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전설

▲ 소석 이철승(素石 李哲承) 의장

[원로 정치논객 칼럼]

오늘도 노병(老兵)의 우국충정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전설
“건국절 제정은 역사바로세우기다”


글/ 鄭在虎 (정재호 헌정회 원로회의 부의장, 제8대국회비서실장,
9· 10대의원, 전 경향신문 정치부장, 논설위원)

다시 읽는 ‘대한민국과 나’

세월도 어설피 곁눈질하다가 족히 10년 쯤 사람을 놓쳐버린거다.
예부터 몸과 마음이 더불어 건실하여 약을 잊고 해로하는 복된 삶을 ‘망백초’(忘百草) 인생이라 했다. 딱히 그 주인공이 아닌가. 1922년 임술생. 아흔 셋인 소석 이철승(素石 李哲承) 의장을 우러러 후학들이 백수를 축원하는 뜻을 담아 곧잘 입에 올리는 덕담가운데 한 두 대목이다.
백수풍신(白首風神)이 훤칠한 ‘소석’을 93 상노인으로 읽는 사람은 드물다.
素石은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자타공인, 이 나라 현대사의 한 가운데 육중하게 좌정한 산 증인이다.

▲ 1946년 1월 이철승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고려대 정치학과)이 반탁학생대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1945년 암울했던 혼돈의 해방공간. 좌우이념 충돌-신탁통치 찬반투쟁-반공-건국-6.25동란-폐허-정국혼란-5.16군사정변-산업화-빈곤탈출-10월유신-민주화를 거쳐 오늘의 경제 강국에 이르는 67년. 그 대장정의 길섶에 점착(粘着)된 素石의 치열한 몸짓은 영롱하다. 그 흔적은 곧장 대한민국사(史)의 큰 흐름과 궤도를 함께 한다.
2011년 5월, 그가 90회 생신에 즈음하여 펴낸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는 객관적인 조밀성이 거의 완벽하게 투영된 대하실록이다.

▲ 1946년 전국학련위원장으로서 이승만 박사 내외분과 함께

상·하권 900여 쪽. 1,716명에 달하는 내외 인사가 실명 등장하는 광폭(廣幅)스케일을 과시한 당대 회고록의 압권으로 회자됐다.
때마침 8.15광복절 69돌이다. 나라 안팎 사정이 험난하다. 주변 안보환경의 구김살은 날로 험상궂다. 신냉전 기류가 거칠게 조여 오는 형국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건너뛰며 건성으로 넘겼던 ‘대한민국과 나’를 제대로 훑어봐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시절의 국난을 오늘에 복원시켜 이런 저런 상상력을 동원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에 담긴 지은이의 애국심과 인간적인 진정성에 빨려 들어간 탓에 의도하지 않게 글줄의 향(向)이 ‘이철승 평전’의 모양새로 흘러버렸다.

‘대한민국 건국사’와 나이테 함께한 巨人

오늘을 생존하는 정치인 중 감히 대한민국 건국 전후의 풍진(風塵)과 나이테를 공유할만한 자격과 배포를 가진 이가 과연 누구냐는 물음표 앞에 ‘나’요! 하고 나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철승의 진면목이다.
그의 정체성은 ‘선비정신’으로 포장된다. 선대로부터 대물림된 선비혼(魂)의 뿌리는 ‘청심과욕’(淸心寡慾=마음을 깨끗이 욕심은 적게라는 뜻)에 있다는 게 「素石선비론」의 핵심이다.

▲ 이철승 신민당 야당 대표로서 박정희 대통령과…(1978.5.)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지만 향기를 팔지는 않는다)은 그의 좌우명이다.
그는 산전수전을 섭렵한 정치인이다. 정치 마당은 인간의 욕구가 작열하는 몰인정(沒人情)의 잔혹한 현장이다.
素石의 천성은 온화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그의 정치 행작(行作) 언저리에서 끊고 맺는데 여린 대목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온정(溫情)주의라고 하면 과장일까. 권력의지의 완성도를 다지는 야성적인 ‘독기’(毒氣)를 키워 내는데 태만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내면세계를 채우고 있을 법한 선비의 생리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측근으로부터 심심찮게 제기된다. 그는 대권 도전에 실패했을 때 ‘팔자소관’이란 말로 자위했다. 인간사(人間事)를 ‘숙명’탓으로 돌리는데 익숙한 그는 민속신앙 쪽에 기운 성품이다. 그러한 심성이 오늘날 노인장의 건강 챙기기에 요긴한 심리환경을 다스리는 묘약이 됐다면 보다 값진 축복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과 나’ 그 갈피 여러 곳에서 인간 이철승은 세상물정의 허실과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과욕(寡慾)의 잣대로 승부를 걸었다. 성취와 좌절을 두루 맛본다. 3김(YS, DJ, JP)과의 골 깊은 애증의 뒤안길을 묘사한 장면에서도 분노를 삭이면서 온건하게 다루고 있다.
40대 기수론을 놓고 뜨겁게 맞붙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 특히 김대중과 거래한 협력과 배신의 진실게임을 제대로 표백(表白)한 것은 회고록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주관적 시각을 좁히려고 애쓴 자제력이 돋보인 반면, 고도의 민감한 사안을 에워싼 밀실의 ‘밀어’(密語)까지 감지할 수 있는 대목들은 회고록의 역사성을 중시한 필자의 정직성을 대변하고 있다.

이땅 학생운동의 전설적 원조

식민지의 아들로 태어나 망국의 한을 껴안고 자란 소싯적 이철승의 품성은 격정적이었다. 일제(日帝) 중학생 시절 조선학생을 차별한 일본인 담임교사를 내동댕이친 그는 ‘불온 조선인’이란 주홍글씨 딱지를 달고 살았다. 일본 경찰의 매서운 눈초리는 잠시도 그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끌려가서도 끝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한 이철승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이상등병’으로 버틴 유일한 조선인 병사였다.
해방 후 전국학생총연맹(全學聯)을 조직한 것부터 남다른 용맹이었다. 남한 사회를 휩쓸었던 공산당 좌익세력에 맞서 민족진영의 전방위 투쟁 세력의 선봉을 자부한 ‘전학련’의 파괴력은 위협적이었다. 청년 이철승은 이 땅의 전형적인 학생운동의 원조임이 분명하다.
2차 대전 전승 연합국인 미·소·영·중 정부가 최소한 5년간의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밀어붙이자 전학련의 본격적인 신탁통치저항운동은 절정을 이룬다.
찬성하고 나선 좌익과의 밀고 밀리는 피투성이의 찬반투쟁은 서울, 대구, 대전, 전주를 비롯한 전국 중요 도시의 도심을 석권했다. 우익학생들의 성난 아우성에 밀려 신탁통치안은 한창을 버틴 끝에 꼬리를 내린다.
반탁(反託)은 이 나라 건국사에 박힌 눈부신 기념비요, 훈장처럼 빛나는 이철승의 대명사다. 학생 운동의 선봉장으로 주목받은 이철승은 한동안 소석(小石)이란 필명을 썼다. 딴은 스스로 몸을 낮춘다는 겸손의 뜻으로 적을 ‘소’(小)를, 돌‘석’(石)은 의리를 돌처럼 단단히 한다는 결의를 담았다는 것.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 정치에 입문하면서 아호의 첫 자를 ‘小’에서 ‘素’로 바꾼 까닭은 따로 있었다.
상해 임정(上海 臨政)의 외교부장을 거쳐 환국 후 백범 김구(金九)와 반탁운동에도 참여했던 독립운동의 원훈 조소앙(趙素昻)의 이웃에 살면서 고고한 인품을 사숙한 나머지 함자의 가운데자인 素을 옮겨썼다는 설명이다. 모든 사물의 본바탕을 뜻하는 ‘素’에 대한 素石의 유별난 집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1970년 전후 ‘ 40대 기수론’ 이 정국을 휩쓸 당시 40대 정치인 등이 신민당 유진산 당수의 집에 모였다. 왼쪽부터 김영삼 조영규 고흥문 서범석 김대중 이철승 홍익표 씨.

‘사쿠라’공세 속 ‘이철승 시대’의 진면목

1970년대 중턱,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무한투쟁의 틀에 갇힌 한국 정치의 악순환에 마침표를 찍고자 했던 素石은 ‘중도통합론을 발기(發起)한다.
국가안보와 자유신장을 대립적 개념에서 해제하여 하나의 접점으로 엮고자 노심초사한 素石의 구상은 “국가 안보는 방죽의 둑이요, 자유는 방죽의 물이기에 상호의존적 관계선상에 있다”는 그의 말 속에 농축되어 있다.
가파른 대척점에 매달린 정치권에 유연성을 접목시키려는 그의 고뇌에 찬 야심작이었다. 여야 간 한 치 양보를 뿌리치는 사생결단의 기로에 선 마당이다. 야당 당수로서는 참으로 입 밖에 내기 어려운 타협의 논리를 토설한다는 것은 큰 ‘용기’였다. 지식사회 일각에서는 현실타파의 헌책이란 반응을 보였으나 강경일변도의 당내 역풍도 만만찮았다.
김영삼(YS)이 주도하는 당권파는 이른바 ‘사쿠라’ 논쟁에 불을 지핀다. 비주류를 이끄는 이철승을 향한 집중공세의 불꽃이 사납게 피어올랐다. 권력과의 불순한 거래의 산물이라고 몰아붙였다. 신민당의 걷잡을 수 없는 내용은 김영삼 vs 이철승의 물러설 수 없는 전쟁터였다.
’76년 9월의 전당대회는 두 차례에 걸친 대의원 투표 끝에 이철승의 승리를 확인한다. 당수 경쟁에서 YS를 누른 素石의 신민당 시대가 열린다. 2년 1개월만의 당권교체였다. 그는 ‘참여속의 개혁’이란 깃발을 내걸었다.
’78년 12월 12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헌정사상 최초로 신민당이 전국 총 득표율에서 집권 공화당을 1.1% 앞서는 기록을 세운다. 중도통합론을 내건 이철승 체제가 길어 올린 역사적인 쾌거였다.
베트남 패망 이후 주한미군의 철수문제가 워싱턴에서 공론화 된 시점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자신이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주한미군 철수의 일정 짜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미간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한반도 정세는 한치 앞이 불투명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철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미군철수를 저지하기 위한 제일야당의 역할론을 들고 나왔다. 자신이 앞장서서 미·일(美·日)을 순방. 그 부당성을 피력하겠다고 밝혔다. 야당 당수의 전향적인 안보외교선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국회 입성 후 시종 국방위원회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는 국가안보에 관한한 늘 정부·여당보다 앞서나갔다.
그의 안보 순방외교는 미국과 일본 조야의 유력야사들로부터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내에서도 주한미군철수가 모스크바, 베이징 위정자의 오판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움직였다. 특히 백악관을 향한 펜타곤의 반발이 현실적인 압력으로 작용했다. 카터는 마침내 자신의 카드를 내려놓았다. 초당 외교의 본보기로 평가받은 이철승의 과감한 드라이브는 한국 야당사(史)에 매우 특별하고도 인상적인 방점을 찍었다. 그러나 素石의 행각을 ‘청부외교’라고 깎아내린 반대파는 중도통합론과 싸잡아 사쿠라 논쟁을 재 점화 시킨다.
이에 맞선 이철승의 대응은 확신에 차 있었다. “국가안보 앞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일관된 주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10년이면 ‘가변강산’(可變江山)이라 했던가. 36년 세월이 흘렀다. 세월도 인심과 더불어 늙었다. 그러나 국가의 명운에 얽힌 사연은 언제나 불로(不老)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오늘에 되살려야 할 우리의 소중한 역사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촘촘한 노익장 곰삭은 풍류

소석의 걸쭉한 입담은 빼어나다. “구시대의 막둥이요 신시대의 맏형” 항일독립운동과 대한민국건국이란 세대 간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노라는 당신의 자긍심을 내비칠 때면 빼놓지 않는 멘트다.
“맛과 멋을 신명으로 버무린 전주비빔밥” 어쩌다 신명을 흩날릴 요량이면 못 말리는 풍류 한마당을 뽐내기 전 ‘소석’이 읊어대는 자기소개의 한 구절이다. 그는 예향(藝鄕) 전북이 안태고향이다.
고복수의 ‘짝사랑’이나 백년설의 ‘산팔자 물팔자’를 노래할 때 끌어올리는 곰삭은 목청과 꺾어 내리는 가락의 떨림이 여간 아님을 눈치 챌 수 있다.
털끝만큼도 상스럽지 않는, 차라리 운치가 넘치는 투박한 그의 육두문자와 속담풀이는 좌중을 휘감는다.
素石의 일상은 여전히 촘촘하다. 지난해 가을 낙향의 행장을 꾸렸다가 입소문을 듣고 가로막는 옛 동지들의 성화에 뜻을 접었다.
건국단체총연합회 총재 반탁학생운동 기념사업회장 자리를 비롯, 이런저런 연으로 맡고 있던 8군데 직함을 모두 내려놓고 후진들에게 물려주었다. 이미 서울 방배동 큰집까지 정리한 그는 성북동 딸애의 아파트로 옮겨 앉았다. 여의도 국회 경내에 있는 헌정회(憲政會) 원로회의 의장실과 잠실 올림픽 공원에 자리한 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이사장실을 오가는 나날이다. 두 곳의 임기는 정관으로 못 박혀 있다.
소석의 신문 챙기기는 유난스럽다. 비서실에서 스크랩한 사설 칼럼은 물론, NYT를 포함한 저명한 외신 해설기사에 이르기까지 밑줄을 긋는 素石의 열독량은 웬만한 시사주간지 편집기자의 몫과 견주어 손색이 없을지 모른다.

“평양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싶다”

건국절(建國節) 제정의 당위성을 목마르게 강조하는 素石의 입에서는 단내가 날 정도다.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에 어찌 ‘건국의 날’이 없는가!
족보 없는 ‘사생아공화국’이 될 순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8.15 광복절의 의미를 보다 뜨겁게 달군 건국절 제정에 열정을 불태워온 素石은 또 하나의 진정한 역사바로세우기를 겨냥한다. 노병(老兵)의 식지 않은 우국충정을 읽을 수 있는 며칠 전의 일화 한 토막을 놓칠 수 없다.
천주교·불교·개신교·원불교 4개종단의 수장이 재판에 계류 중인 내란음모사건의 이석기 피의자에 대한 선처탄원서를 냈다는 TV방송을 듣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선 素石의 반응은 민첩했다.
“어불성설도 유만부득이지…” 마침 출타중인 헌정회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묵과해서는 안된다.”면서 헌정회 성명을 내도록 당부했다. 종교지도자의 부적절한 언사를 조목조목 짚은 헌정회 회장 성명이 나간 뒤 각급 사회단체가 일제히 규탄의 목소를 높였다.
“정치는 하수도(下水道) 공사요 종교는 상수도(上水道)공사다.” 정·종(政·宗) 분리를 못 박은 헌법정신을 강조해온 素石 어록중의 하나다.
그에겐 두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소박한 소망이요 또 하나는 뜨거운 열망이다. 전자는 2017년에 열리는 평창 동계올림픽 참관이요, 후자는 남북 관계가 잘 풀려 평양에서 막걸리 한 사발 꿀꺽꿀꺽 삼키고 싶은 것이다. 평생 술·담배를 멀리해온 그의 독백이다.
학생운동시절 이념적 동지로서 인연 맺은 반려자 김창희(金昌熙.90.의학박사)여사와의 삶은 금실이 좋기로 소문나 있다. 오늘의 열정이 식지 않는 한 素石 스토리는 현재 진행형이다.

▲ 이철승 의장이 출판기념회에서 주요 내빈들과 박수를 치고 있다. 오른쪽부터 부인김창희 여사, 이철승 회장, 박희태 국회의장, 김수한 전 국회의장, 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본부장,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노재봉 전 국무총리.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1호 (2014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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