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산유국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공사를 착수하면 미리 지급하는 선급금(선수금) 비율을 15~20%에서 5~10%로 대폭 낮췄다.

이렇게 되자 해외건설 업체들의 자금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일부 회사는 본사가 휘청거리거나 부도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해외건설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국가경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해외건설협회장은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협회 산하에 해외건설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회장은 연구소 연구원들과 함께 몇 달동안 작업 끝에 해외건설종합대책을 마련했다.

정부는 이 자료를 토대로 1986년 유가하락에 따른 해외건설종합대책을 마련, 발표했다. 이 대책의 주요 골자는 재정사정이 극도로 부실하거나 시공능력과 국제경쟁력이 크게 뒤떨어지는 업체는 해외건설업에서 퇴출시키는 것이었다. 이 조치로 1986년까지 무려 31개 업체가 해외건설면허 자진 반납, 산업합리화업체 지정 등을 통해 해외건설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이런 구조조정과 건실한 해외건설업체에 대한 정부의 현지금융 지원확대와 연불수출자금 지원, 조세감면제도 연장 등에 힘입어 2010년에는 해외건설업체의 공사수주액이 364억달러로 과거 최고수주액의 2배를 넘는 기록을 세웠다.

노태우 정권 3기 경제팀 수장 취임

이 회장은 1988년 협회장에서 물러나 잠시 쉴 사이도 없이 민정당 공천을 받아 인천 북구(현재 인천 부평구와 계양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이승윤 의원은 13대 국회 때 다시 정계에 복귀, 민정당 정책위의장에 임명된다. 그는 지금도 49조에 달하는 농어촌 부채탕감 조치가 여소야대에 밀려 국회에서 통과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고 밝혔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금융질서가 무너진 책임이 있는 야당인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 등 3야당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이 의원은 다시 1990년 3월 17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발탁된다. 이 장관이 경제각료로 컴백한 때에 세계적인 불황, 부동산 투기, 노사분규 등으로 한국경제는 난마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노태우 정권의 3기 경제팀 수장인 이 부총리에게는 재무부장관 시절과 똑같은 경제위기를 수습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 그는 수출과 투자회복을 경제운영의 주요한 목표로 정하고 금융실명제 무기연기라는 비상카드를 꺼내 든다.

▲ 필자 최택만.

반면에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매각을 골자로 한 5.8부동산대책을 발표한다. 규제와 단속이라는 측면에서 재계의 불만이 컸으나 필자는 서울신문 사설로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조치”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 부총리는 ‘재벌 옹호론자’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한국경제를 성장으로 이끄는데 큰 몫을 한 경제각료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않거나 숲만 보고 나무를 보지 않는 균형감각이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인, 경제각료라 할 수 있다.(다음호에 계속)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77호(2014년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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