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제품 수출로부터 수출입국 대장정

중화학공업 선도역할
한미섬유협정 비화
봉제품 수출로부터 수출입국 대장정


글/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 및 방산담당 비서관

박정희 대통령이 73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화 정책을 선언함으로써 중화학 공업건설에 착수하였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이 재 조명 받음으로써 필자가 매스컴과 학계와 인터뷰할 때 받는 첫째 질문이 중화학공업을 “왜 했느냐” 하는 것이다.
중화학공업추진의 이유가 크게 나누어 세 가지다.

▲ 60년대 마산의 섬유공장에 들러 여공들의 작업공정을 살피는 박정희 대통령.

첫째로 섬유류와 같은 경공업제품만 가지고 수출에 한계에 도달한 점
둘째로 70년대에 경제도약을 해야 후진국이나 중진국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있겠다는 절박감
셋째로 공업구조상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려면 중화학 공업구조로 개편해야 된다는 점이다.

이 글은 중화학공업 추진의 첫째 이유인 80년대 초에 수출 100억불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노임을 주로 한 경공업 제품 수출에 의존해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한 자료가 된다. 필자가 중화학공업 기획단 근무 당시 준비한 자료를 수정 보완하여 여기 게재하였다.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한미섬유협정상의 우리의 고충은?

60년대의 한미섬유협정은 섬유전쟁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국제간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냉엄한 것인 가를 인식하게 해준 일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측의 거족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71년 10월 16일 서울에서 이낙선 상공장관과 D케네디 미 대통령 특사 간에 섬유문제에 관한 정부 간 쌍무협정을 맺는다는 양해각서에 가조인됨으로써 만 2년 5개월간 끌어왔던 한미섬유협상은 한국 측의 패배감이 짙게 풍기는 가운데 막을 내렸다.
그 동안 미국 측의 강경한 자세에 밀려 결국 한미섬유협정에 사인을 하던 날 이장관은 무척 억울하고 분한 표정이었고 케네디 특사는 약간 계면적하고 미안한 얼굴로 상공부장관실을 떠났다는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로 미루어 이 협정으로 인한 양국 간의 이해득실이 어느 쪽에 치우쳤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고 했다.
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미 측은 노골적인 힘의 시위를 행사했으며 이러한 강행외교에 한국은 무척 야속해 하고 원망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관계자들은 털어놓고 있다.
한미 간의 전통적인 친선관계와 한국의 특수사정을 고려하여 특별배려를 요청했으나 결국 일방통행으로 협정에 사인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국의 섬유류 수입규제는 닉슨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어떤 형식으로든지 단행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있었다.
발 앞에 닥친 72년 선거를 앞둔 닉슨대통령의 정치포석으로서 섬유류 수입규제문제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와 있었다. 거기다가 수익률이 낮은 미국의 섬유산업은 수입품보다 경쟁력이 약하고 따라서 발생한 직물업계의 불황은 흑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남부 저소득층의 사회불안마저 일으킬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정을 배경으로 수입규제를 골자로 한 홀링스 법안이 68년 미 의회에 상정되면서 한미 간 섬유전쟁의 불씨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수출입국 개척기의 주력산업

심상찮은 미국 내의 움직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68년 10월에 수입제한대책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한미섬유전쟁이 막이 오른 것은 69년 5월 제 3차 한미 상공장관회의 때였다.
한국의 분위기를 관계국에 알릴 겸 사정을 타진하기 위해 유럽 및 극동순방길에 나선 스탠스 미 상무장관이 내한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섬유류의 대미 수출에 대하 자율규제를 요청한 것이다. 이때 한국 측은 한마디로 이를 거절하며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대미섬유류 수출을 자율규제 한다는 것은 수출을 물론 국내 고용, 생산 면에서 큰 영향이 미치기 때문이다. 한국 측 입장으로 섬유산업은 우리 경공업분야의 핵심 분야로서 그 동안의 경제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 한미 상공장관 회의 당시 이낙선 상공장관(가운데)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7년 24.6%, 69년 31.6%로 전 제조업의 3분의 1선을 넘어서고 있었으며 고용인원도 41만 명에 이르러 전 제조업 취업인구 1백 30만 명의 32%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밖에 수출 면에서도 섬유산업은 70년 우리나라 전체 수출(10억 달러)의 38% 내외에 달했으며 대미섬유수출의 경우 1억 5천만 달러로 15%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섬유산업이 우리 경제에서 막중한 비중을 가지고 있는 반면 우리 때문에 미국은 그렇게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게 우리의 미국에 대한 반론 이유였다. 즉 미국 섬유소비량 중에 한국수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다. 69년의 경우만 해도 고작 0.6%에 불과했다.
이러한 양국 간의 입장이 대치된 가운데 그 해 10월 포터 주한 미 대사가 미국 섬유협상을 정식 문서로 제의, 제네바에서 첫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미국 측 인조섬유제품 및 모제품의 전 품목에 대해 68년도 실적을 기준 연간 증가율을 5%로 규제하려는데 반해 한국 측은 68년도 미국의 총 수입량 중 한국이 10% 이상 수출한 품목에 한해 64년부터 68년까지의 평균 총수출 신장률을 규제기준으로 해줄 것을 요구하여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났다. 당시 한국 측 대표였던 김우근 씨(당시 상공차관)는 우리 정부는 사실 이 회담을 통한 어떤 성과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 결론에 대해서도 비관이나 낙관을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로서는 당시 대미 수출실적이 일본, 서독, 대만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회담을 지연시켜 시간을 벌고 그 동안에 차분히 실적을 쌓아 보자는 게 주요 정책기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때만 해도 한국 측은 미국의 섬유류 수입규제정책이 주로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 판단, 무역관계가 흑자일변도인 한국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한 규제가 있을 것으로 예상치 않았었다. 한국의 섬유류가 미국시장의 대세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실정이고 우방인 한국의 주종 산업이란 점이 충분히 감안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연례적 수출쿼터 줄다리기 협상

그러나 70년 4월 무역법안인 밀즈 법안이 미 의회에 끝내 상정되는걸 보고 한국의 대책위원회는 구성 된지 1년 반 만인 그 해 5월 처음으로 위원회를 소집, 위원장단을 비롯 사무국을 정식 편성하는 한편 서울 대도시에서 수입규제 반대데모를 벌이기도 하고 미 의회에 메시지를 발송하는 동시에 이 활 대책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동 제한을 극력 반대하는 한국 업계의 입장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섬유류 수입규제를 주요 내용으로 한 밀즈 법안이 미 상원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자 미행정부 협정을 통한 규제를 다시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규제협상에 관한 전권을 위임 받은 케네디 전 재무부장관이 71년 8월 한국을 방문 관계 당국자와의 접촉을 통해 협상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그는 한 달도 못된 6월 12일 사전 예고도 없이 특별기로 한국을 다시 찾아와 한미섬유류 협상 개최를 정식으로 요청, 한국정부가 이에 응했다. 이리하여 한미섬유회담은 15일 상공부회의실에서 우리 측을 대표한 심의환상공차관보와 미국 측을 대표한 안토니 쥬리크 재무성 특별보좌관간에 재개됐다. 이 회담에서 쥬리크 대표는 초년도 쿼터 증가율 11%를 내세우면서 한미 간의 전통적인 유대관계에 입각, 일본, 대만 홍콩과의 협상에 있어 한국이 선례가 돼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경제개발 단계에 있는 한국으로서는 섬유산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한국의 대미섬유수출의 양이 미미한 실정이란 점을 들어 한국에 대한 예외조치를 촉구했다.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이활 대책위원장은 성명과 기자회견에서 잇따라 협상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천명했으며 6월 18일에는 생산자. 노조. 무역업자들이 총 궐기대회를 시민회관에서 열고 가두데모에 나섰으나 당국에 의해 저지당했다. 특히 이 위원장은 성명을 통해 [한국은 가장 호전적인 북괴와 대치하고 있어 정치적 안정이 어느 나라 보다 도 절실하다고 [이는 수출증대에 의한 경제성장 그리고 경제안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제조업과 수출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어떤 형태의 자율규제도 끝내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대책위는 케네디 특사와 포터대사에게도 이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전달, 한국의 특별배려를 호소하는 동시에 당국의 적극적인 대책 강구를 촉구하는 건의안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폭풍이 닥쳤다. 8월에 닉슨 독트린을 고비로 하여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만약 정부간 섬유협정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방적인 수입 쿼터 제 실시도 불사한다는 강경자세로 나온 것이다. 미국 측이 이토록 강경히 나오는 데는 한국 측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10월 16일 내한한 케네디대사와 이낙선 상공장관이 협정에 가조인 함으로써 한미 간의 섬유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때의 협상내용은 71년 10월부터 5년간을 규제대상으로 하고 대미섬유류의 연평균 수출증가율을 7.5%로 하며 미국시장에서 점유도가 높은 12개 품목에 대해선 특별제한 한다는 미국 측 안 거의 그대로 반영돼 버리고 말았다.(자료:중화확기획단 조사연구)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4호 (2014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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