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화북지방 파견이 생사 운명

▲ 올해 아흔의 배흥직(裵興稷) 목사

올해 아흔에 이른 경북 안동의 배흥직(裵興稷) 목사께서 68년 전의 우맥(愚麥)일기를 깨알처럼 메모형식으로 보내주셨다. ‘우맥’은 배 목사의 아호이며 일기내용은 일제 강제징병에 의해 만주와 중국에서 관동군(關東軍)으로 근무하다 8.15 직후 광복군(光復軍)으로 귀환한 기나긴 비화(秘話)가 줄거리이다. (편집자)

관동군에서 광복군으로
68년전 歸國船(귀국선) 일기
裵興稷(배흥직)목사, 8·15 귀국비화 감동
중국 화북지방 파견이 생사 운명

만주 이주, 목재회사 취업중 강제징용

‘우맥일기’의 주인공 배 목사는 1924년 4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35년 선친 배영문(裵永文) 장로를 따라 만주(滿州)로 이주했다. 선친 배 장로는 안동 동부교회 설립자로 일제의 신사(神社)참배 강요를 못 이겨 전 가족 13명을 데리고 만주국 안동현(安東縣)으로 피신했다.
당시 경북 안동읍 보통학교 4학년이던 배흥직 소년은 만주국 안동현 소화(昭和)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39년 3월 6학년을 졸업했다. 소학교 졸업 직후 만주 흑룡강성(黑龍江省) 흑하시(黑河市)에 있는 목단강(牧丹江) 목재㈜ 흑하지점에 취업하여 근무하면서 사설 야간학원인 흑하시 제국중학원(帝國中學院)을 1943년 수료했다.
이 무렵 일본 내각 정보국이 1944년 소화 19년부터 조선인도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1944년 7월 15일 제1기 조선인 징병검사가 실시되어 배흥직은 흑하시 병무계에서 제2종 을(乙)로 판정되어 일본 관동군으로 강제 소집됐다.
소화 19년, 1944년 12월 9일, 만주 주둔 891부대 국지(菊池)중대 훈련대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2등 훈련병으로 중국 본토 화북(華北)지방 모택동(毛澤東)의 팔로군(八路軍) 전투지구로 파견됐다.

징병출신 46명, 광복군 편입

1945년 3월 20일, 8.15 해방 5개월 전에 화북지방 제남시(濟南市) 철도부대 제14연대 제2대대 제1중대 제2소대 제3분대에 배치됐다.

이곳에서 철도경비 및 보수와 보급물자 수송안전을 맡아 보면서 야간전투에서 일본군 병사 2명이 전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철도부대 근무 3개월 만에 2등 훈련병에서 관동군 일등병으로 진급했다가 다시 한달 만인 소화 20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을 맞았다. 이에 배 일등병을 포함한 조선인 징병출신 46명이 완전무장으로 탈출하여 광복군(光復軍)으로 편입됐다.
1945년, 단기 4278년 10월 15일 새벽 4시 조선인 징병 46명은 사전에 광복군 비밀요원과 협력으로 광복군 제3대대 트럭 편으로 제남시민 공원으로 집결했다. 당시 광복군은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 장군, 참모장 이범석(李範奭) 장군 휘하에 3개 대대 조직으로 편성되어 제1대대장 이범석, 제2대대장 고운기(高雲起), 제3대대장 김학규(金鶴奎)가 지휘했다. 관동군에서 탈출한 46명은 중국 산동성(山東省) 지구를 관할하던 제3대대로 편성됐다.
제3대대는 탈출 조선인 46명 외에 중국내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학도병과 기타 지원병 등이 집결하여 250여명으로 조직됐다. 이는 일본군과 중국 국부군(國府軍)에 근무하던 조선인 출신 징병들을 한 곳으로 수용하여 장차 귀국선(歸國船) 교섭에 대비하려는 방침이었다. 광복군에서는 이 제3대대를 금강부대(金剛部隊)라고 호칭하여 소속은 광복군이나 중국 국부군이 물자를 보급해 주고 일본군 사령부에서는 일본병사 12명을 파견하여 금강부대와 외부와의 연락을 주선하는 책무를 맡았다.

청도서 귀국선으로 인천항 도착

1945년 12월 7일, 광복군사령부, 중국 국부군사령부, 일본군 잔류부대사령부 등 3자가 합의하여 금강부대 250명, 산동성 주재 조선인 교포 800여명, 일본인 민간인 2,000여명 도합 3,000여명이 귀국선을 탈 수 있도록 주선하여 제남시(濟南市)를 출발하여 청도시(靑島市)까지 대이동 행군하기로 했다.
당시 해방 직후의 혼돈 속에 중국에 잔류해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광복군, 중국군 및 일본군 잔류부대가 합의하여 진행했다. 1945년 12월 24일 제남시를 출발한 3,000여명의 대집단이 청도까지 15일간 행군할 때 광복군 250명이 완전무장으로 팔로군의 습격에 대비하여 경비를 맡아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청도에서는 3개월 20일간 수용소 생활을 거쳐 징병출신 250명과 조선인 교포 1,000여명은 미군이 제공한 LST편으로 인천을 향해 출항했다. 당시 미군과 수송협력은 청도 주재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가 파견한 이대밀(李大密) 목사(산동성 조선인거류민단장)와 방지일(方之日) 목사(청도 조선인중학교 교장)가 맡았다.
청도를 떠난 귀국선이 1946년 4월 16일, 인천항에 도착하고 보니 콜레라 전염병으로 하선(下船) 금지령이 내려 선내에서 6일간 갇혀 있다가 4월 21일에야 조국 땅을 밟았다. ‘우맥’(愚麥)일기의 주인공 배흥직은 4월 19일, 귀국선 선내에서 22세 생일을 보냈다.
인천에서 기차 편으로 대구역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오후 1시 안동역에 도착하니 온 가족이 대기하고 있었다. 안동역전에서 모친의 눈물 속에 온 가족이 만세3창을 외치자 역전에 모인 군중들이 박수로 환영하여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관동군에서 화북지방 파견이 갈림길

필자 우맥 목사는 만주 관동군에서 중국 화북지방으로 파견되지 않고 그대로 만주에서 해방을 맞이했다면 관동군 40만명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 신세가 됐을

▲ 기독청년면려회 발상지교회 앞에서...

것으로 상상한다. 당시 소련군 포로는 시베리아 강제노력으로 끌려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만주의 일본군들은 모두 시베리아 강제노역을 거쳐 3년이 지난 1948년에야 총 40만명 가운데 겨우 2만4천여명이 귀국했다.
배 목사는 일본군의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지만 중국지구로 파견된 것이 사생(死生)운명의 갈림길이었다고 회고한다.

목재회사 5년 임금등 2,000엔 피해

배 목사는 일제 강제징용으로 개인이 입은 경제적 피해액을 당시 금액으로 2,000엔 쯤으로 계산한다. 조선인 출신 군수(郡守)영감 월급이 35엔일 때이니 2,000엔이면 얼마나 큰돈인가.
배 목사는 만주에서 목재회사에 취업하여 1939년부터 1944년까지 5년간 월급과 상여금을 전액 사내 저축계를 통해 적립한 액수가 2,000엔 가까이 달했다. 일본군 징병으로 떠날 때도 군복무 후에는 다시 회사로 복귀하여 근무하기로 계약했기 때문에 고향으로 한 푼도 보내지 않았다.
당시 회사 지배인과 회계과장이 저축을 그대로 두고 다녀오면 매년 이자가 붙어 쌓이게 된다고 설득하여 5년간의 노동대가를 몽땅 날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당시 회사 저축계에 확인된 금액이 1,800엔, 입대 후 광복시까지 9개월간 이자를 합산하면 최소 2,000엔에 이른다는 계산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1호 (2014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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