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명 전사자 없이 임무수행

올해 한국군 월남전(베트남전) 참전 50주년을 맞고 보내면서 참전 장병의 일원으로 그때 그 시절의 특별한 소감을 잊을 수 없어 일부나마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소망이다.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 등 장병 140여명 파병으로부터 꼭 반세기에 이르렀다.


전투부대 중대장으로…
월남참전 50주년
단 한명 전사자 없이 임무수행


글/ 박민식 편집위원,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자문위원

강재구 중대장의 희생을 맹호정신으로

당시 사상 최초의 월남전 참전은 5.16혁명 후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이었지만 참전 장병들도 나름대로 큰 결단이었다.
필자는 당시 20대의 초급장교(중위)로 물불 가리지 않을 세월이었지만 전후방 개념마저 불투명한 월남 정글전에 참전한다는 사실을 두고 망설인 것이 사실이었다.

▲ 강재구 대위 생전 모습

파월부대 편성시 전군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파악한 결과 장교는 수적으로 가능했지만 병사들의 충원은 크게 부족했다. 이 무렵 미군의 월남전 소식이 연일 뉴스의 초점이었다. 미군은 막강한 장비와 최신예 전투기를 동원하여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호치민 루트를 타고 잡입하는 월맹군, 베트콩(VC), 지방 게릴라 등이 서로 연계하여 미군과 월남정부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하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기에 참전을 반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어렵게 파월부대를 편성하여 강훈을 실시할 때 부대주변에는 자식의 파월을 반대하는 가족들로 붐볐고 일부 가족들은 “빽이 없어 우리 아들이 월남간다”고 울부짖는 광경도 있었다.
맹호부대 파월 준비가 한창이던 1966년 10월, 전투훈련 중 부하가 수류탄 투척훈련 중 실수로 많은 중대원이 피해를 입게 될 위기일발에 중대장 강재구 대위가 몸을 던져 부하들을 구하고 자신은 산화한 사건이 발생했다. 강 대위의 살신성인은 전장으로 나가는 군인정신의 상징이 되어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파월용사들을 격려할 수 있었다.

주월 한국군 작전통제권 확보

한국군 참전에는 작전지휘 및 통제권을 누가 책임지느냐는 문제가 중요 현안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국내에서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행사하고 있으니 파월 한국군의 작전통제도 주월 미군 사령관이 맡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내정된 채명신 장군은 생각이 달랐다.

당시 주월 미군 사령관 웨스트 모렌드 장군은 한국군이 미군의 작전통제 하에 미군작전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월남정부는 월남군의 작전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어려운 문제점이 제기되자 박 대통령도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한국군의 독자적인 지휘권을 미국정부에 요청하여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주월 미군 사령부, 월남정부와 3자간 격론 끝에 한국군의 단독 작전책임지역을 확보했다.
주월 한국군의 작전책임지역은 중부지역 빈딩성, 푸엔성, 칸호아성 등 3개 성으로 남북연결 철도와 1번 도로, 동서연결 19번 도로 및 월남 최대의 곡창지대를 맡았다.
채명신 사령관은 한국군 작전지역 내에 50여개의 소부대 전술기지를 편성하여 지역을 통제 관리하면서 인근 주민과의 협조관계를 조성하기 위한 원칙으로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지휘지침을 내렸다.

중대기지 주변 부락과 소통협력

필자는 남북연결 철도와 6B도로로부터 100m에 근접한 31m 고지에 구축된 기지의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중대기지는 주변의 높은 산들로부터 감제당하는 위치이고 주민 부락과는 500여m 거리였다.
중대원 180명은 모두가 20대 초반으로 한 집안의 귀중한 자식이자 나름대로 꿈과 희망을 갖고 참전한 용사들이었다. 이 때문에 중대장으로서 작전출동이나 정신교육 시간을 통해 단 한명의 장병도 월남땅에서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지휘하기로

다짐했다. 이를 위해 평소 강훈을 통해 전투력을 강화하면서 인근부락의 이장과 노인 등 유지들과 긴밀히 접촉하여 초등학교 2개교에 학용품을 지원하고 졸업식 행사에도 참석, 축하해 주었다.
당시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지방 베트콩(VC)들은 이곳 지역출신으로 낮에는 산중에 은신했다가 밤이면 부락으로 내려와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그들이 부과한 세금을 징수해 가고 있었다. 부락민들은 어쩔 수 없이 월남정부의 세금은 못 내도 베트콩들이 부과한 세금만은 반드시 납부했다. 만약 세금을 내지 않으면 서슴없이 사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역 실정을 파악함으로써 주민들과의 소통과 대화가 작전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단 한명 전사자 없이 중대장 임무수행

참전 병사들 가운데 보병대대 이하급 부대원들은 거의 고졸 이하의 학력이었지만 철저한 교육훈련으로 부여된 임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했다.

반면에 일부 몰지각한 간부들은 무리하게 전공을 세우기 위해 부대를 마구 지휘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필자는 월남땅을 지켜주기 위해 파병된 한국군으로서는 “우선 내가 살고 적을 격퇴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늘 강조했다. 이 때문에 교체병력을 포함하여 400여명의 중대원 가운데 단 한명의 전사자도 없이 중대장 임무를 마칠 수 있었다.

▲ 필자 박민식 장군

월남전 참전 장병은 누적 32만명으로 집계되지만 파월 성과는 일일이 설명하기가 어려울 만큼 막대하다고 생각한다. 참전 경험으로 한국군의 전투력이 향상된 것은 물론이고 장병들의 국내송금, 전쟁 특수산업효과 등 최소한 10억3천만 달러에 달한다는 계산이다.
파월 50주년을 보내면서 이제 노병(老兵)의 처지에서 참전 전우들이 우리의 국토방위와 경제발전에 기여한 다각적인 공적이 새롭게 정리, 조명되고 기록을 보존·계승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감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2호 (2014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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