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종군기자 생생한 체험담 전율

6·25 기습 남침전쟁을 그냥 잊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 일부 정신 나간 친북좌파가 6·25를 해방전쟁이라 우기지만 아직도 참전세대와 증언세대가 살아남아 그때를 똑똑히 증언할 수 있다.
이들이 생존할 때 김일성의 불법 남침과 공산군들의 온갖 만행을 기록하고 들려줘야만 함부로 6·25의 진상을 왜곡하지 못할 것이다. 언제인가 통일이 되면 그들의 반민족 죄악상을 정확히 가려 부끄럽고 통탄할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김일성의 기습 남침 ①]

적치 3개월의 만행
6· 25 종군기자 생생한 체험담 전율
반민족 죄악상 정리 안보의식 높여야

기습 남침에 뒤죽박죽, 엉망진창

6·25 종군기자 여덟 분이 1987년 6월, ‘한국전쟁 종군기자’를 출판하여 전쟁의 참혹상을 자세히 기록했다.
동아일보 종군기자 김진섭(金鎭燮) 씨를 비롯하여 연합신문 김희종(金喜鍾), 시사통신 박영식(朴永植), 조선일보 방낙영(方樂榮), 민중일보 윤종현(尹宗鉉), 서울신문 이유형(李裕瀅), 동아일보 임학수(林學洙), 국제신문 최기덕(崔起德) 씨 등 8명이 집필했다.
종군기자들은 직접 전선을 누비면서 보고 듣고 증언을 청취했으니 ‘살아있는 6·25 전쟁사’로 어떤 기록보다도 실감이 나고 정확하다는 소감이다.
6·25 세대는 누구나 인식하다시피 북의 준비된 남침에 남한은 정신 빠진 정국혼란에 국군은 무장공비 토벌작전에 골몰하던 시기를 ‘기습의 기회’

로 이용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졸라 무기지원 받아 남조선을 금방 점령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실제로 대한민국 국방은 엉망진창이었고 정부도 뒤죽박죽이었기에 김일성의 기도는 성공한 듯 했다.
순식간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의정부와 창동 방어선 무너지고 단장의 미아리 고개도 쉽게 붕괴됐으니 끝장이었다.
남침 이튿날, 6월 26일 새벽에 벌써 적의 야크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중앙청에 기총소사를 갈기고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총독이 만든 경무대 방공호로 피신해야 할 지경이었다.
6월 27일 새벽 3시, 끝내 이 대통령은 기차 편으로 피난가고 한강 인도교는 폭파됐다. 이 대통령이 경북 김천을 지날 무렵 연도의 농민들은 한가로이 농사일에 종사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보고 이 대통령은 대구에 내리자마자 다시 북상하겠다고 고집하여 대전까지 올라갔으니 나라가 온통 앞뒤를 분간도 못한 지경이었다.
이로부터 남한 전역이 김일성 수중에 들어가고 낙동강 혈전에서 대한민국 운명이 풍전등화 격이었음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고 소름이 끼친다. 김일성이 8·15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했으니 낙동강 전선이 피로 물들인 것은 당연했다.
천만다행으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총반격으로 서울 수복과 38선 돌파로 역전시켰으니 대한민국 국운은 살아있었던 셈이다.

월북 빨갱이가 신문사 접수

서울신문 종군기자 이유형 부장의 ‘나의 적치 3개월’ 이 그때를 생생히 증언해 준다.
북의 기습 남침이 있은 날 이 부장은 야근명령을 받았다. 편집국에서는 곧 미 공군이 출격한다는 소문에 희망을 걸었지만 허탕이었다. 그날 밤 자정 무렵,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서 절망 속에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이 부장은 다음날 새벽 가족과 함께 한강변으로 나갔지만 철교가 끊어져 도강이 불가능하여 서울역 앞 양동 집으로 귀가했다. 다음날 새벽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신문사 수위가 장총을 맨 인민군과 함께 잡으러 온 것이다.
인민군이 “동무, 해방이 됐으니 같이 합시다”라고 이끌어 회사로 갔더니 벌써 인민군 천지였다. 도중에 축구협회 사무국장 최규장(崔圭章) 씨를 만났더니 월북했던 축구선수 신형수가 김용식 씨, 민재호 씨와 함께 이 부장 등 3명을 긴급 수배 했다더라는 소식을 귀띔해 주었다. 신형수는 1947년 런던대회에 출전했던 선수로 그 뒤 자진 월북한 공산당원이었다. 신문사 입구에 들어서니 신형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앞장서고 있는 것을 보니 반동으로 몰릴 것이 뻔했다.
이 부장은 김영상(金永上) 정치부장 등과 함께 조사부 귀퉁이에서 인민군 감시 하에 자술서를 쓰려고 했지만 막막했다.

낮엔 지붕, 밤엔 지하실 도피

이 부장은 “일제시에는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축구를 했고 대한민국 수립 후에는 태극기를 달고 뛰었는데 그대로 써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옆에 있는 김 부장은 “일본 입교대 나온 뒤 학교 선생 했는데 그대로 써도 됩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인민군은 예상했던 대로 “이 반동기자 새끼들, 무슨 소리냐”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때 밖에서 아우성 소리와 비명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자술서를 쓰다말고 밖을 내다보니 인민군이 “너희도 곧 같은 꼴이 된다”고 협박했다.
눈 뜨고 못 볼 처참한 광경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과 몽둥이로 사람을 피범벅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그 야만적 행태를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반동 소설가로 낙인찍힌 김팔봉(金八峰) 씨에 대한 인민재판이었다.
말로만 듣던 인민재판을 보고 눈앞이 캄캄할 때 인민군이 “잠시 기다리라”고 틈을 내줄 때 두 사람은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살아남으면 또 만나자”는 인사만 나누고 헤어진 것이 악몽의 3개월간 인민군 치하의 도피생활 시작이었다.
이 부장은 낮에는 지붕 위에 숨고 밤에는 지하실에서 숨어 지냈다. 도피생활이 차차 지루해져 어느 날 뚝섬에 있는 동창생을 찾아갔다. 병원을 운영하는 그는 다방면에 정보가 밝았다.
친구는 “동리 좌익들이 합세하여 가가호호 수색을 벌여 젊은이는 의용군으로 잡아가고 젊은 여성은 한강 인도교 가설 공사장으로 강제 동원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먹을 것 얻으러 갔다가 들키면 끝장이다 싶어 야음을 틈타 귀가하여 다시 도피생활로 들어갔다. 옆집에 사는 국도신문 기자한테서 약간의 식량을 얻어 몇일 허기를 채웠다.

성급하게 태극기 올리다 피살

어느 날 국제축구심판 김덕준(金德俊) 씨가 몰래 찾아와 가짜 증명서를 내보이며 밖으로 나가자고 권해 따라 나섰다.

김씨는 가는 곳마다 증명서를 내보이며 당당하게 통과했다. 김씨는 신바람이 난듯 “이 선배 보시오, 가짜 증명서로 행세해도 전혀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에요. 국제사회가 그냥두지 않을 테니 끝까지 숨어 싸웁시다”라고 격려했다.
당시 길거리에는 먹을 것을 구하러 나온 노인들, 좌익에게 끌려가는 우익 양반들, 삽과 푸대를 들고 작업 나가는 여인들로 붐볐으니 거의 죽음의 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지루한 3개월이 지날 무렵 미군 진주 소식이 흘러왔다. 선발대가 장충단 앞으로 왔다가 용산으로 이동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그러나 이무렵 양동 주민 10여명을 반동이라는 구실로 철사에 묶어 동회 지하실에서 기름을 뿌려 태워 죽이는 만행이 있었다. 이 부장에게 양식을 나눠준 옆집의 국도신문 기자는 미군이 왔다는 소식에 성급하게 지붕 위에 태극기를 올리려다가 총격으로 사망했다.
인민군의 최후의 발악은 너무나 무시무시했다. 삶과 죽음이 순간에 걸려있는 위기를 넘긴 것이 꿈만 같다는 소감이다.

살아남은 서울시민 고작 8만명

동아일보 김진섭 기자의 고랑포 앞 임진강 전투 취재는 실로 죽음을 각오한 종군이었다. 적과 조우하면 결사항전 한다는 각오로 카빈 소총으로 무장하고 따라 나섰다.
동행했던 자유신문 이혜복 기자는 일식 99식 소총, 서울신문 김우용 기자는 MI 소총으로 무장했으니 모두가 전투원인 셈이었다.
이때 임진강 전투는 가장 위험한 적전 도하 작전이었다. 미국과 일본 종군기자들은 미 1기갑사단으로 종군하고 한국기자들은 국군 1시단에 편승, 종군했다. 이 작전으로 임진강은 적의 시체가 가득 쌓여 도하에 성공했지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김 기자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도 종군했다. 1951년 12월까지 지리산 공비는 사살 1천900명, 포로 2천600명, 귀순 89명의 전과가 있었지만 아직도 잔존 무장 공비 4천여명, 비무장 공비 1만2천여명으로 추산되었다.
이때 포로를 심문한 결과 국군이 토벌작전을 계획하면 이틀 전에 미리 알아내어 함정을 만들거나 역습으로 맞설 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란 말이 있었지만 적과 내통한 무리들이 우글거리는 판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고 압록강변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의 참전과 인해전술 때문에 1·4 후퇴로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니까 서울은 1차로 김일성 군대에게 유린되고 2차로 중공군에 짓밟혔으니 그 참상을 말할 필요가 없는 노릇이다.
종군기자들은 서울을 재탈환 했을 때 비행기 편에서 내려다보니 온통 공산군의 참호, 진지, 총좌 등이 벌집처럼 쑥밭이 되어 있었다. 이때 서울에 살아 남아있던 인구가 경찰 추산으로 8만명에 불과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민이 죽고 재산이 잿더미로 변했는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대형 형무소 우물 속 겹겹 생매장

반동분자 색출과 투옥, 학살은 전국적으로 감행됐다. 특히 국군의 총반격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의 양민학살은 악마의 살인극이었다.
대전 형무소의 학살사건이 ‘한국전쟁 종군기자’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당시 충남도경 유붕렬(劉鵬烈) 사찰과장이 1950년 10월 2일 형사 50명과 함께 제1착으로 대전 경찰서에 도착했다. 패주하던 인민군이 미군 시체 50여구를 마치 살아있는 모습으로 총을 들고 담장과 출입구에 세워 놓았다.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해 보려는 잔꾀를 부렸던 것이다.
얼마 안되어 납치 가족들이 몰려와 형무소로 가자고 졸라 급히 달려갔더니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었다.
우물 속에는 양민들을 겹겹으로 단무지 담은 듯 생매장해 놨다. 시체를 끌어 올리다가 ‘사람 살리라’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내고 보니 13세 어린이로 서산군 운산지서에서 일하던 사동이었다. 300여 시체 속에서 유일하게 생환한 이 어린이는 대전 형무소에서 학살된 청주지검 검사 부인이 울면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 애가 잘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출세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전 형무소 간수 이준영(李俊榮) 씨 증언록에 따르면 10월 3일 형무소를 인수한 후 송장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부들과 함께 소주를 마셔 취한 뒤 약쑥으로 코를 막고 우물 속 시체를 끌어 올려야만 했다.
깊이 4.5m 우물과 온상자리 구덩이 등에 무려 400여구가 쌓여 있었다. 이들 시신들을 수습 하는데만 10여일이 걸렸다.
형무소 정문 앞에 ‘6·25 반공애국 희생자 현창비’를 건립하고 영혼을 달래었다.
“붉은 오랑캐의 최후 발악으로 이 고장이 짓밟혔을 때 그들의 손에 무참히 희생되어 반공구국 제단에 바친 471구의 열렬 반공정신과 그 이름을 깊이 전하고자 비석을 세워 천추에 거울 삼고자 하노라” 이 비문이 대전 학살의 일부를 잘 증언해주고 있다.

석달간 학살 16만, 납북 12만명

정일권 장군이 남긴 6·25 비록에 따르면 기습 남침 3개월간 학살 16만5천명, 납북 12만2천여명에 달한다. 서울에서만 9천500명이 학살되고 대전, 충남에서 군경과 우익인사 1천724명이 학살됐다.
공산당은 천주교를 적1호로 규정하여 성당과 수녀원을 짓밟아

외국인 신부와 수녀들을 납치했다. 희생된 성직자만 150명에 이른다.
기독교는 목사들을 회유하려 노력했지만 전남북 일대의 목사들은 전주 형무소에 수감했다가 퇴각시 총살시켰다. 불교 지도자들도 대량 납북됐다. 퇴각시에는 서울 봉원사, 양주 봉선사, 전남 송광사 등에서 스님들을 학살했다.
또 2대 국회의원 210명 가운데 62명이 피난을 못가 적치에서 고생했으며 이중 27명이 피살되거나 납북됐다. 안재홍 의원의 부인에 따르면 9월 22일, 인천상륙작전 1주일쯤 지나 국립도서관의 북한 정치 보위성 남한본부에 구금됐던 안 의원 일행이 트럭에 실려 끌려갔다. 당시 동성중학교 4학년인 최모군은 정일권 장군을 찾아가 부모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자원입대를 받아 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다.
듣고 보니 종로구 관철동에서 구둣방을 운영하던 최군의 부친이 6·25 두달 전 어느 직공을 해고한 적이 있었다. 그 직공이 최군의 부친을 종로 종각부근의 인민재판장으로 끌어가 무더기 곤봉세례로 타살했던 것이다.

6·25를 그냥 용서하자고…

수도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은 철저한 파괴와 인명 유린 속에 서러움과 눈물로 복구하여 오늘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반면에 남조선 해방을 구실로 기습 남침하여 패전했던 김일성은 중공군을 불러들여 동족의 가슴을 짓밟아 놓고 지금은 남한이 보내주는 쌀과 비료 등으로 연명하는 꼴이다.
김일성은 천하의 독재로 북녘 동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을 우상화하다가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했으니 21세기 광명 천지에 이런 꼴불견이 또 있을까.
강정구와 같은 친북 집단은 이토록 극악무도한 6·25를 조국해방전쟁이라고 강변하고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통일을 이룩했을 것이라는 정신 빠진 소리를 하고 있으니 과연 대한민국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만약 김일성이 중공군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과 국군에 의해 조국이 통일될 수 있었다는 말은 왜 하지 않는가.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6·25를 용서하자고 주장했지만 국민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김일성, 김정일이 불법 남침을 시인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 마당에 그들을 일방적으로 용서하자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6·25 남침을 통일전쟁으로 긍정하고 유엔군과 미군에 의한 침략격퇴가 잘못됐다고 시인하자는 뜻은 아닌가. 북에는 엄연히 남침세력이 아직도 살아있고 권력세습의 김정일이 선군정치라면서 갖가지 위협을 가하고 있을 때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자가 적전 항복을 염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렵기 짝이 없다.
게다가 왜 하필이면 지금처럼 북이 핵과 미사일 공갈을 일삼을 때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서둘고 있는지 배경이 두렵고 궁금한 것이다.

(다음호는 김팔봉의 인민재판)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87호(2006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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