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김숙.

삶이란 무엇인가... 살아오는 동안 끊임없이 되뇌어 본 말이고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다.

그런 만큼 이제 와 다시 화두로 삼자니 새삼스럽고 긴 말 늘어놓기도 되레 식상할 지경이다. 그러나 수십 년을 묻고 또 물어왔을망정 거듭거듭 생각해도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고 수상쩍기만 한 것을 버선 목 뒤집어보듯 훤히 들여다본 적은 없다. 다시 말해서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했던 적은 없었다.

쓴 소주잔으로 까만 밤을 밝힌 시절

설령 삶을 설파하는 어느 유명인사가 화려한 말발로 열 두 폭 병풍을 친다 해도 본인의 삶과 연관성이 없으면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고 귀부터 먼저 가려워져 괜한 귓불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뒷목을 맥없이 쓸어내리기도 한다.

결국 삶이란 대추나무에 가닥가닥이 걸린 연을 그 줄이 끊기지 않도록 끌어내리는 자기만의 고된 작업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긴 삶은... 계란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故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록 인용) 이 대목에서 슬며시 웃음이 새어나오는 까닭은 종파를 초월하여 그 분의 고고한 인격과 유머가 주는 여유로움이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오늘은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며 아주 오랜만에 지난시절을 되돌아보는 날이다.

삶에 대한 의식이나 개념이 혼자 확고한 편이었던 젊은 날에는 어느 누구와의 타협도 탐탁찮았고 마뜩찮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무당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때는 그 가치관을 확립시키고자 음으로 양으로 무진장 애를 썼던 것 같다. 사실 애썼다고 말하기에 다소 겸연쩍은 부분이 없지 않은데 그 이유는 취중철학(?)을 굳세게 믿고 쓴 소주를 들이켜가며 까만 밤을 하얗게 밝혔던 날들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의 겨울이었다. 몹시 추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어야 하듯 허연 입김을 코밑으로 쏟아내며 걸었다. 십구공탄인 삼표 연탄에 새끼줄을 끼워 검댕빛을 양 손에 묻힌 채 한 장씩 들고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그다지 낯설지 않던 시절이었다. 겨울을 나는 가장 소시민적인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반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음에도 여름은 뜨거웠다. 태양이 작열했고 청춘들의 가슴이 불꽃으로 타올랐다. 어쨌거나 여름은 한가롭게 우울해하거나 서러워해서는 안되는 치열한 계절이었다.

교정의 잔디밭은 삶과 사랑의 토론장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삥 둘러앉았던 교정의 잔디 밭에서는 짬뽕 한 그릇과 소주(두꺼비)만으로도 더 할 수 없이 풍족했다. 캠퍼스는 주관과 객관, 의식과 존재, 혹은 이성과 감성, 실존과 허무까지를 넘나드는 아고라의 장이었다. 그야말로 온갖 이론이 득세하는 공간인 셈이었다. 십 인 십 색일 수밖에 없는, 복잡미묘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독특한 사랑방정식을 허심탄회하게 펼쳐보이는 곳도 바로 거기서였다.

참, 남녀를 막론하고 토론이 끝날 때까지는 안줏감에 함부로 숟가락을 담근다거나 젓가락질의 횟수가 잦아져서는 안된다는 금기사항이 있었다. 물론 묵계였다.

한가닥 한가닥 면발을 세어가며 먹어야 하는 판에 귀한 안주를 자발없이 혼자만 건져간다거나 먹든 안 먹든 냄비 안으로 들어가는 젓가락의 횟수가 잦아지는 자체만으로도 친구들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심지어 누구누구는 술자리에서 안주만 축내더라는 구상유취한 소문이 주홍글씨로 떠돌아다녀 술판에서 왕따를 당하는 수모를 감수해야 하기도 했다.

굳이 애국까지는 아니더라도 매국하고는 사돈에 팔촌을 넘어 만리장성을 쌓고 살았다 해도 허사였다. 대역을 저지른 역적으로 낙인찍혀 제 멋대로 개과천선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좌석에 빈 소줏병이 늘어가는 만큼 삶의 이름도 가지각색으로 각색되고 채색되었다.

때로는 시멘트바닥에 내동댕이쳐져 구둣발로 밟히던 삶이 금세 하늘로 올라가 자유자재로 허공을 날아다녔다. 또 때로는 깊은 바닷속을 허우적거리며 알록달록한 무늬의 비늘마저 반짝거리는 팔뚝만한 열대어를 밤새도록 잡아올리곤 했다. 얘기가 허무맹랑해질수록 흥미진진했고 오히려 팩트라고 느꼈다.

하늘 끝에 닿을 만한 빌딩을 쌓다가 부수고 다시 쌓아 올렸다. 영의정에 올라 산천초목이 울리도록 불호령을 하다가도 미련없이 도포를 벗어던졌다.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나 손가락 뼈마디가 저리도록 악수를 나누고 그의 등을 툭툭 쳐 새벽 속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윽고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아온다. 모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공중누각이 된다. 애초에 부서질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차라리 경이롭다.

이제와 생각하니 경이로운 불꽃이었다

물거품이 되고 말 얘기를 먼저 꺼낸 원흉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고 어처구니 없었던 간밤의 행동들을 추궁한다거나 주먹다짐을 벌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침이면 늘 같은 쪽에서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내미는 햇살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루를 시작했고 밤에는 또 그렇게 햄릿이 되었다 데카르트가 되었다 동키호테가 되곤 했다.

지금에사 다른 각도에서 곱씹어 보니 비로소 고마움에 고개 끄덕여진다. 술을 떠나서는 결코 아무 것도 논할 수 없었던 객기와 호기와 무작정의 광기마저 호연지기를 키워준 모태였다고 감히 회상할 수 있다. 한마디로 참 좋은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50대 중반이 지났다. 불꽃처럼 사는 동안 축적해 두었던 지난날의 자양분을 꺼내보며 이제는 그냥 따스한 햇살로 살고 있다. 단순하고 느림을 더한 삶으로 말이다.

나이라는 것도 그렇다. 한 해 한 해 늘어나는 나이테를 미덕이나 관용으로 천천히 메꾸어가다가도 한 순간 문득 ‘착불 택배’로 받는 상품이었다면 어땠을까,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거부하지 앉았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연일 30C를 넘는 불볕을 참아내자니 가뜩이나 짜증스러운 터수에 이 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가... 그러나 개가 풀을 뜯어먹든 올챙이가 자라 개구리가 되든 어이없게도 어느 한 쪽은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한 발짝을 내딛는 것일 게다.

다시 삶이란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 순응하면 마차에 태워 모시고 가고 거역하면 질질 끌고 가는 것, 아래로 아래로 그저 묵묵히 흘러 더 큰 곳에서 언젠가는 하나로 만나는 것.

그리하여 삶이란 더불어 살며 사랑하는 것.

내친 김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록을 한 번 더 인용해야겠다.

“서로 사랑하세요...”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79호(2014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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