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구박은 세월의 죄악’

노인문제에 관심을 갖는 헌신적인 변호사를 만나기 쉽지 않다. 변호사의 시간은 곧 돈이기 때문에 친노(親老#) 변호사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효심의 친노 변호사를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고급장교 출신으로 나라문제와 노인공경에 헌신하는 최병영(崔秉永) 변호사가 오래전부터 노인문제를 연구해 왔다. 최 변호사가 노인문제의 모든 것, 이를테면 사소한 권리분쟁이나 집안의 상속 및 유언문제 등을 성심껏 봉사하겠다고 약속하니 말만 들어도 흐뭇하기 짝이 없다.

효심의 친노(親老) 변호사
‘노인 구박은 세월의 죄악’
崔秉永(최병영) 변호사, 노인문제에 열성 헌신
준비 없는 고령화 사회 국가 사회 책임


노인문제는 국가와 사회문제

최 변호사는 오래전부터 노인문제연구소를 설립, 동료 변호사와 교수들과 함께 노인문제를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우리사회에 적용하려 노력해 왔다.
그는 30대의 팔팔하던 시절, 무력한 노인네의 삶을 지켜보며 자신의 자화상을 미리 보고 있다고 느꼈다. 늘 효도 못다 했다고 생각한 부모님을 모시는 정성으로 한국노인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국내외 서적을 탐독하고 외국서적을 번역, 보급하며 실버산업 개념이 통용되지 않을 때 노인산업의 성장 방안을 부지런히 연구했다.
최 변호사의 걱정이 적중하여 오늘의 한국 노인들은 준비 없이 고령화 시대를 맞고 말았다. 자녀 양육하고 교육 시키다가 정년 맞아 은퇴하고 보니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 부양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옛날 같으면 자식이 부모를 끝까지 공양하니 노후문제가 지금처럼 절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세월이 급변하고 인심이 몽땅 뒤바뀌었다. 노인들은 아들과 며느리로부터 제일 구박받고 배우자와 딸에게도 구박 받는다.
최 변호사는 이 같은 노인문제가 특정 가정이나 개인문제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본업인 변호사 전문 영역을 벗어나 노인문제에 깊이 파고들어 노인편람을 제작하고 상속과 유언문제를 연구하고 서비스하기에 이른 것이다. 최 변호사는 지난 90년 초부터 KBS 1TV를 통해 2년여 동안 아침방송으로 노인문제 연구결과를 차근차근 소개하여 많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유산 10억 남기면 혈육분쟁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노인들은 눈칫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아둔 재산이 넉넉하면 모를까 70년대에 중노동하며 집 장만하고 자식 키우다가 은퇴한 노인네는 집안에 박혀있거나 외출하거나 처세가 난감하다.
지하철이 무임으로 경노 우대 하지만 하루 32만명이 넘는 무임승차로 연간 1천수백억 원의 운영손실을 가져와 적자라고 하니 공짜가 민망하기 짝이 없다. 또 집안에만 박혀 있으면 하루 세끼식이나 밥을 차려 줄 수 없다는 신풍속이 이미 확산되고 말았다. 종로에 가면 무료급식이 있다지만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이건 일거리 찾아 노동해야 하고 건강해야 일 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어느 것도 쉽지 않다. 실버산업이 번창하고 있는 것으로 소문은 나고 있지만 찾아가 봐야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자산이 넉넉한 노인이라고 몸과 마음이 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랫동안 노인문제와 부딪혀 가며 고뇌를 함께 나눈 최 변호사는 유산이 10억 원만 넘어도 생시에 상속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사후의 혈육싸움을 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자녀간 유산분쟁이 생기면 재미 보는 것은 변호사 뿐이다. 1심에 불복하여 2심과 3심까지 입에 거품을 물고 재판하게 되니 변호사들은 재미가 있겠지만 상속재산은 거의가 날아가고 만다.
친노(親老#) 변호사와 사전에 만나 증여, 상속문제를 잘 매듭지어나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최 변호사는 유산을 둘러싼 혈육간 싸움은 고인의 뜻을 더럽히고 집안 망신시키며 변호사들에게만 좋은 일 시키게 된다면서 이런 것이 말이 되겠느냐고 지적한다.

못 다한 효도를 노인문제에…

최근 100억 원이 넘는 거액의 은행예금을 연대에 기부한 유언장에 본인 날인이 없다는 이유로 유자녀에게 돌아간 판례가 나왔다. 부모 유산을 되돌려 받은 자녀들은 승자의 기분을 누렸을지 모르지만 지하의 고인은 마음이 불편하리라고 짐작된다.
어느 전직 국회의장께서는 자녀들을 출가 시킨 후 단하나 남은 아파트를 사후에 아내에게 상속시킨다는 사전 유언장의 공증(公證)을 받아 놨다. 유언 없이 세상을 떠나면 미망인과 자녀들이 똑같이 나누는 균분(#均分)제 때문에 아내에게 돌아갈 몫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 변호사는 재산이 많거나 적거나 생시에 상속에 관한 본인의 뜻을 법적인 절차에 따라 공증해 둘 것을 권유한다. 이때 변호사들은 일반 수임사건과는 달리 경노우대 정신으로 상담하고 처리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굳게 믿는다.
최 변호사의 친노 성향은 태생적 인연이 있다. 딸 부잣집의 귀한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군 복무시절이나 변호사 개업 이후에도 지극한 효심을 실천해 왔다. 멀리 전남 부안의 부모님을 자주 찾아뵈면서도 자식 양육에 골몰하던 ‘하늘같은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그의 어린 시절 부모님은 회초리 치고 꾸지람 하는 엄부자모(嚴父慈母)였지만 넉넉해 진 수입으로 편안히 모실 수 있는 오늘날까지 생존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못 다한 효심을 오늘의 노인문제연구와 봉사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노인들은 최 변호사와 같은 친노 변호사를 만난 것부터 마음 든든하다는 위안을 받게 된다.

법조인의 사회적 평판 부끄러워

최근 법조인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최악이다. 변호사는 물론이요, 돈 받는 판·검사 이야기가 신문에 자주 보도된다.
사건 브로커에 놀아난 변호사들이 무더기로 징계되기도 하고 신고소득을 낮춰 세금을 탈루했다는 혐의도 받는다. 변호사 사회엔 아직도 성공불(成功拂)이라는 제도가 남아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사건을 맡아 재판에서 이기면 물건의 절반을 갖게 되는 방식이 성공불이라니 우리네가 보기에는 도둑질한 장물을 나누는 방식이나 다름없다.
최 변호사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이 같은 변호사 사회를 냉정하게 비판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사건 브로커를 고용하여 한건 더 맡았다고 재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건 맡지 못했다고 굶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돈을 추앙하다 자신도 모르게 본분을 잃어 전체 변호사들의 명예를 추락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변호사가 판·검사 찾아가 굽실거리고 생일 챙겨 봉투 건네는 행태도 꼴불견으로 지탄된다. 변호사가 판·검사 앞에 굽실거리는 이유야 분명하며 이 때문에 말썽이 잦고 법조인들이 몽땅 추악한 얼굴로 묘사되고 마니 결국 자해행위로 귀결된다.
최 변호사는 외부세계의 이 같은 비판에 대해 변명할 것 없이 고개 숙이고 반성해야 한다고 수긍한다.

백령도 요새에 근무한 해병장교

최 변호사의 사회 진출 바탕은 용맹군인이었다. 70년대 학생운동에 빠졌다가 “공부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고시에 합격한 후 법무장교 중위로 임관한 것이 출발이었다.
처음 해군 법무장교로 시작하여 육군, 공군을 거쳐 해병대로 옮겼으니 육해공 3군을 모두 체험했다. 그중에서도 해병대 고위 장교(중령)로 전역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다. 일반인들도 인식하다시피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정신에 투철한 것이 물론이다.

▲ 전 부안군수 김종규 씨

해병대 고급장교로 백령도, 제주도 등지를 두루 근무하고 말년에는 김포에서 전역하여 서울변호사로 사회에 진출했다.
최 변호사는 백령도 요새를 지키는 해병장병들을 한없이 신뢰한다. 북의 장산곶이 눈앞에 보이고 세계에 한두 곳에 불과한 해안 모래밭 비행장이 있는 백령도는 적의 도발과 침투를 견제할 수 있는 최상의 전초기지이다.
이곳 요새의 해병여단은 6개월 이상 단독으로 적을 저지할 수 있는 임전무퇴의 ‘대한민국 불침번’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최근 정부에서 해병대 4천명 감축계획을 들고 나와 해병대의 분노를 사고 있다. 4천명 감군이 곧 백령도의 포기가 아니냐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백령도의 해병대 철수는 북의 간절한 소망일지언정 대한민국 안전과 국토수호를 위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곳 근무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하는 최 변호사는 이에 대해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규정한다.
맥아더 동상철거 주장, 평택미군기지 이전반대, 전시작전권단독행사 등 긴급 현안이 쌓여있는 시점에 북은 핵개발 하고 미사일 발사하며 남한 내부에는 친북 좌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세월에 해병대 감군이 웬 말이냐는 항변이다.

북 서선전기 서울지사 땅 환수

군 복무를 끝내고 변호사를 개업한 후 최 변호사는 한국자산관리공사(전 성업공사) 소관 국가자산 환수분야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주로 부동산 소송사건이 대부분으로 환수재산을 국가소유로 환원시키는 절차가 많았다.
또 수복지 청산관련 소송도 많이 맡아 처리했다. 성업공사 관련 소송은 공익환수가 대부분인 반면 수복지 토지관련 소송은 선의의 관리자 편에서 점유권을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 변호했다.
공익변론 가운데 잊을 수 없는 특이한 사례는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까지 진행된 북의 서선합동전기(주)의 서울 중랑구 지사 소유 토지 환수 소송이다.
한전이 구 전업3사를 통합하기 이전 북한이 유상으로 대남 전기송전을 하고 있을 때 생긴 사건이다. 북은 대한민국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5·14 단전(#斷電)조치를 취해 남한 전역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이때 서선합동전기 중랑구 지사 토지는 국고로 환수되지 않고 토지 브로커들이 점유한 것을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재판을 거쳐 국가로 환수해야만 했다.
최 변호사가 평양시 선교동 14번지, 서선전기합동의 대리인으로 선임되어 브로커들을 상대로 재판에 참여 이를 환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최 변호사가 10년 넘게 자산관리공사 청산위원으로 국가재산 환수에 열심히 참여한 것은 공익 변호사로서 역할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서예, 사진 등 다능다재의 삶

최 변호사는 평생 새벽 5시부터 활동하며 다능다재한 재능을 보여 왔다. 새벽 운동에서부터 7시30분 사무실 도착이 시계처럼 정확하다.
장기간 군 복무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모든 일을 스스로 책임지는 습관이 몸에 익은 것도 군인정신이라고 보여 진다.
변호사와 변리사 자격 외에 서예가와 사진작가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새 박사로 통하는 윤무부 교수와 함께 10년 이상 탐조(探鳥)운동 다니고 환경운동에도 부지런히 참여했다.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로서 건강한 체력이 다방면의 활동에 스태미너를 뒷받침한다. 여기에다 카톨릭 신자로서 틈틈이 신앙생활에도 소홀하지 않으면서 노인문제에 까지 깊이 심취하고 있으니 문무와 강온을 겸비한 삶이다.
외국어 공부에도 열정이다. 독일어는 이미 능통한 경지이고 영어, 일어, 중국어 등도 매일 쉬지 않고 학습한다. 노인문제를 연구하느라 각국 전문서적들을 탐독하고 번역, 출판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급장교 출신의 실버산업 선각자로서 최 변호사가 걸어온 이 같은 비범한 길에 배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종규 군수를 격려한 부안사람

최 변호사는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사건으로 유명한 전북 부안사람이다. 인기 경제 각료 진념 전 경제부총리와 김진배 전 국회의원 등이 이곳 출신 전국적 명사이다.
말썽 많은 새만금 댐도 이 지역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 최 변호사가 환경문제에 빠져든 계기가 바로 새만금 댐이었다. 고향 선산을 자주 찾으면서 지역발전을 위해 개발과 환경의 조화를 통해 새만금 분쟁은 조기에 종식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확립했다.
지금은 오랜 진통과 소모적 논쟁 끝에 새만금 댐 물막이 공사가 끝나 후속 지역개발 프로젝트가 관심이다. 그러나 언제 또 말썽이 생기고 환경 NGO들이 시비를 걸어올런지 알 수 없다.
최 변호사는 전 부안군수 김종규 씨가 반대론자들의 거센 항의를 무릅 쓰고 방폐방 유치를 결단한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 김 전 군수가 애매하게 두들겨 맞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치욕을 당하자 분노했다.
‘부안발전위원회’를 만들어 김 전 군수에게 ‘힘내시라’고 격려하면서 방폐장을 유치하여 사후에 공해문제가 제기되면 “오히려 우리가 앞장서 반대 하겠다” 면서 지역주민들을 설득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뒤에 주민투표를 거쳐 방폐장을 유치한 경주사람들은 지역발전기금과 한수원 본사 이전 등으로 지역개발 꿈에 부풀어 있다.
최 변호사는 그때 진념 부총리와 같은 유력 선배들께서 이런저런 이유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대신 나섰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엉망진창에도 국운은 살아있다

김종규 전 군수는 금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멀리서 지켜보기에는 지역민심이 야속해 보이기도 한다.
김 군수는 최근 서울에서 최 변호사를 만나 그때 “힘내시라”는 격려에 용기를 얻었었다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 멀리 포항에서 중견기업을 경영하는 노원조(魯元祚) 회장이 전주까지 찾아가 병 위문하고 격려성 봉투를 주고 간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 감사하다는 뜻을 전해왔다.
최 변호사는 지금도 방폐방 유치 실패를 매우 아쉽게 생각하며 김종규 씨와 같이 용기 있고 사명감 높은 공직자가 주민들의 평가를 못 받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전문직 종사자로서 나랏일이나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여기지만 온갖 국가적 현안이나 민심의 분열 및 불신 등을 보면 나라가 ‘엉망진창’이라 개탄한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고 꾸벅꾸벅 앞으로 전진 하는 것을 보면 국운이 살아있고 국익과 공익을 위해 희생적으로 뛰는 분들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풀이한다.
친노(親老#) 변호사의 확고한 신념과 행동을 듣고 보면서 오늘의 노인세대가 신뢰와 안도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87호(2006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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