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발견설에 중정이 시료채취

‘우리도 산유국의 길…’
포항 원유시추의 진상
민간인 발견설에 중정이 시료채취
실험결과 원유 아닌 정제제품 확인


글/ 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 및 방산담당 비서관

▲ 1975년 영일지구 석유탐사 시추작업현장, 뒤에 시추철탑이 보인다.

1976년 1월 15일 박정희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작년(75년)말 영일만 부근에서 우리나라 기술진이 오랜 탐사 끝에 여러 개의 시추 공혈 중 한 곳에서 석유와 가스를 발견했다. 석유를 발견한 것도 값진 일이나 얼마나 많은 매장량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금년부터 본격적인 탐사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75년 말 중앙정보부에서 박 대통령께 포항에서 채굴한 원유샘플을 가져 와서 불을 붙이고는 “보십시오. 활활 타지 않습니까? 석유를 개발했습니다”하고 보고 드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도 산유국이 되었구나”하고 굉장히 좋아했다.

중앙정보부 3개공 시추 대통령에게 보고

포항의 원유시추 발단은 이렇다.
삼국유사에 경주지방에는 3일 동안을 가리지 않고 불길이 솟았다는 기록이 있는데다가 국립 광물지질 연구소가 1963년에 전국의 지질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유독 포항지역의 지하층이 석유부존 가망성이 있는 제3기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 1976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회견서 석유가 영일에서 1975년 12월 3일나왔다며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방송을 보고 환호하는 시민들.

이를 근거로 하여 한 민간인(정우진)이 시추를 해 보니 가연성 가스가 나온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정씨는 석유가 나온다고 진정서를 관계 부처에 내고 신문에도 발표함에 따라 정부는 무임소장관(김윤기)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해 조사를 했으나 지질학적으로 “경제성 있는 석유나 가스는 없다, 그러나 유전시추기로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포항의 석유문제가 항간의 화제가 되자 중앙정보부가 1975년 상반기에 특별 석유탐사단을 구성하여 포항 시추에 개입했다. 중정이 석유탐사에 개입하는 것은 업무성격에 맞지 않지만 어떻든 중정이 3개 공을 시추하여 석유를 채취하여 그 시료를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필자는 오원철 수석으로부터 중정이 원유를 시추하여 박 대통령에 보고하자 너무나 좋아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필자는 ‘당장 큰 일이 났구나’ 생각했다.

6개월간 시추결과 경제성 없다고 발표

석유공사에 근무한 적도 있고 원유에 대하여 전문가 급의 지식을 갖고 있는 필자는 “엉터리다. 나올 수 없는 곳에서 기름이 나왔다. 누가 실수를 하는 건지, 점수를 따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와 학교동창이며 친한 친구인 호남정유의 기술이사(한성갑)를 불러 고충을 얘기했다. 이에 한 이사는 “취재된 기름이 원유인지 아닌지는 증류(蒸溜))실험만 하면 된다. 이 실험은 아주 간단하다. 비등점(沸騰点) 분석만 하면 당장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 수석에게 보고했다. 상부에서 내려온 시료와 유공에서 보내온 원유 샘플을 호정의 칼텍스 시험실과 국립중앙연구소로 보냈다. 증류(Boiling point) 실험결과는 꼭 같이 나왔다. 원유는 여러 가지 성분이 섞여 있는지라 비등점 범위가 넓고 비등점이 완만한 대신에 일단 정유공장을 거쳐 나온 정제유는 경유만 경유, 중유만 중유에 한정된 비등점이고 또한 비등점의 분포도가 칼날같이 뾰죽뾰죽하게 되어 있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가 별도로 보낸 원유는 원유 그래프대로 나왔고 시료는 원유가 아닌 정제된 경유 제품이 확인되었다. 즉 포항에서 채취된 기름은 원유가 아닌 것이 판명되었다.
이 결과를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문제였다. 진실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김정렴 실장과 오 수석이 그래프를 보여드리면서 원유가 아니라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회견에서 기름은 나왔는데 경제성이 있는지 더 시추를 해 봐야 안다고 하였다. 국민의 희망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기 곤란해서 이렇게 발표를 하고 그 해 여름 진해 휴가 시 기자회견 때 포항원유 시추는 경제성이 없어 중단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한국의 국립지질연구소와 대만의 석유공사와의 협정을 맺고 1967년부터 정식으로 약 6개월간 시추를 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석유가 없다”는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포항석유 시추사건은 웃으려야 웃을 수 없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났다.

포항 원유 해프닝 후 대륙붕 개발

대륙붕(大陸棚, Continental Shelf)은 육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넓고 비교적 얕은 해저 평탄면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수심 100~200m까지 펼쳐져 있으며 200m를 넘으면 수심은 급경사로 깊어진다. 한국은 반도로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육지의 3.5배에 해당하는 것이 대륙붕이다. 대륙붕은 어떤 국가의 연장구역이라 하여 대륙붕에 있는 원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을 개발한다. 이것은 대륙붕에 관한 국제협약에 따라 육지 소유국가가 배타적 주권국가를 행세한다는 규정에 연유한다.
지금 중국이 일본, 필리핀, 태국 등 국가와 도서를 두고 영유권을 가지기 위해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고 일본이 억지로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모두 대륙붕에 대한 권리행사를 하고자 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
한국의 대륙붕은 1978년 한국의 국립지질연구소와 ECAFE가 공동으로 영일만 일대에는 석유부존의 가망성이 있는 제3기층이 있다고 조사되었고 그 후에 지질연구소와 미국해양연구소간에 공동조사로 서해 대륙붕에는 지질구조상 제3기층이 발달되어 있으니까 석유부존의 가망성이 있다고 판단 내렸다. 이것이 우리나라 대륙붕 개발에 불을 붙인 소위 “에머리” 보고서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정유사업에 제일 먼저 진출한 갈프석유(Gulf Oil)사가 1968년 8월 15일 우리나라 전 대륙붕에 개발 신청을 하였다.
1개 회사에 전 대륙붕에 대한 독점권을 줄 수는 없었으므로 한국정부는 결론적으로 8개 구역으로 나누어 “대륙붕” 선언을 하였다.

13개공 시추했지만 산유국 꿈 무산

광구결정에 있어서 서해안 쪽은 중국과 접해 있으나 그 당시 중국과는 비 수교 국가이므로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시추 시 연이은 방해공작이 있었지만

▲ 시추 위치도

별로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7광구였다. 이 구역은 일본과 중복이 되어 7광구가 발표되자 일본정부는 우리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에 경제원조를 받고 있을 때 이었으므로 경제원조 취소 발언은 협박에 가까웠다. 장기간의 타협 끝에 72년 6차 한일 각료회담에서 한일 공동개발 구역으로 설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시추상황과 결과를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제2 및 제4 광구
갈프 담당구역으로 일련의 예비조사를 실시하고 1972년부터 유망 시 되던 제2광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시추를 시작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음. 1977년 4월에 조광권 반납하였음. 시추책임자의 말이 “한국은 화강암지대에 올라앉았으니 가장 튼튼한 기초 위에 놓여있다고 했음” 그 후에 83년에 미국의 Zapex와 Marathon사가 일개 공씩 추가 시추하였으나 유징을 발견치 못함
제3 및 6 광구
셀 구역으로 처음부터 가망성이 없는 6광구는 포기하고 3광구에 대하여만 했으나 모두 Dry로 판명됨
제1 및 제5 광구
제1광구는 포기하고 제5광구에 대하여서만 1980.5월과 1984.6월에 실시했으나 실패하여 철수했음
제7 광구
제3기층의 배사구조형태로 희망을 걸었으나 모두 Dry였음.
KOAM(Korean American)이 1980.7월과 1981.11월 한 개조씩 실시. 그 후 85년도에도 2개 공 실시했으나 실패하였음.
한국은 1960년대 말부터 1980년에 들어서기까지 전 세계 굴지의 석유회사와 시추회사를 동원하여 한반도의 전 대륙붕 구역에 대하여 13개 공을 시추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는 비록 실패하여 산유국이 되리라는 꿈은 산산 조각이 났지만 우리 돈 한 푼 안들이고 대륙붕 내 원유개발 시추를 함으로써 원유개발과 시추에 대한 값진 경험을 쌓았다. 오늘날 유개 공을 비롯한 민간기업들이 해외에 나가서 원유개발을 비롯한 천연자원개발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것은 이때의 경험 축적이라고 하겠다.
이 두 시추사건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산유국이 되리라는 강한 집념을 알 수 있다.

<참고> 박정희 대통령연설문집, 김정렴: 경제발전30년사, 오원철: 한국형경제건설, 중화학기획단: 중화학공업발전사.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3호 (2014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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