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복 전 정훈감,‘ 쟁과 역사’

육군 정훈감(政訓監) 출신이 전후세대를 위해 저술한 6.25전쟁 실록 ‘전쟁과 역사’(거목문화사, 2014.6. 524쪽)가 ‘잊을 수 없는 전쟁영웅’으로 ①문맹(文盲)영웅 ②소년병 ③학도병 및 ④한국산 군마(軍馬) 렉리스(Reckless)를 꼽았다. 저자는 ROTC 3기생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배영복 장군(준위)으로 정훈감을 지냈다.

문맹병(文盲兵) 소년병, 학도병…
잊을 수 없는 6.25 영웅들
배영복 전 정훈감,‘전쟁과 역사’

▲ 배영복 전 육군 정훈감


“태극 무공훈장 보다 위대하다”

시골출신 문맹 징집병들의 산화

저자는 정훈장교의 안목으로 6.25 한국전쟁 실록을 자세히 기술하면서 ‘전쟁영웅’ 편에서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대장이나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영웅들 보다 위대한 ‘잊을 수 없는 영웅’으로 제일 먼저 문맹(文盲) 징집병사들을 꼽았다.
이들은 대다수가 시골 태생으로 소집영장을 받고 신성한 국방의무에 순응하여 전투가 치열했던 곳곳 무명고지에서 산화했다. 전쟁 몇 년 뒤의 통계이지만 1955년의 전국 문맹률(文盲率)은 19.8%, 서울시민 중에도 10.6%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문맹이었다.
6.25 전쟁 3년간 징집으로 전선에 투입된 병사 90만명 가운데 10% 상당이 이들 문맹자들이었다. 그들은 단기 군사훈련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고향으로 보내는 군사우편마저 선임자들로부터 대필(代筆)받고 부모님으로부터 온 편지의 답장도 대독(代讀)으로 안부를 들어야만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전황이 급박했지만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는 징집연기의 혜택을 베풀었다. 이 때문에 시골출신 문맹자들이 대학생들을 대신하여 총을 메고 전선으로 나가 대거 전사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이들을 ‘잊을 수 없는 전쟁영웅’으로 꼽은 것을 모두가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10대 소년병 3만여명 참전유공

두 번째 영웅 ‘소년병’은 징집 연령기에 이르지 않은 16~17세 소년들이 자진입대 형식으로 참전한 경우이다. 정부가 공식으로 확인한

참전 소년병은 2만9,600여명이다. 육군 2만2,800여명, 해군 2,900명, 공군 1,100명이며 여성 소년병도 467명으로 집계됐다.
소년병들은 겨우 10여일 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투입되어 2,573명이 전사했다. 특히 대한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격이던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 무려 1만여명이 투입됐다. 그 뒤 북진대열에 참가하여 가평·청평전투, 백마(白馬)고지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희생자가 나타났다.
1950년 11월 국군 2사단 31연대에 편입된 소년병 박영근(82) 씨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한창일 때 첫 전투에 참가하여 여러 무명고지를 지키다가 포로가 됐다. 화천발전소의 임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미군 폭격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여 계속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그 뒤 이등중사로 만기 제대하여 덕수상고에 복학하여 사회로 진출한 사례이다.
익산 출신의 채중석 씨(78세 사망)는 1952년 농업고 1학년 16세 나이로 입대하여 백마고지의 주인이 23차례나 바뀔 때 여러 차례 전투를 겪고 1956년 일등중사로 전역한 경우이다.
소년병들의 참전은 정부가 만 18세 미만의 소년을 징집한 경우 국제법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들어 공식 인정을 꺼려왔다. 그러나 1966년 대구에서 ‘6.25 참전 소년지원병 중앙회’가 결성된 후 대정부 호소·탄원으로 이를 공식 인정하게 됐다.
소년병중앙회 박태승(81) 회장은 소년병 출신 가운데 생존자가 7,500여명이라고 확인한다. 또 대구·경북출신 소년병이 유달리 많은 것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대구 사수전(死守戰)에 운명을 걸었을 때 대구·경북출신 소년병들이 많이 참전했기 때문이다.

군번없는 학도병들의 용맹참전

학도병의 경우 자발적인 참전으로 군번(軍番)도 없는 무명용사였다. 소년병들과 비슷한 연령대로 길거리 모병이나 직접 군부대를 찾아가 입대했다. 그

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2월 29일자로 학도병들의 복귀명령을 내려 학업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서울 동성중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보낸 ‘전선의 편지’가 이 책속에 소개되어 있다. 1950년 8월 10일자 편지에서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선의 급박한 사정을 말하면서 적들은 수만명인데 우리는 고작 71명뿐이라고 적었다. 학도병 이우근은 이 전선의 편지를 띄운 후 얼마 안돼 전사했다.
재일교표 청년들의 학도병 입대자도 642명, 이중 135명이 전사했다. 재일교포 학도병들은 유엔군으로 편성되어 2주간 군사훈련 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고 백마고지 전투 등에도 참가하여 많은 전사자를 남겼다.

한국산 군마 ‘렉레스’의 탁월무공

한국산 군마(軍馬) 렉레스(Reckless) 스토리가 매우 감동적이다. 6.25 직전 서울 경마장 소속 경주마 ‘아침해’가 250달러에 미 해병대로 팔려가 ‘렉레스’라는 군마병이 됐다.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화기소대 소속이던 렉레스는 연천지구 전투 등 무려 386차례나 탄약을 지고 철조망을 넘고 포화 속으로 운반하는 전공을 세웠다. 1953년 3월 중공군과 미 해병대가 5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일 때 렉레스는 혼자 탄약을 지고 51차례나 전선을 돌파한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했다. 그사이 무공훈장도 5개나 받았다.
미군은 렉레스의 무공을 기려 미국으로 데려가 1959년 하사관 계급을 부여했다가 1968년 천수를 다하고 사망하자 장엄한 장례식으로 예우했다. 미국의 시사잡지 ‘라이프’는 1997년 이 렉레스 군마를 세계 100대 영웅으로 선정했다. 저자가 이 한국산 군마를 ‘잊을 수 없는 6.25 영웅’으로 꼽은 점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6.25를 알면 통일의 길 보인다

배영복 정훈감은 ‘전쟁과 역사’를 12장에 걸쳐 정리 분석하면서 ‘6.25를 알면 통일이 보인다’고 말했다. 6.25는 너무나 어이없이 당한 김일성의 남침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의 전면 남침 개시까지 국군은 까마득히 모르고 태평이었다. 남침 2시간이 지난 아침 7시 5분, KBS 라디오가 인민군의 남침을 처음으로 알리고 11시에 경향신문이 첫 호외(號外)를 발행했다.
이어 11시 35분, 무초 미국대사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고 국방부가 12시에야 공식으로 발표했다. 하오 2시 이 대통령이 6.25관련 긴급명령 제1호를 발표하고 주미 장면(張勉) 대사가 미 국무부를 방문, 긴급지원을 호소했다.
이튿날 월요일에는 학생들이 등교하고 직장인들도 출근했으며 국방부는 “용감한 국군이 적을 격퇴시키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적기가 용산과 김포공항 상공에 나타나 “항복하라”는 전단을 살포했다. 또 곳곳에서 쿵쿵거리는 대포소리가 들려왔다.
전쟁 3일째 6월 27일 새벽 1시에 비상 국무회의가 열리고 새벽 3시에는 이 대통령이 피난을 떠났지만 심야국회는 국방부와 육본의 엉터리 보고를 믿고 ‘서울사수’를 결의했다. 6월 28일 새벽 1시엔 미아리고개에 적 탱크가 나타났고 2시 15분에는 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으며 낮 11시 30분에는 광화문까지 적 탱크가 진출했다. 이로부터 피난 못 간 서울시민들은 적치(敵治) 90일간 숨을 죽이고 연명해야 했다.
6.25 남침 전야 인민군들은 38선상으로 이동했지만 국군 수뇌부는 비상해제, 장병휴가, 호화파티로 세상을 모른 채 태평세월이었다. 단지 비상대기 중이던 부대는 옹진반도의 17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 포천 19연대(연대장 윤춘근 대령), 춘천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동해안 8사단(사단당 이성기 대령) 뿐이었다.
이 때문에 파죽지세로 밀려오던 인민군을 저지하고 첫 승전보를 울린 부대도 이들 뿐이었다.

6.25로 남북간 인구대이동 등

저자는 6.25전쟁의 교훈이자 파급영향으로 반공·안보의식 강화, 애국심과 적개심, 한매동맹 결속, 공산당의 실체 인식 등을 꼽고 ‘빨리빨리’ 문화도 준비 없는 전쟁을 치룬 과정에서 생성됐다고 분석했다.
사회적으로는 남북 간 인구 대이동이 특징이다. 월북하거나 납북된 남한 인사가 29만명, 북의 공산치하를 벗어나 남으로 피난 온 월남자가 50~60만명에 달한다. 또 전쟁 통에 인구 증가율이 2.9%로 크게 높아진 것도 특징이다.
전쟁 수행을 위해 길거리 모병 등으로 신병을 보충하여 전사자가 수없이 쏟아지고 상이군경이 절룩이며 거리를 방황했다. 이 같은 사회분위기가 방영된 듯 출산율이 높아져 인구부족을 보충할 수 있었다.
전쟁문학과 전쟁가요가 국민을 통합시킨 효과도 있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전선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그 시절의 국민 심경을 대변한다.
반면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으로는 수많은 이산가족 및 전쟁고아와 미망인들을 꼽을 수 있다. 또 이념갈등과 흑백(黑白)논리도 6.25의 부정적인 유산으로 꼽을 수 있다.

6.25전쟁과 정훈대의 역할

저자는 서울 경동중고,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ROTC 소위로 임관된 후 베트남전에 참전, 맹호부대 정훈대장으로 군의 사기진작을 위한 실전

정훈을 쌓았다. 그 뒤 1군 사령부 공보관, 국방부 정훈과장, 육본 홍보실장을 거쳐 육군 정훈감(준장)으로 93년 7월 전역했다.
저자는 6.25 전쟁 중에는 정훈대가 종군기자단, 작가단 등과 함께 군의 사기진작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정훈대는 진중신문 발행, 전투상보 수집, 정신교육자료 편찬, 시사안보 강연, 군가교육, 대적방송 및 대민홍보 역할을 맡았다.
정훈(政訓)장교는 광복군 시절부터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정훈 1기생은 전쟁이 나기 전 1949년 5월 75명이 임관되고 1950년 1월 2기 44명, 1950년 11월 3기 110명이 선발되어 6.25 전쟁을 치렀다.
정훈 1기로는 유학성(兪學聖) 대장, 노영서(盧永瑞) 소장, 2기 장근환(張根煥) 소장, 3기 주명호(朱明鎬) 준장 등이 대표적인 정훈 출신이다. 또 언론계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선우휘(鮮于輝) 작가, 국회의원에는 정재철(鄭在哲), 선우연(鮮于煉), 손도심(孫道心) 씨 등. 학계에는 양흥모(梁興謨) 교수가 대표적이다.
6.25 당시 정훈국장 이선근(李宣根) 박사는 정훈 출신이 아니지만 정훈장교의 상징으로 꼽힌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1호 (2014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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