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여 야자수 그늘 꿈꾸며 편히

월남전 참전 ‘소대장 수첩’
머나먼 쏭바강에 노을이…
전우여 야자수 그늘 꿈꾸며 편히


글/ 金武一 (김무일 해병대 대위전역, 전 현대제철 부회장)

‘하얀전쟁’, ‘무기의 그늘’등 배경무대

‘쏭바江’은 오늘도 베트남 남부의 중요 요충지이며 ‘푸옌’省 省都인 ‘뚜이호아(Tuy hoa)’市의 외곽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쏭 (song)’은 월남語로 江이란 뜻이고 ‘ba’는 어머니란 뜻으로 굳이 풀이를 한다면 ‘어머니의 江’이 되겠다. 이 江은 西쪽 국경지대인 ‘캄보디아’ 안남 산맥에서 발원하여 ‘뚜이호아’ 평야의 곡창지대를 지나 동지나海로 합류하는 이 지역의 젖줄 이기도하다.
이곳은 베트남戰 참전 초기에 한국군의 선봉부대였던 청룡여단이 주둔하며 평정 하던中에, 뒤이어 참전한 백마부대 28연대에게 인계한 지역으로, 비록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한국군과의 인연이 꽤 깊은 곳이다. 그리고 또 이곳은 십자성부대와 제1 이동 외과 병원, 미 제 5공군 전술 비행단이 주둔했던 전초기지로, 월남戰을 주제로 한 소설가 박영한씨의 참전 실록 ‘머나먼 쏭바江’의 배경 무대이기도 하다.
이 문학작품은 당시 우리나라의 전쟁문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와 출간 하던 그해에 ‘오늘의 작가賞’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하였다. 이어서 안정효씨의 ‘하얀전쟁’과 황석영씨의 ‘武器의 그늘’, 김창동씨의 ‘순간에서 영원으로’等이 그 뒤를 이었고, 同名의 드라마와 영화가 속출하여 선풍을 일으켰었다.
수입 영화로는 ‘플래튼(Platoon.)’과 ‘디어 헌터(Deer hunter.)’, ‘지옥의 묵시록’等이 기억을 새롭게 한다.

미국정부에 한국군 파병의향 전달하시오

지금부터 꼭 50년 전인 1964년, 한국전쟁의 폐허와 후유증에 시달리길 겨우 10년째인 한국의 안보상태는 극도로 불안 했었고, 나라 경제측면에서 볼 때 연간 수출 총액이라고 해봐야 고작 1억달러(금년도 수출 목표액 $5955억)를 밑돌 정도로 보잘 것 없었다. 당시 국민소득(GNP)은 1인당 겨우 76달러(지난해 $26200)로 북한의 135달러에 비해 한참을 못 미쳐 대다수의 서민들은 하루 세끼 끼니조차 찾아 먹기 힘들던 시기였었다.
그해 봄, 당시 주미 한국대사는 김정렬씨였다. 주 독일대사 최덕신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김정렬에게 전달코자 비밀리에 워싱턴을 방문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미국 정부 요인들을 접촉, 越南(베트남) 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한국군을 파견할 의향이 있음을 전달하시오..!.” 당시 국내·외 사정으로 비춰볼 때 이 제안은 상당히 위험한 선택이어서 밀봉을 개봉한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이때가 바로 韓日회담 반대 시위의 절정기로,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던 그 시점이었다. 대내적으로는 63년부터 시작된 학생들과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대규모 시위로 정국이 혼란에 휩싸였었고, 대외적으로는 전쟁 당사국인 미국조차도 탐탁찮은 반응을 보이고 있던 월남전 참전을 한국이 자발적으로 파병 하려 했던 것이다. 비밀은 없었다. 마침내 국내·외 여론은 마치 풀섶에 기름을 부은 듯 들끓기 시작 했다.

비전투 ‘비둘기부대’ 나트랑에 둥지

대통령은 이럴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이런 무모한 모험을 자청 하였을까..?. 그 이유는 세가지였다. 첫째는, 만일 베트남이 공산화 될 경우에 동남아와 한국의 안보도 동시에 위협을 받을 것이 분명하였고, 두 번째는 이 시점에서 미국이 베트남戰을 빌미로 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베트남전선으로 전환 배치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막으려는 고도의 술수였으며, 끝으로 어찌해서든지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의지였었다.
역사적인 베트남 파병은 이렇듯 미국이 아닌 우리 대통령의 비밀스럽고 전략적인 주도로 시작되어, 베트남戰이 확전(擴戰)으로 치닫던 同年 7월15일, 국회에 파병 동의안이 제출돼 많은 논란 끝에 가결되었고, 9월 11일, 한국 해군의 상륙함(LST)은 부산항을 출발하여 베트남으로 向한다. 함선에는 군의관 위주의 제1 이동 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等. 비 전투원140명이 처음으로 파월됐고, 이듬해인 1965년 1월 9일에는 閣議의 결정에 따라 2천여명의 야전 공병부대와 수송부대가 결성 준비를 서두른다.
이번 결정은 전번과 달리 베트남과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결정으로 이 군사원조단은 전쟁 복구사업을 위한 非 전투 공병부대와 자체 경비병력으로 이루어졌다. 이 부대는 그해 1월 26일, 국회에서 파병 동의안이 가결되고 2월 5일에 결단, 2월 25일에는 제 1진 선발대가 사이공에 도착 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인 3월 22일에 ‘한국 군사 원조단’ 본대가 파병하여 ‘나트랑(Natrang.)’에 둥지를 튼다. 이 부대의 단대호는 ‘비둘기 부대’로 命名 된다.
문제는 전투부대의 파병이었다. ‘비둘기 부대’의 파병에 이어 베트남 정부는 또다시 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해 왔다. 이에 우리정부는 1965년 7월 2일, ‘한국전쟁 당시 우방의 파병에 보답 한다.’는 명분으로 정부는 국무회의 에서 ‘국군 1개 전투사단과 이에 필요한 지원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하기로 의결했다.

▲ 강화부대 전방 중대장 시절의 필자.

그리고 이 파병안은 동년 8월 13일, 천신만고 끝에 최대의 고비였던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1965년, 해병 청룡부대 깜낭항 상륙

드디어 파병이다.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에 큰 획을 긋던 1965년 10월 9일, 해병대 청룡부대가 잠시도 포성이 그치질 않는 ‘깜낭항'에 상륙했다. 건군 이래 첫 전투부대의 해외 파병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이어서 10월 23일, 30만명 인파의 거국적인 환송을 받으며 육군 맹호부대 본진이 본격적인 파월의 막을 올려 ‘깜낭항’에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이처럼 한국군 전투부대가 대거 베트남에 파병되고 그 활약상이 국제사회에 알려져 국위를 높이 선양하게 되자 점차 한국군 증파의 필요성이 인정 되었으며, 1966년 2월 22일, 험프리 미국 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또다시 한국군 1개 보병연대와 이를 지원하는 지원부대의 증파를 요청받게 되었다. 이에 국회 본 회의는 여·야간의 많은 논란 끝에 동년 3월 20일 증파안을 가결했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16일 ‘혜산진 부대’가 ‘깜낭항’에 상륙하여 맹호부대와 합류함으로서, 증강 전투사단으로 재편성 되었고, 이듬해인 1966년 9월 22일, 육군 백마부대가 추가로 베트남戰에 합세함으로써 주월 한국군의 수효는 4만 5천여명의 군단급 규모로 미국 다음 가는 파병국이 되었다.
이로써 첫 파병인 1964년 7월 18일 부터 1973년 3월 23일 까지 8년 8개월 6일동안 연인원 32만5715명의 국군장병이 베트남 전선에 투입됐다. 이들은 이 기간 동안에 1만여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여회의 소규모 작전을 펼쳐, 4만2천여명의 공산 베트콩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65년 5월, 당시 미국 존슨 대통령과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 했다고 미국 ‘CIA 리포트’는 적고 있다. “한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한국정부 몰래 유엔군을 철수 시키려는 의도가 없길 바란다. 만일 이를 어긴다면 베트남에 대한 우리의 모든 협조는 그 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이 얼마나 당당하고 결연한 소신이었던가..?.

박정희 대통령의 ‘국방과 경제’

박 대통령은 1967년, 大田 유세에서 전투부대의 파병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역설 하였다. ‘굳이 안 보내려면 안 보낼 수도 있었다. 만일 그리됐다면 아마도 美국방성은 능히 주한 미군을 철수시켜 베트남 전선으로 이동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의 155마일 휴전선은 과연 우리의 독자적인 힘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고 보는가..?.’ 라며 야당의 정치적 공세에 맞서곤 하였다.
이 시점에서 주월 한국군의 파병은 대한민국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박 대통령의 ‘국방과 경제’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포석 이었다. 실제로 1964년부터 1973년 까지 한국군의 베트남戰 참전 기간에 해외 전투수당은 총 2억3556만 달러나 됐다. 이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됐다.
더욱이 경제적 효과로서는 무역수지 2억1060만 달러, 무역외 수지 8억2000만 달러와 미국의 국군 현대화 지원(M16 자동소총과 팬텀 전투기等 첨단무기 제공.) 15억 달러, 기타 유,무상 차관 도입 43억 달러等 68억7천만 달러가 우리땅에 들어 왔다. 이 금액은 당시로선 엄청난 금액으로, 정부는 이 돈으로 박 대통령의 숙원 사업이었던 경부 고속도로 428Km를 개통했고, 이때부터 정부는 제반 경제개발 사업에 자신감을 갖고 박차를 加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현대건설, 한진상사, 대우실업을 비롯한 80여개의 한국 기업들은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을 통해 베트남戰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예컨대 주월 한국군에게 필요한 물자와 용역을 국내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베트남으로의 수출이 급증했다. 아울러 미국의 군사 원조와 이들의 송금에 힘입어 당시의 내수 산업과 수출은 호황기에 접어든다. 한국군과 베트남 파견 근로자가 받는 봉급과 현지 한국기업의 사업 수익, 그리고 군사원조等 직·간접 효과까지 합친다면 거의 100억 달라 (당시 년간 수출 총액의 100배)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인 셈이다.
이 금액은 당시 우리의 반만년 역사에 고질이었던 가난을 탈피하는 종자돈인 동시에, 제 2,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 재원이 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군 파월 직전인 1964년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GMP)은 위에 기술한바와 같이 불과 76 달러에 불과했었지만, 10년후 파월군의 철수가 완료된 1974년 3월엔 무려 일곱배가 넘는 545달러였었다.

▲ 주월한국군 부대기에 대통령 표창수치를 달아주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월남에서 돌아온 멋쟁이 김상사’

50년 前의 ‘월남’이란 이 단어는 당시,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일종의 ‘코드(Code).’였었다. 이역만리 월남땅에서 피와 땀을 흘리고 살아서 돌아오는 이들을 환영하는 분위기는 온 누리에 가득했다.
아울러 원조를 받던 보잘 것 없던 나라가 연합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자유우방의 반열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던 국군의 늠름한 모습은 대견 하기까지 했었다.
부수적으로 이들이 死線을 넘어 무사히 귀국하면서 함께 반입한 여러가지 가전제품과 문화용품들은 가난에 찌들었던 살림살이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어, 도심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산간벽지에 까지 보급된 T.V.와 냉장고, 선풍기等은 당시 문화생활에 커다란 변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겉멋에 겨운 고등룸펜들은 양담배를 폼 나게 꼬나물고 다방엘 드나들었고, 다방 마다 신중현이 작곡하고 김추자가 노래한 ‘월남에서 돌아온 멋쟁이 김상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가 하면 가수 오기택의 ‘월남에 달밤’이 극장 입구 확성기 마다 울려퍼져 관객들을 호객했고, 학교 운동장에선 ‘청룡은 간다,’, ‘맹호부대 용사들아,’, ‘백마의 노래,’等 행진곡 風의 군가가 학생들의 애창곡 이었다. 도심의 번화가에 한동안 ‘월남치마’가 유행하며 휩쓸더니 초상집 밤샘에서 으레히 등장한 ‘월남 뽕’이란 화투가 생겨난 때도 바로 이때 였었다.
이후 정부주도의 성공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화학 공업 육성, 더 나아가 88년도 올림픽 유치로 이어진 국위선양과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오늘날 한국은 대망의 세계 10대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렇듯 굳건한 토대를 구축했을까..?. 이는 아마도 60년대 초반의 독일광부와 간호부의 파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이국전선에 뛰어든 파월 장병의 용기, 그리고 월남特需가 끝날 무렵 박 대통령의 또 하나에 용단인 중동진출에서 그 答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베트남戰 파병은 이 나라 ‘번영과 터전’을 만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피와 희생이 따랐다. 무려 5,099명의 젊은 장병들이 이역만리에서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었고, 17,232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5만여명의 老兵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이중에 중증 참전용사들이 아직도 국군 통합병원 병상에서 고통의 나날을 지새우는 현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될 것이다.
그러면 이렇듯 굳건한 국가 경제의 초석에 몸 바친 이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역사에 무지한 오늘의 위정자들은 0세부터 네살배기 유아들의 양육비조로 월22만원부터 34만원의 복지를 선심 쓰듯 지원한다.
반면에 한 평생을 병고와 참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참전 유공자들에겐 지난해까지 고작 월 15만원을 마치 동냥이나 하듯 던져주면서 생계비로 보태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지난날 각종 불법 시위를 주도하며 사회를 혼란케 한 사이비 민주투사 들에게 이미 수천만원을 아낌없이 보상했고, 뚱딴지같은 세월호 정치 코미디에 놀아나 수억원을 보상하려 하면서도 나라를 세우며 피, 땀 흘려 지켜낸 한국전쟁 참전 건국세대나,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던 월남전 참전세대에겐 1년에 고작 1만원 인상을 그렇게도 아까워하는 이런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미 부시대통령 자서전의 ‘결정적 순간들’

‘역사는 과거의 것으로 현재를 만들고,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오늘을 살며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조지 W 부시’ 前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 ‘결정적 순간들.(Decision Points.)’의 첫 장에 등장하는 문구다.
그의 국가 운영 정책과 외교정책을 지지했던 반대했던 한 국가의 首長이 중요한 외교정책을 어떻게 결정하고 추진하는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되새겨 봄직하여 꼼꼼히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인상적 이었던 것은 ‘부시’가 임기 중에 만난 군인들과 그들의 ‘애국심’이었다.
그는 2007년 벽두에 ‘피트 페이스’대장을 합참의장으로 발탁했다. ‘페이스’대장은 초급장교시절 베트남戰에 소총소대장으로 참전했었다. 그의 소대원들은 베트남戰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부터 합참의장에 임명받고 백악관에서 신고식을 하면서, 베트남에서 전사한 부하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임기를 끝낸 그는 전역하던 날, 40여년前에 베트남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옛 부하들이 잠들고 있는 ‘베트남戰 기념관’을 찾았다. 그리고 별 4개가 달린 자신의 계급장을 조용히 내려놓고 떠났다. 후에 그곳에서 발견된 그의 방명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언제나 씩씩했던 ‘Gido Parnago’에게..!. USMC (美 해병대). 이 별은 결코 나의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이다.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을 이곳에 남긴다. 당신의 옛 소대장. 피트 페이스.”.

미국민들 군인정신에 최고의 경의표시

또 ‘부시’는 2008년 봄, ‘이라크’주둔 다국적군 사령관으로 ‘Leo Odierno.’장군을 임명한다.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장군 후임으로 선임된 그는 백악관 ‘오벌 오피스(대통령 접견실)’에서 대통령을 만났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아들 ‘앤서니 오디에르노’가 동행했다. ‘앤서니’는 한쪽팔이 없었다. 美 육군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뒤 ‘이라크’戰에 참전해 오른팔을 잃은 그는, 남아있는 왼쪽 손으로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부시는 ‘오디에르노’ 장군은 ‘팔 없는 아들’의 모습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미국은 9.11 테러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2개의 전쟁을 힘겹게 치르고 있었다. 예상외로 전쟁이 길어지고 희생자가 늘어가자 국내에선 반전 여론이 들끓었고, 의회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졌다. 국제적으로도 러시아, 중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이태리 같은 서구 국가들 까지도 미국에 비판적이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사면초가나 마찬가지였다.

▲ 서해 도서부대 소대장 시절.

이렇듯 어려운 국가적 난국에서 미국이 끝까지 버틸수 있었던 힘은 과연 무었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군인들의 애국심 이었다. 미국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들과 우수한 장교들, 그리고 경험많고 노련한 부사관들과 생기발랄한 청년들이 모인 軍이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직업군인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신을 가진 애국자 들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 국민들은 군인들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지난 10월 10일(현지시각), 美 'us air way 항공사'에 탑승한 '엘버트 마를' 美 육군상사는 여러개의 훈장이 부착되어 있는 자신의 군복 상의가 구겨질것을 우려해 옷장에 보관해 줄것을 女승무원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승무원은 '옷장은 일등석用'이라며 냉정히 거절한다. '마를'상사는 '이코노미席'이었다. 이를 본 주변 승객들이 흥분해 들고 일어나 그 승무원을 나무랐고, 커튼 넘어 일등석까지 이 소동이 전해졌다. 여러명의 일등석 승객들이 앞을 다퉈 자리를 양보했으나 '마를'상사는 정중히 사양했다. 한승객이 '국가를 위한 봉사'에 감사 한다며 군복을 자신의 옷장에 자신의 옷 대신 보관했다. 그 이튿날 항공사 대표는 즉각 A4용지 15장 분량의 사과문을 미국 전역의 일간지에 게재하고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 지난 여름,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무사히 파견근무를 끝내고 '샌디아고'기지로 원대복귀하던 美 해병대원 13명이 뜻밖에도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돼 어리둥절 했다. 알고보니 美 'A A 항공사' 창구의 말단 여직원이 자기의 재량으로 잔여 일등석 여섯자리를 해병대원들에게 제공하자, 이를 목격한 기존에 매표를 끝낸 일등석 승객 7명이 일제히 자신들의 좌석을 이들에게 양보 했다는 보도를 읽었다. 우리는 이렇듯 아름답고 부러운 광경을 언제나 볼수 있을까..?.
필자가 얼마 전 해외출장 중에 ‘아프가니스탄’, ‘타슈켄트’공항에 환승차 잠시 대합실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복잡하고 비좁은 대합실에 미국인들로 짐작되는 여러 가족들과 아이들이 뒤섞여 장난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어린아이가 출입구를 향해 부동자세를 취하며 경례를 하니 나머지 아이들도 하던 장난을 멈추고 일제히 그쪽을 향해 거수경례를 한다. 이어서 주변의 젊은 부부들도 합세하여 힘찬 박수를 보낸다.
그 출입구 쪽엔 방금 착륙한 일단의 미군병력이 완전무장 차림으로 우리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초선의원이 백발의 국방장관에 삿대질

요즈음 한국군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선은 어떠한가..?. 군인들의 사소한 병영문제가 온통 뉴스를 장식한다. 참모총장이 손바닥만한 부동산 문제로 파직을 당하는가 하면, 국회의원 같지도 않은 새파란 비례대표출신 초선의원이 일부러 병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 쪼가리를 걸치고 나와, 백발이 성성한 국방장관에게 탁자를 두드리며 삿대질을 한다. 반면에 전방을 책임지던 4성의 야전군 사령관이 만취해 하루저녁에 술주정뱅이로 전락하는 모습들을 보고 참으로 우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서, 그것도 상대가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집단인 이 나라에서, 희생된 옛 부하들을 40여년동안 기리며 제 모든 명예를 그들에게 바치는 지휘관 한명을 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팔 없는 아들을 데리고 청와대에 가서 자랑스럽게 신고하는 장군 한명을 보는 게 한낱 꿈 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할런가..?.
문득 ‘쏭바江’에 드리우는 저녁노을을 눈앞에 그려본다. 그리고 江물처럼 덧없이 흘러간 젊음을 돌이켜 본다.
50년 세월이 흘렀다. 江山이 바뀌길 어언 다섯차례... ‘츄라이’와 ‘호이안’전선에서 마주쳤던 피난민 군상들...
청룡부대 이웃 학교에서 함께 뛰어놀던 천진난만한 아이들... 그리고 ‘따이한’을 연호하며 우리말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던 여학생들... 모두들 그리운 얼굴 들이다.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 했을까..?.
저 만치 가을이 온다. 동작동 현충원에 단풍이 물들때 마다 매년 그랬듯이 스무개의 꽃송이를 준비하여 그곳에 잠든 소대원들을 찾아 봐야겠다. 김국조 하사, 김한성 하사, 김정남 병장, 황종만 상병 等 유명을 달리한 주월 청룡부대 수색중대 제 1소대의 용감했던 옛 소대원들... 그리고 함께 생사를 함께했던 신종칠 중대장, 은명수 중대장, 지순하 중대장, 그리고 동기생 김승진 중위, 이수장 중위, 한 장석 중위...
‘야자수 그늘 꿈꾸며 편히 쉬게나, 천국에서 다시 만날 그날 까지..!.’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3호(2014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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