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D창설, 원자력기술 자립까지

▲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의지로 1970년에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했다.

1. 국방과학연구소(ADD)창설 멤버가 되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언제 닥칠지 모를 미군 철수에 대비해 1970년에 ADD를 창설하셨고, 나는 순수 과학자의 꿈을 접고 ADD연구요원으로 참여하였다. 나는 원래 이론물리학자의 길을 걸어 왔으나, ADD에서 나의 첫 임무는 미군 철수를 가능한 늦추는 War Game요원으로 당시 김재명 장군이 이끄는 전산 요원으로 북한과 남한이 가상 전쟁을 하는 팀의 일원으로 용산 미8군 기지에 파견되었다. 이곳에서의 파견생활을 통해 한국의 안보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험한 처지임을 깨닫게 되었다.
한미 공조 관계는 닉슨, 포드, 카터로 이어져 오다 카터 대통령시절에는 최악의 상태를 맞아 미군 일개사단이 철수를 단행하고, 한반도에 있는 전술핵무기 철수 계획에 이르게 된다. 일련의 사태로 197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사정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급기야 박 대통령의 암살로 이어졌다.
박 대통령 서거 이 후 ADD는 전략 미사일 개발 중단과 예산 삭감, 인원 삭감의 태풍이 몰아쳐 대전기계창 직원들의 전원 사표제출로 이어졌다. 더 이상 나는 ADD에 머물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국가 생존전략시절 회고①]

지도자의 자주국방 의지
ADD창설, 원자력기술 자립까지

▲ ▲필자 한필순 박사

글/ 한필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2. 대덕 공학센터(DEC, 구 핵연료개발공단) 부임

1982년 초 나는 12년 간 정든 ADD를 떠나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구 핵연료개발공단의 후신인 DEC(대덕공학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DEC에 와 보니 사정은 ADD보다 더 나쁜 처지였다.
DEC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佛차관과 기술제공으로 재처리를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나 미국의 압력에 굴복, 재처리 대신 대체사업으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목적으로 했으나 이것 또한 미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1980년에 이미 원자력연구소(KAERI)산하 대덕공학센터(DEC)로 격하된 이후였다.

▲ 국방과학연구소 ‘국방의 초석’

당시 이정오 과기처 장관은 강박광 원자력국장에게 KAERI 자체를 해체 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강 국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 연구소인 KAERI 폐쇄 명령에 사직을 각오하고 KAERI 폐쇄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화가 난 장관은 “원자력위원들은 뭐하고 앉아 있어? 그 사람들 당장 내쫓아!”라고 호통을 쳤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원자력 신문 [특별인터뷰] 강박광 전 과학기술처 원자력국 국장’에 연재되어 있다.
결국 대통령의 KAERI, DEC의 폐쇄 결정은 명칭을 변경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그리고 KAERI를 이끌 Pinch hitter(대타)로 ADD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내가 선택된 것이다.

3. DEC을 부활시켜라!

내가 부임할 당시에는 DEC는 가사 상태에 놓여 있었다. 예산·인원이 모두 동결되어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모든 직원은 물에 빠진 쥐 신세가 되었다. 내가 취임 인사 차 정부와 한전을 방문하자 모두들 하나 같이 입을 모아 KAERI와 DEC는 없어져야 할 곳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어떻게 하면 DEC를 살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 때 ADD창설 멤버로 12년간의 경험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했다. 초기 ADD는 無에서 출발 각종 무기 체계를 국산화 하는데 주력했다. 이 경험을 살려 DEC부활의 지혜를 찾으려 했다.
불 꺼진 연구실, 오후 6시면 전원 퇴근해 버리는 연구원들, 연구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풀 죽은 연구원들, 연구소 주변이 잡초가 무성하고 쓰레기장 같은 주변 환경,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연구원들은 부정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100가지 부정적인 환경에 놓여 있더라고 살아날 구멍이 한 가지는 있을 것이고, 부정에서 긍정으로 사고를 전환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연구원은 연구실을 지켜라”는 조취를 취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가 대신 뛰겠다.”
이는 연구를 안 하는 연구소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다. 연구를 못 하는데 연구보고서를 써내라는 정부 공무원의 지시에 응하기 위해서 공무원이 부르면 정부에 가서 허황된 보고서를 써서 올렸다.
이러한 일들도 다 금지 시켰다.
하루는 한 연구원이 찾아왔다.
“내일 과기처의 어떤 과장이 우리 박사 3명을 불렀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못 가.”
그 박사 생각에 소장님이 정부 출입을 금지는 시켰지만 그래도 정부에서 부르니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허락을 받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다.

▲ 1976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대덕연구단지 건설 현장을 방문해 설명을 듣고 있다

“내가 대신 갈게. 오라는 이유가 뭐야.”
“모릅니다. 무조건 오라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과기처 장관을 찾아갔다.
“한 박사 왜 왔어?”
“장관님, 대덕에서 연구 성과 나온 거 있습니까?”
“없는데.”
“왜 그렇습니까?”
“모르겠는데.”
“연구원이 연구실을 못 지킵니다. 공무원이 부르면 가느라 연구원이 보따리 장사가 됐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이구, 고쳐야지!”
“제가 고치겠습니다. 필요하면 공무원이 연구소에 들려야죠.”
“한 박사 말이 맞아. 맞아.”
“그러려면 방침을 만들어야 합니다.”, “장관님,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소장으로 있는 동안은 절대 안 보냅니다.”
그리고 차관, 원자력 위원, 원자력 국장을 차례대로 찾아가서 오늘 아침 장관에게 건의한 일을 다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원자력개발 과장을 찾아갔다.
“과장님께서 부르신 박사 대신 제가 왔습니다.”
장관, 차관, 원자력위원, 원자력국장까지 만난 이야기를 쭉 설명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으로는 할 말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이걸 내가 소장으로 있는 9년 동안 이 방침은 지켰다.
이러한 방침이 지켜지게 될 수 있는 배경은 국가 지도자께서 나를 믿고 밀어줬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원자력은 국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기술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맡겨서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의지에 따라 연구소를 살리는데 중요한 조치 중에 하나가 연구원들의 정부 출입을 금지시키고, 정책부 사람이나 최고 관리자, 그것도 내 허락을 받은 사람만 정부 출입을 하도록 한 것이다.

4.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챙긴다!

1995년 3월 9일 발족한 KEDO의 성공을 기원하는 축하파티가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청와대, 정부, KEPCO, 미CE의 Bob Newman사장 등 많은 관계자들이 참석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KAERI 출신은 나 혼자였다.
화려하고 들떠있는 분위기 속에서 착잡한 기분에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우리에게 원자로계통 원천기술을 제공하고 기술협력을 해 주었던 CE사의 Bob Newman사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I understand your feeling.”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1994년 발생한 제1차 북핵위기에 대한 회유책으로 한·미·일 공동으로 북한에 경수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합의함에 따라 1995년에 발족한 KEDO사업은 2002년 제2차 북핵위기가 발생하면서 미국이 대북 중유 공급을 중단하고 경수로사업 재검토에 들어가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2003년 1월 북한은 NPT를 탈퇴했고 결국 KEDO는 1년간 경수로 건설 공사를 중단했다. 북한은 건설공사 중단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북한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경수로사업의 완전 종료를 주장한데 반해 남한은 미국을 설득해 또다시 ‘1년간 일시중단’방안을 이끌어냈다.
어린 시절 공산주의를 경험한 나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핵무기를 만들려는 나라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주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나는 KEDO자문위원회 위원이었는데 어느 날 KEDO자문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보니 30명의 자문위원 외에도 그날의 회의가 뭔가 특별한 내용을 발표할 것 같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인원이 모여 있었다.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위원장이 모두 발언을 하고 주요 안건을 거론했다.
“현재 신포 경수로 사업은 기초 공사가 끝난 상태에서 1년 동안 아무 진척이 없는 상태입니다. 원자로 건물 기초 철근콘크리트가 녹슬기 시작했습니다. 그대로 두면 막대한 손실이 발생할 것입니다. 미국과 일본이 빠지더라도 남한 단독으로 사업을 지원했으면 합니다.”
일순간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내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다.
“위원장님, 그 의견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저는 원자력기술자립을 총 지휘한 책임자로서 우리 과학자들이 태평양에 빠져 죽을 각오로 피땀 흘려 성공시킨 기술을 북한에 지원한다는 것에 반대합니다.”
위원장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 1979년 2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방문해 연구자로부터설명을 듣고 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로지 원자력 기술자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과학자들이 고생을 했습니다. 관계 기관은 KAERI의 기술자립 방침에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위원장을 향한 내 발언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정신자세로 어떻게 전력기관을 이끌었습니까?” 그러자 장선섭 KEDO단장이 “한 박사님, 오늘 기자들을 많이 초청했습니다. 발언 좀 삼가 주세요.”라고 하며 발언을 제재했다.
“나라가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내가 기자들 무서워서 할 말 못 할 것 같아!” 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유난히 자세가 꼿꼿한 60대 신사가 손을 들었다.
“저는 국방부 장관(오자복, 1988.02~ 1988.12)을 지낸 사람으로서 한 박사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 우리가 북한을 단독으로 도와주면 안 됩니다.” 조용했던 회의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사관학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국방부 장관을 몰랐고 그 후로도 사적인 자리에서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의 발언 후 폐회가 선언되었는데 그날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어떤 신문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KEDO자문위원회에서 “한 박사님, 임기가 끝나셨습니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솔직히 나는 북한에서 숙청의 대상이 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회의 후 응당 징계를 받을 거라는 추측을 했는데 위원직 사임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고 ‘그래도 민주주의가 낫다.’라는 생각을 했다.

5. 국가 지도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오늘 내가 풀어 논 일련의 이야기들을 적는 이유는 한국의 두뇌집단이 유린되고 무시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외에도 원자력 과학계를 위해서 할 말은 태산 같으나 잠시 접어두고 대통령께 대한민국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건의한다. 산업계의 중요성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렇다고 두뇌 에너지인 원자력분야에서 연구계를 무시하면 절대로 안된다. 대통령께서 한쪽말만 듣지 마시고 다양하게 접촉해야 한다.
참고가 될 만한 사항으로 미국 국무부의 한국 담당인 버카트 박사 이야기를 소개한다. 버카트는 30년 이상 한국 원자력 업무를 담당한 전문가이다. 그는 미국의 원자력 R&D 발전을 위해서는 한국의 원자력연구원 과학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세계에서 유래 없이 짧은 기간과 적은 예산으로도 한국형 원전 개발을 이룬 성과를 교훈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소장 시절에는 원자력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김대중 대통령에도 장관급 원자력 위원을 역임한 바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원자력연구원 원장은 대통령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과 같이 느껴진다. 바람직한 소통을 위해서는 이러한 연결고리가 빨리 회복되기를 건의한다.
대통령께서는 현명하게 판단하시리라 믿고 이글을 쓰며, 다음 회에는 일본의 원자력과 중국의 원자력을 소개하겠다.

< 필자 한필순(韓弼淳)>
△1933.2 출생 △공군사관학교 졸업, 레이더 정비장교 △서울대 문리학과 졸업, 이학사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졸업, 물리학 석사 △캘리포니아 주립대 대학원 물리학 박사 △1982~91,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 △83~90, 한국핵연료㈜ 사장겸임 △84~91, 한국원자력 연구소장 △2000~2002, 원자력위원회 위원 △92~94, 영국정부 초청 HarWell연구소 근무 △현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국방과학상, 보국포장, 산업포장, 국민훈장 모란장, 프랑스 최고훈장 ‘레지옹 도뇌르’,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등 수훈.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0호(2014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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