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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프락치 사건’ 다시보기, 남로당에 15의원 포섭국보법, 주한미군, 한미협정 격렬반대, 1심 선고후 6.25로 출소, 월북, 납북 등
  • 경제풍월
  • 승인 2014.06.19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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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이념 보급회가 지난 15일 서울 정동 제일교회에서 제39회 이승만 포럼을 갖고 한국학 중앙연구원 양동안 명예교수의 ‘국회 프락치 사건’에 관한 발표를 듣고 참가자들과 함께 토론했다. 양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 총선을 전후한 남로당의 국회의원 포섭과 그들 프락치들의 반미투쟁 등에 관해 발표했다.

남로당 ‘반동 프락치부’의 공작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때 남로당은 선거방해 및 국회내 동조세력 포섭을 위해 입후보자들을 지원했다. 남로당은 이를 위해 건국 직후인 1948년 9월 특수 공작부로 ‘반동 프락치부’를 설치했다.

부서 책임자는 별명 ‘조동룡’ 또는 ‘조만’으로 불린 도상익씨, 조직원은 김사복(별명 이삼혁, 하사복)을 비록하여 이재남, 정해근, 김우신, 유진원, 이병석 등이었다. 이중 김사복, 이재남, 정해근 등이 국회의원 포섭공작을 담당했다. 그들은 기업인으로 위장하여 서울 충무로 2가, 종로 4가 등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암약했다.

▲ 제39회 이승만 포럼에서 주제발표하는 양동안 교수.

김사복의 경우 가명 ‘이삼혁’이란 이름으로 부산에서 어업으로 돈을 벌었다고 소개하며 1948년 12월 하순부터 노일환 의원에게 접근하여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가입시켰다.

또 그는 전북 익산 출신 이문원을 포섭할때는 ‘하사복’이란 가명으로 접근하여 이문원의 초등학교 동창이며 변호사인 남로당 비밀당원 오관의 협력을 빌었다. 오관은 1949년 1월, 이문원과 하사복을 집으로 초대하여 연결시켜 주어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포섭했다. 정해근은 이구수, 황윤호, 최태규 등을 포섭하려다가 국회의원 포섭공작이 김사복으로 일원화되는 바람에 손을 뗐다.

김사복은 국회내 동조자 포섭을 위해 매월 200~300만원의 공작금을 사용했다. 당시 요정에서 국회의원 20여명이 연회할 때 20만원 정도가 소요됐으니 그의 공작금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수 있다.

김사복은 노일환과 이문원을 포섭했지만 서로가 남로당 포섭사실을 알지 못하게 별도관리했다. 이들은 동일인물에게 함께 포섭되었지만 당국에 체포될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노일환과 이문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는 소장파 중심으로 동조자들을 포섭했다. 그들은 △김옥주(전남 광양), △이구수(경남 고성), △김병회(전남 진도), △배중혁(경북 봉화), △신성균(전북 전주), △김욱중(경남 함안), △최태규(강원 정선), △황윤호(경남 진양), △박윤원(경남 남해), △김약수(경남 동래), △서용길(충남 아산), △차경모 △김봉두 등이다.

국가보안법 제정 저지투쟁

1948년 10월 20일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후 11월 16일 국회 법사위가 ‘국가 보안법’ 초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이때 노일환, 이문원과 그의 동조자들이 적극 반대하며 법안을 심의하지 말고 폐기하자는 동의안을 발의했다. 이 동의안은 김옥주 외 47명이 서명했다.

이때 국회부의장으로 사회를 맡은 김약수가 국보법 폐기주장 의원들의 발언을 지원했다.

그들이 내세운 폐기주장은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과 같은 반민주적 법안이다 △좌익을 막으려면 민주주의적 입법으로 민족정기를 살려야 한다 △사상은 사상으로 대항해야지 권력으로 막을수 없다 △공산당을 잡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모략에 넘어간 사람이나 애국자와 통일운동가들만 다칠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보법 제정을 찬성한 의원들은 △공산당이 국가를 뒤엎으려 하니 특별법이 필요하다 △좌익이 반란을 음모하는 판국에 국가를 지키려는 법제정을 반대하는 것은 폭동 반란 지원행위다 △공산당이 법안 폐기를 선동하고 있는데 이를 폐기하는 것은 그들을 돕는 것이다 △국회 본회의가 법사위의 초안을 논의하지도 않고 폐기하는 것은 국회법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국보법 폐기 동의안을 표결에 붙인 결과 재석의원 122명 가운데 찬성 37표, 반대 69표로 부결됐다.

당초 발의에 참여했던 47명 가운데 10여명이 토론과정을 지켜본 후 지지를 철회한 것이다.

그뒤 법사위의 초안에 대한 심의가 개시되자 폐기를 주장하던 의원들은 국보법 제1조를 삭제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했지만 찬성 20표, 반대 74표로 부결됐다. 이어 제2조 심의에서도 수정 제의가 있었지만 동조의원들의 숫자가 줄어 반대파 의원들이 입법방해를 포기하고 말았다.

최종 표결에서는 재석 121명중 찬성 84표, 반대 3표의 압도적 지지로 가결되었다.

주한미군 철수촉구 강력투쟁

노일환, 이문원 등은 1948년 10월 13일, 박종남 등 46명의 서명을 받아 ‘외군 철퇴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시켰다. 반면에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결의안은 제안 설명도 하지 못하도록 의사진행을 방해하여 심의보류되고 말았다.

이문원은 1949년 1월 미군철수를 위해 유엔 한국위원회가 노력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국회 본회의에서 낭독하려다가 실패했다. 이어 2월 4일에는 미소 양군을 철수시키자는 ‘평화통일안’을 김병회 등 72명의 서명으로 본회의에 상정했지만 재석 159명 중 찬성 37표, 반대 95표로 부결됐다. 제안에 서명했던 72명 가운데 34명이 표결에서는 반대한 것이다.

미군철수 결의안에 실패한 후 그들은 유엔한국 위원회에 외군철수 촉구 서한을 보내기 위해 서명작업에 나서 62명의 동조자를 확보하여 1949년 3월 19일 덕수궁에 있는 유엔한국위원회 사무국에 이를 전달했다. 그뒤 주한미군이 군사고문단만 남겨두고 6월까지 철수할 계획이 밝혀지자 또 군사고문단 설치 반대투쟁으로 돌아섰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가 검거된 뒤 49년 6월 17일에는 유엔 한국위원회를 다시 방문하여 미 군사고문단 설치 저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제출했다. 이 서한에도 62명이 서명했지만 김약수, 노일환, 박윤원, 김병회, 김옥주, 강욱중 등 6인이 과거 서한 서명자 명단을 도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남로당 프락치들의 행위에 분노한 국회는 6월 21일, 142명의 서명으로 미 군사고문단 설치를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유엔 한국위원단과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냈다.

한미협정, 매국행위라며 반대투쟁

1948년 9월 18일,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협정 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이문원, 노일환과 동조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 동의안은 한미 양국이 상대국에서 동산이나 부동산을 매입할 때 필요한 규정이나 그들은 “국토를 미국에 팔아먹는 매국적인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문원과 노일환 등은 심지어 이 동의안이 ‘을사조약의 재판’이며 협정문 작성자는 ‘이완용의 후손’이라 비난하고 회의장에서 퇴장했다. 그러나 국회는 압도적인 다수로 이를 가결했다.

또 1948년 12월 11일, 한미원조협정 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이문원과 노일환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국회는 압도적인 지지로 가결시켰다. 그뒤 수사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남로당 공작원 김사복의 지령에 따라 외국군 철수촉구 결의안 제안과 서한을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프락치들의 검거와 1심 중죄

대공 수사시관은 국회내의 반국가 행위를 관찰하다가 1949년 3월 수사로 전환했다. 서울시경 사찰과 검찰 대공수사관 및 군 방첩대 수사관들은 국회 부의장 김약수와 소장파 의원들의 배후를 추적하여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김옥주 등 4명을 핵심으로 꼽았다. 수사관들이 그들을 미행 추적한 결과 예상과는 달리 노일환과 이문원이 핵심인물로 드러났다.

1949년 4월초 서울시경 사찰과 수사진이 남로당 공작원들과 노일환 등이 접촉한 충무로 2가 사무실을 급습하여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포섭 및 정치공작한 문서들을 확보했다. 이를 근거로 이규수, 최태규, 이문원 등을 체포했다.

이어 6월 중순에는 남로당 중앙 월북문건부 연락원 정재한(42, 여)을 개성에서 체포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남로당의 국회공작 문건들을 압수했다. 이를 바탕으로 6월 21일에는 남로당 국회 프락치 혐의로 노일환, 강욱중, 김옥주, 김병회, 박윤원, 황윤호 등을 체포하고 4일 뒤에는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체포했다.

다시 수사범위가 확대되어 8월 10일에는 원장길, 배중혁, 김영기, 김익로, 차경모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이중 배중혁과 차경모가 구속됐다. 이어 8월 14일에는 서용길, 신성균, 김봉두 의원이 구속됐다.

이문원 등이 1차로 구속된 후 국회 프락치에 동조한 의원들은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내세워 석방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에는 프락치 동조자 아닌 이재형, 김장렬, 조국현, 김인식, 이원홍, 김수선 의원 등도 동참했다. 그렇지만 구속의원 석방 결의안은 재석 184명중 찬성 88표, 반대 95표, 기권 1표로 부결됐다.

4차례에 걸친 구속 의원은 총 15명이었다. 이중 죄질이 가벼운 차경모와 김봉두는 불기소로 처리하고 나머지 1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됐다. 1심 재판은 1949년 11월 17일부터 1950년 3월 15일까지 진행되어 노일환, 이문원 징역 10년, 김약수, 박윤원 징역 8년, 김옥주, 강욱중, 김병회, 황윤호 징역 6년, 최태규, 이구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징역 3년이 선고됐다. 이들 피고인들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모두 항소했다.

6.25로 출소후 월북, 납북 등 행적

국회 프락치 사건 관련자들은 2심 재판 중에 6.25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이들중 서용길을 제외한 나머지 12명은 인민군 치하에서 그들에게 협조하다가 월북 또는 납북됐다. 서용길의 경우 경기도 고양의 농가에 숨어 지내다가 9·28 수복후 수사당국에 자진 출두했다.

월북했던 노일환, 이문원, 김약수, 강욱중, 김옥주, 배중혁, 이구수, 최태규 등 8명은 북한 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58년말에서 59년초까지 남로당계 숙청시기에 함께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에 김병회, 박윤원, 신성균, 황윤호 등 4명은 남북후 행방불명으로 추정된다.

국회 프락치 사건 관련 중요한 증언으로는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이 1949년 6월 30일 헌병사령부로 김약수 부의장을 면회했을때 김약수가 “국회 안에 악질분자가 있다는 것을 이곳에 들어와서 몸소 보고 알았다”고 말하고 부의장직 사임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이다.

또 핵심 주동자인 이문원은 법정에서 “나의 죄과를 반성한다”고 진술했다.

“내가 한 행동은 민족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이념적으로 부르짖은 것이 남로당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공작원 하사복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이런저런 행동을 했으며 김사복이 만약 배반적 행동을 하면 생명을 해치겠다고 협박하여 부끄러운 말이지만 생명이 아까워 계속 지령대로 움직인 것이 오늘의 불행을 초래한 큰 동기이다.”

박윤원의 경우 “김구(金九)가 나에게 남북평화통일과 외군철퇴 주장을 하도록 말한바 있고 나는 자주독립과 민족진영의 일치단결을 위해 외군 철퇴를 주장했다. 검거되고 보니 결과적으로 남로당의 일을 해준 것이 됐고 나는 김구 노선을 지지하고 이문원과 노일환은 이를 이용했으며 나의 외군철퇴 주장이 좌익에게 호응한 것으로 됐다”고 말했다.

이상과 같은 국회 프락치 사건을 되돌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남한내 좌익의 투쟁대상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 및 한미동맹 해체라는 점을 알수 있다. 현 국회에는 프락치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석기의 혁명조직이 진입해 있었으니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크다고 볼수 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78호(2014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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