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 273기 건설을 향한 일념

▲ 세계 최대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고 있는 중국 광동성 양지앙(Yangjang) 원 자력발전소 6호기 건설현장.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북쪽의 러시아, 서쪽의 중국, 동쪽의 일본, 태평양을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모두 강대국이자 원자력 기술 보유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번호에는 지난 9월호의 ‘일본의 원자력’에 이어 ‘중국의 원자력’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의 원자력개발은 일본과 달리 실상이 대부분이 공개되지 않아, 지금까지 발표 된 ‘중국 원자력발전 중장기발전계획’ 등을 정리한 서적 등을 통하여 그 윤곽을 파악하였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에 필자의 경험을 더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원자력연구 회고 ③]

중국, 원자력강국의 꿈
원자력발전소 273기 건설을 향한 일념

글/ 한필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60년 전 핵무기개발부터 시작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미군을 포함한 UN군의 참전이 확실해지자,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세력의 중국 진입을 우려하며 궁여지책으로 중국군의 대량희생을 각오하고 한국전에 참전한다. 당시 중국군은 최첨단무기는커녕 원시적인 무기인 수류탄과 도저히 무기라고 할 수 없는 꽹과리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인해전술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 양상이 달라지자, 미국은 한국전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기위해 맥아더장군이 ‘중국 본토 핵위협’을 하였고, 이에 더하여 한국전 외에도 국민당과의 전쟁 등에서 3차례나 더 핵무기로 중국을 위협하였다. 그러자 중국은 핵무기 기술이 자국 방위의 핵심이라 판단하고, 자체적으로 핵무기 기술 보유를 결심하게 된다.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은 소위 ‘죽(竹)의 장막’을 펼치고, 미국의 핵무기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쟁의 결정타가 아니라면서 육군에 의한 점령이 있어야 최종적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기술 역량을 집중하여 다각도로 핵무기개발과 원자력발전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일관된 ‘원자력정책’과 ‘약 40만 명의 인재’

지난 60여 년 동안 중국은 원자력기술을 자체 보유하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쏟아 부어왔다. 핵무기 개발과 원전 기술 개발을 위해 고비사막을 비롯, 수 억 평의 연구 및 실증 시설을 확보하였고, 원자력을 이용한 무기개발을 위하여 5만 여명, 평화적인 원자력이용을 위한 기초연구에 35만 여명, 총 약 40만 명의 원자력 연구 및 연구지원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규모 인재양성을 위해 주요 대학의 원자력공학과 확대는 물론, 원자력중등전문학교, 기술전문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이들 중 칭화(淸華)대학, 베이징(北京)대학, 상하이(上海)교통대학 등 다수의 대학과 연구소에서는 원자력에 관한 실험적 데이터인 핵데이터를 생산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원자력개발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위해 재원확보를 목적으로 중국군 170만 명을 감축하기까지 했다.

중국군 170만명 대신할 최신군사기술 개발

마오쩌둥 시절부터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국군 현대화의 가시적인 성과로 중국군 170만명 감축을 꼽을 수 있다. 1985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군 100만명을 감축한데 이어, 1997년 짱쩌민(江澤民)은 50만명 감축을 단행하였다. 게다가 장쩌민은 2003년 후진타오(胡錦濤)국가주석의 취임에 앞서 20만명 병력감축을 공표했다. (감축 후에도 세계최대인 약 250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병력감축의 목적으로 내세우는 ‘군사지출의 중점적이고 효율적인 사용’은 병력 170만명을 대신할 수 있는 최신 군사기술 개발을 의미한다. 그 일환으로 자국의 힘을 유지함과 동시에 에너지원으로도 유용한 원자력개발은 필수불가결한 국가 생존전략으로 삼고 있다.
중국 원자력개발 과정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원자탄을 시작으로 수소탄의 개발 및 핵잠수함 개발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축적된 기술을 토대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한 미국의 선례를 답습한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전략을 취하게 된 것은 미국의 원자력개발 과정을 답습함으로써 기술적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핵잠수함까지 만들어낸 중국은 처음으로 자주 설계한 원자력발전소 건설에서 기술력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데, 이는 매우 복잡한 기술의 결정체인 원자력발전소가 무기 개발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 중국의 핵개발시설과 연구시설의 규모

한국 원전기술에도 구애의 손짓

원자력에 관한 최신 병기를 다 갖추고 있는 ‘원자력강국 중국’은 자력으로 원자력발전소를 설계한 한국의 원자력기술에 탐욕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천명 남짓한 연구 인력과 중국의 수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적은 예산으로도 짧은 기간에 원전기술 자립을 이룩하였다. 한국의 원전기술자립 성공은 한국인의 저력을 가장 잘 드러낸 사례라 할 것이다. 한국의 원전기술 자립 성공을 지켜 본 중국은 미국 등 원자력선진국을 벤치마킹하고 있던 전략과 동시에 한국과의 협력을 시도하게 된다. 필자가 경험한 중국의 구애 행동은 다음과 같다.
1987년에 제6차 태평양연안국원자력회의(PBNC)가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한국 대표단으로 중국을 방문한 필자는 그 당시에는 중국의 일관된 원자력개발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에서는 1986년 12월부터 시작된 원자력발전소의 핵심기술인 ‘핵증기공급계통(NSSS)기술 자립’을 위한 노력이 그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가 기술 자립에 성공한 이유는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기술개발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본격적인 원전 기술개발을 추진하려던 1980년대는 미국 TMI 사고의 여파로 많은 원전공급회사들이 일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수요자중심의 시장이 형성되었던 시절이었고, 그 유일한 일감을 한국이 가지고 있었다. 이 기회를 백분 활용하여 한국은 미국과 공동설계(Joint Design)라는 세계 최초의 방식으로 기술자립을 추진한 것이다. 당시 한국의 한국원자력연구소와 미국의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사는 공동설계(Joint Design) 계약을 맺었고, 한국원자력연구소 과학기술자들의 피땀서린 노력으로 원자력발전소를 자력으로 건설할 수 있는 핵심기술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아직도 의문스러운 것은 당시 중국이 어떻게 한국의 원자력발전 기술자립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까? 이다. 어쨌든 중국은 이러한 한국의 원전기술 자립 과정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1987년 PBNC회의 참석을 위하여 베이징을 방문한 한국 대표단에게 진산(秦山, Qinshan) 원전 부지를 시찰시켜주는 등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당시 중국의 원자력발전 관계자들은 고민을 털어 놓으며 한국과의 협조 의사를 밝혔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91년 필자가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중국의 내심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이 최초로 자체기술로 건설을 시도한 원자력발전소인 300MWe급 진산(秦山, Qinshan) 1호기(PWR)는 1985년 착공하였으나 완전한 기술 자립에 이르지 못하였다. 필자가 중국 측의 안내를 받아 진산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을 방문하였을 때의 솔직한 소감을 말하자면 ‘중국은 원자력발전 기술 자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나라’였다.
이 방문에서 필자는 중국원자력운행연구소(核動力運行硏究所, Research Institute of Nuclear Power Operation)의 소장으로부터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로부터 NSSS기술을 전수 받고 싶다.”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는 필자에게 선진 원자력기술에 대한 열망이 담긴 중국원자력역사 서적을 건네며 우리와의 협력을 소원했다.
원자력발전 기술에 대한 중국의 갈증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1차적으로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 박대영 박사팀의 비파괴시험(NDT)기술을 중국에 전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후에 미국으로부터 “적대국가에 원자력발전 기술을 전수할 수 없다.”는 항의를 받은 후 더 이상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중국의 원전기술 개발, 한국전략 닮아

중국은 진산 원자력발전소 건설에서 고배를 맛보았지만 거대한 중국 대륙에 안정적인 전원을 공급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국은 자국 기술 확보를 위해 한국과 유사한 전략을 펼쳤다. 그 첫 번째가 진산 원자력발전소에 뒤이은 다이아베이(大亞灣, Daya-Bay)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에 미국의 원자로가 아닌 프랑스 프라마톰사(Framatom)의 1000MWe급 경수로(PWR)를 도입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다양한 원자로를 도입하여, 중국은 경수로(PWR)이외에도 중수로, 고온가스로 등 다양한 노형 보유국이 되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미국 웨스팅하우스(WH)의 경수로(PWR), 프랑스 프라마톰의 PWR, 캐나다AECL의 중수로(PHWR, CANDU)를 도입하여 공급자 간 경쟁을 통해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냄으로써 기술력을 향상시켰던 방식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이나 정치인들은 다양한 원자로 도입에 대하여 ‘원전 잡화상이 된 대한민국’이라고 표현하며 비판했지만, 필자는 오히려 특정 외국 회사 일변도로 나갔으면 오늘날의 기술자립은 불가능했다고 본다.

원자력발전소 273기로 ‘원자력강국의 꿈’

중국 원자력개발에서 눈여겨 볼 점은 중국 국내의 시장 환경이다. 일본의 테피아종합연구소(대표 劉炳義, 1985년 중국정부 파견 유학생으로 일본 유학)에서 발간한 ‘2012 중국원자력 핸드북’에 의하면, 중국은 2012년 11월말 기준으로 15기의 원자력발전소를 운영 중이고, 26기를 건설 중이며, 향후 총 232기의 원전을 건설할 계획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대로라면 총 273기의 원자력발전소가 중국에서 운영되게 되어 설비용량이 약 2억 8,000만 ㎾에 달하게 될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운영 중인 원자력발전소가 426기, 약 3억 8,600만 ㎾인 것을 감안하면 세계 원전시장이 중국 주도로 재편될 것임은 뻔하다. 중국은 국내의 강력한 구매력을 내세워 선진국들로부터 기술을 흡수 할 것이고, 흔들림 없는 정책을 내세워 세계 제1위의 ‘원자력강국’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렇듯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원자력’과 ‘한국의 원자력 기술 자립 역사’를 보면서 隔世之感을 느낀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참패가 대한민국서 재연

중국은 4차례에 걸친 미국의 핵위협을 받으면서 원자력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지난 60여 년 동안 일관된 원자력개발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 결과는 최근 중국과 주변국들 사이의 영토분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핵잠수함 등을 포함한 군사기술을 갖춘 아시아의 大國이 원자력발전소 건설로 에너지자원 확보까지 손아귀에 거머쥐면서, 태평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에 반해 현재 대한민국은 원자력 분야뿐만이 아닌, 각개각층에 만연하고 있는 부정부패로 최대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마치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했던 1949년이 재현되는 듯하다. 당시 강대국인 미국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장제스(蔣介石)이 이끄는 국민당이 패배했던 이유는 개인의 사리사욕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미국의 원조 물자마저도 공산당에 팔아버리는 간부들의 부패였다. 결국 보잘 것 없는 무기로 무장한 마오쩌둥의 공산군에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는데, 이는 분단국인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크다. 불쌍한 북한 주민들을 지배하고 있는 북한의 지배층은 경제력에서 남한에 한참 뒤처지지만, 본인들의 정권유지를 위한 군사력 팽창에 ‘남한의 부패’를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 필자는 이 점이 심히 우려된다.
중국의 원자력개발은 일관된 정책, 인재 육성 이외에도 유리한 조건에 놓여있다. 그 중 하나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이기 때문에 핵비확산 문제에서도 자유로워 미국 등 원전 공급국의 간섭 없이 자유로운 환경에게 연구개발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인도 여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입장을 번복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5공 비리 문제로 한국의 원자력 기술 자립을 의심했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한국형 원전이 공식화되자 필자에게 오히려 한국형 원전의 중국 건설 가능성을 문의하기도 했다.

한국의 정치인, 원자력기술자립을 의심

한국형 경수로 기술이 확보되었을 당시 중국은 우리나라가 단기간 동안 한정 된 인력과 예산이라는 장해물을 뛰어넘어 ‘원자력기술자립’을 이룩했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그와 달리 국내에서는 ‘한국형 경수로’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가 하면 ‘5공 비리’조사 대상에 영광 3, 4호기 입찰 사업을 포함시켜 필자를 비롯한 연구원 간부들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자로써 국가 발전에 사명감으로 기술자립 사업을 추진했기에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었지만, 필자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지난 시기인 1990년에 필자는 야당인 평화민주당의 허 의원의 초대를 받아 63빌딩에 있는 중국음식점에서 워싱턴타임즈의 박보희 전 사장을 만난 적이 있다.
필자를 초대한 평민당의 허 의원은, 경제과학위원회의 유준상 위원을 필두로 같은 당의 조희철 의원, 민주당의 황병태 의원 등과 함께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만 3년간에 걸쳐, 5공비리 척결 조사대상으로 원전 11, 12호기(영광 3, 4호기) 입찰사업에 필자를 포함한 KAERI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비리 적발을 시도한 사람이다. 그런 인연으로 맺어진 허 의원의 초대였기에 약속장소인 여의도 63빌딩으로 향하는 내내 초대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두 분은 1990년 당시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에서 시작하려는 사업에 대해 상의하고 싶다며,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이 개발한 원자력 기술로 중국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여 중국 내에서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필자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5공비리 수사로 무고한 KAERI연구원들이 검찰에 드나들며 조사를 받았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3년에 걸쳐 진행된 수사가 무혐의로 마무리 된 시점에서 당시 수사를 의뢰했던 야당 의원이 이제는 우리의 기술을 인정하며 ‘중국 진출’을 제안하고 있었다. 필자 입장에서는 자발적으로 한국원자력연구원의 후원자가 되어 준 것은 고마웠으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치인들의 말 한마디에 원자력 정책이 휘둘린다는 생각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그들이 우리가 이루어낸 ‘원자력발전 기술자립’의 진정한 의미가 개인이나 한 기관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에너지 자립’ 나아가 ‘진정한 독립국’의 필수 조건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먼저 자리를 떠나야했다.

원자력기술자립, ‘국가성장의 동력원’으로

필자가 팔순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국가 원자력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유는, 필자가 17살 때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북한 공산사회로부터 벗어나, 남한에서 축복 받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보답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이대로 가다가는 중국 국민당과 똑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다.
개인이나 소속기관 및 정당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은 없어야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원자력기술 개발 시에 느꼈던 내부적 어려움에 대한 자세한 일화는 다음 회에 소개하도록 하고, 과거 한국의 원전기술자립 사례와 현재 중국의 원자력이 어떻게 발전(發展)하여 왔는지를 바탕으로 향후 한국의 발전방향을 제언하고자 한다.
중국은 불과 30여 년 전까지 만해도 한국의 원전 기술 자립을 부러워하는 기술 개발 추격국가였다. 그러나 일관된 정책 추진과 과학기술 인력의 우대라는 국가의 파격적인 지원과 광대한 자국 시장을 활용하여 원자력 기술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발전시키고 있다. 더군다나 다른 나라의 간섭 없이 소신껏 연구개발을 추진할 수 있으니 연구 효율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30여 년 전 우리 원자력 과학자들이 소위 원자력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이룰 수 없는 기술자립을 목숨을 걸고 완수할 각오로 ‘만세삼창’을 외치며 ‘원전기술자립’을 위해 태평양을 건널 당시, 정부는 전면에 나서서 지원할 수 없는 상태였고 산업체에는 선진 원자력기술을 완전히 습득할 인재가 없었다. 다행히 정부와 산업체의 부족한 부분을 지원할 능력이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있었고, 소수의 원자력 과학기술자들은 국가 발전이라는 사명감으로 뭉쳐 원전기술자립이라는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원자력정책은 오락가락하고 있고, 원자력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마저도 미미하다. 반면 한전, 한수원 등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산업체의 입김은 점점 세지고 있다.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미래부의 원자력 담당조직은 과거 원자력청에서 현재 1.5개과 수준으로 작아졌으나, 산업부의 원자력 담당조직은 1국 3과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원자력연구개발기금은 10년 전이나 대동소이하고, 연구자들의 복지혜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로 인해 원자력 과학기술자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진 상태이다.
이래서는 원자력이 더 이상 국가의 성장동력원으로 자라날 수가 없다. 한국이 원전기술자립을 추진하면서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이를 성공적으로

▲ '현대중국의 원자력산업’ - 필자가 1991년 중국원자력운행연구소소장에게 받은 서적

달성한 것은 바로 원자력 과학기술자들 즉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연구자들이 사명감과 애국심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정부로부터 지원도 거의 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대신 정부는 원자력연구개발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오롯이 과학기술자에게 맡겨두었기 때문에 개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소명감이 합쳐져서 기술자립이라는 위대한 성과를 낸 것이다.
중국의 원자력 과학기술자에 대한 우대 정책과 우리나라의 원전기술자립 성공사례를 볼 때, 지금부터라도 원자력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연구개발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과학기술자들 스스로에게 국가적 과업을 맡긴다면 또다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다음 호에서는 ‘溫故知新’의 마음으로 1980년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우리나라의 과학자들이 ‘원자력 기술자립’이라는 비젼 아래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으며, 지난날의 영광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해보고자 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2호 (2014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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