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감사 ‘추석선물’에도 추억

1970년대 경제 고성장시대 새로운 직장, 좋은 직장이 많이 생겨났지만 ‘나의 직장’ 은행이 제일 좋다는 확신을 가졌다. 정직과 정확성의 천직을 선택했다는 자부심에다 처우도 어느 직장 못지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거래처 사람들도 은행이 좋은 직장이라는 눈빛을 보여주었다.

[전직의 은행사랑 ②]


직장인 최대의 보람
1970년대 월급봉투
고객감사 ‘추석선물’에도 추억


글/ 길무혁 전 제일은행 지점장

직장인 최대의 보람 ‘월급봉투’

1970년대 월급봉투의 색깔이나 본봉, 수당, 식대 등 표기금액이 생각난다. 직장인 최대의 보람인 월급봉투는 절대로 손대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렇지만 점차 일부 ‘삥땅’하는 길이 생긴다. 출장비와 숙직비에 틈이 생겨나고 적금 권유 등 부정기적인 특별수당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 필자 길무혁씨

은행원 초보시절 숙직이 자주 돌아온다. 때론 한 달의 절반가량을 숙직하는 경우가 있다. 선임이나 선배들의 부탁으로 불가피하게 대신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퇴근길 대포집 술값은 선임이나 선배가 무는 것이 불문율이나 다름없었다. 숙직을 부탁할 때 쾌히 응낙한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비단 은행뿐만 아니라 1970년대 직장 분위기가 대체로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배 따라 술집에 들어서면 가게 주인이나 접대양들의 환대가 눈에 띈다. 은행원들을 ‘좋은 고객’으로 맞이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외상을 요구하면 군말 없이 들어준다. 역시 정직·정확한 직장인으로 인식하는 느낌이다. 다음달 21이면 외상값을 정확하게 갚아주는 ‘신용거래’가 관례화 될 수 있었다.

거래고객에 보내는 감사의 표시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다가오면 봄부터 여름 내내 얼굴을 익힌 거래고객들이 먼저 생각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이 있지만 은행원의 추석맞이는 상전처럼 모시는 고객관리가 중요한 행사의 하나이다. 그동안의 거래에 감사하면서 앞으로 줄곧 거래관계를 유지해 달라는 소망을 조그마한 추석선물에 담는다.
추석선물에는 부서 내 전 직원이 총동원된다. 대상 거래처를 선정하고 등급을 분류하고 선물품목을 선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전달망을 구성하고 직접 방문하여 전달하는 것이 원칙이다. 요즘처럼 택배(宅配)가 없기에 아무리 거래처가 멀어도 직원이 직접 방문해야 정성이 담긴다고 믿었다. 우편선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선물 전달이 끝나야 추석맞이 준비가 끝난 기분이다. 반면에 거래고객들께서 답례로 선물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었다. 진로소주 한 박스를 실어다준 고객이 있었고 Y셔츠와 구두표 또는 생활용품 선물세트도 보내온 사례가 있었다. 당시 직장인들이 주고받는 선물품목들이 이러했다.
고객이 보내준 선물이 대출업무와 진성어음 할인업무를 맡은 대부계, 기업과 개인사업자들에게 단기자금을 지원하고 어음·수표의 계좌개설, 교환결제를 맡는 당좌계로 집중된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총무나 서무계에는 공사발주 관련, 사무용품 조달 등과 관련된 거래업주들의 선물이 있었지만 직원들의 회식을 유치하려는 업소들의 선물도 있었다고 알고 있다.

받은 선물 나눔의 즐거움

필자는 주로 당좌계와 대부계에 근무했기에 추석선물을 많이 받아온 입장이다. 경기변동이나 정부의 서정쇄신 방침에 따라 ‘선물 안주고 안받기’ 운동이 있었지만 소박한 명절선물 풍속은 끊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은행 내부에서 ‘좋은 자리’로 통하는 직위에서 받은 선물을 독식하는 법은 없다.

선물들을 모았다가 신입행원이나 시골로 귀향하는 직원에게 먼저 나눠주고 경비직, 보일러실, 청소 아주머니와 식당 아주머니 등에게 골고루 선물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별히 누가 지시하거나 감독한 것은 아니지만 은행 내부에서 대물림되어 온 관례로 알고 따라했다.
1998년 10월, 은행원의 꽃이라고 자부하는 지점장으로 승진했을 때는 선물관리에 평소의 뜻을 더욱 철저히 반영할 수 있었다. 홀로 계신 어머님께서 6남매를 키우시며 늘 하신 말씀이 “내 것은 절약하되 다른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생전의 어머님께서는 별미로 특식을 장만하면 꼭 이웃과 나누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셨다.
만 35년간 은행원에서 지점장까지 별 탈 없이 근속한 후 퇴직한 것이 바로 어머님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는다.

천직은행 사랑은 영원하다

세월에 따라 은행의 이미지와 근무환경도 많이 변했다고 듣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변해도 은행의 기본역할과 은행원의 사명은 달라질 것이 없다고 믿기에 옛 직장 제일은행의 일거수일투족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은행이란 친절과 안심의 상징이라고 확신한다. 과거엔 “은행 문턱이 턱없이 높다”는 일부 비판을 받았지만 지금의 은행 서비스에 문턱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일부 고객정보의 유출사고가 있었지만 사후대책이 엄중했으니 더 이상 고객들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비록 지금은 전직(前職) 신분이지만 한번 은행원이면 영원한 은행원이라고 자부하며 여름휴가차 해외여행을 준비하면서 ‘내사랑 은행은 영원히’라고 말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1호(2014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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