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 지핀 시점에
반기문 대망론이라니


글/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현 논설고문)

박근혜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11월 12일과 13일 미얀마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에서 만났다. 이어 15일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열린 G20정상회의에도 함께 참석했다. 그런데 만남의 분위기가 서먹했다고 한다. 국내 언론들이 전하기로는 그랬다. 냉랭했다는 표현도 있었다. 지난 9월 22일 박 대통령이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에 갔을 때는 만찬과 함께 장시간의 대화를 나눴는데 이번엔 서로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달랐다는 것이다.

충분한 자질·역량을 갖췄다 해도…

언론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두 사람의 ‘조우’를 지켜봤던 듯하다. 두 사람은 국제행사에 각각 참석했을 뿐이다. 이미 9월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으니 따로 만나서 논의할 일이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많은 나라의 정상들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두 사람만 특별히 친밀감을 표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분위기가 냉랭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국내 언론들의 ‘의도적 오해’였을 개연성이 높다.
어쨌든 ‘반기문 대망론 혹은 대안론’은 이미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라버렸다. 반 총장 자신은 아니라고 한다지만 상상력의 날개는 갈수록 자라게 마련이다. 게다가 네임벨류에서 그와 겨룰 만한 사람이 달리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옛날의 인식으로 말한다면 그는 이미 ‘전설’이 된 인물이다.
반 총장이 그처럼 차기 대선주자로 거명될 충분한 자질과 자격, 그리고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 시점에 나오는 ‘반기문 대망론’은 대단히 거북하다. 박 대통령이 취임한지 겨우 1년 10개월이 지났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한창 국정을 이끌어가야 할 시기에 ‘차기 대선’ 분위기를 조성해서 견인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그간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을 빌미로 한 야당의 집요한 공격, 그리고 세월호참사로 인한 국민적 충격·불신·갈등의 분출로 인해 임기 37%를 잃어버린 셈이 됐다. 앞으로도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특별검사의 수사 등이 장기간 정부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로 예정돼 있다.

▲ 박근혜 대통령(오른쪽)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미얀마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 갈라만찬에 들어서고 있다.

개헌론과 반기문 대망론 수작

5년 단임의 대통령에게 임기 첫 2년은 황금 같은 시기다. 임기 3년차에 새로운 일을 벌이기는 어렵다. 4년차에 들어가면 낙조가 짙어진다. 정부의 수레바퀴가 겨우 수렁을 벗어날 즈음인데 벌써 해는 중천에 이르렀다. 갈 길이 바쁘지만 정치권은 ‘국회선진화법’을 빌미로 마냥 게으름을 피운다. 공공부문 쇄신, 공무원연금개혁, 경제혁신 3개년 계획, 규제개혁, 경제회생, 민생안정…그 어느 것 하나 순조롭게 추진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불거진 것이 ‘개헌론’과 ‘반기문대망론’이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의 장애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말을 꺼냈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얼른 거둬들인 바람에 개헌론은 탄력을 잃어버린 인상이지만 ‘반기문대망론’은 다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탄력을 얻어 바운드가 더 커질 조짐이 뚜렷하다.
애초에 친박계가 이 카드를 슬쩍 내민 것은 위기감의 발로로 보인다. “우리도 대안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누리당 김 대표의 기세를 꺾자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사실 ‘선택지’라는 면에서는 대통령이 여당 대표보다는 유리하다. 정권을 재창출하는데 대통령이 결정적 역할을 할 수는 없다고 해도 특정 인사를 좌절시키는 데는 크게 한 몫 할 수 있다.
그 점을 부각시키려 했다면 그 점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하필이면 지난 10월 29일 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방문한 시점이었다. 이날 친박은 따로 모여 국가경쟁력 강화 포럼 제9차 세미나를 열었다. 거기서 차기 대권 주자로 반 총장을 거명했다. 김 대표에게 경고성 신호가 되긴 했겠지만 박 대통령에게도 엉뚱한 돌멩이가 됐다. 자칫 이제 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접고 다른 리더를 찾으려 한다고 비칠 수도 있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당내 인물을 기피하는 배경

반기문 쇼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1월 3일, 이번에는 새정치민주연합 권노갑 상임고문이 출판기념회 석상에서 갑자기 반 총장 이야기를 꺼냈다. 반 총장의 측근인사들이 자신에게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 가능성을 타진하더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에는 같은 당의 박지원 의원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반 총장과 가깝다고 하는 사람들이 수개월 전부터 권 고문을 많이 접촉했다며 그 중 한 사람이 자신에게 식사제의를 했지만 거절했다는 말이었다.
이들의 언급에 배경이 없을 수는 없다. 설마 박 대통령의 조기레임덕을 기대해서 그러기야 했겠는가. ‘내가 킹 메이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반 총장은 여당 사람이 아니라 야당 사람이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한 말인 듯도 하다. 당내 친노계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후 반 총장의 동생들이 “측근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형을 파는 사기꾼”이라고 주장하면서 접촉설은 한풀 꺾였다. 이어서 반 총장 자신이 차기출마설을 부인하고 나섰다. 그는 “정치권의 정파적 접근이 사무총장의 도덕적 권위까지 훼손할 수 있는 만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KBS가 5일 보도했다. 이로써 당장은 진화됐지만 불씨는 그대로 남아 있다.
어쨌든 정당들의 행태는 많이 한심하다. 스스로 인물을 키워내지 못하고 외부의 유명인에게 의지하려는 행태가 아주 체질화한 인상이다. 내부의 인물에 대해 자신을 못 가지는 이유는 뻔하다. 정당들이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고, 그 때문에 국민은 정당에 대한 신뢰를 거둬버렸기 때문이다. 인물 키우기 자체를 기피하는 것 또한 한국 정당의 속성이 되고만 인상이다.
‘스타 영입’은 국민의 인물 허기증에 대한 정당들 나름의 부응방식이기도 하다. 국민은 마음껏 박수를 보내고 신뢰와 존경을 보낼 리더에 목말라 왔다. 초선일 뿐이었던 문재인 의원이 제1야당의 대선후보가 된 것이나, 정치에 발을 들여놔 본 적이 없었던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가 바로 대선 주자로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이 대중의 ‘큰 바위 얼굴’ 희구심리였다.

유엔총장직 명예를 지켜야할 때

이제 그 ‘큰 바위 얼굴’ 반열에 반 총장도 이름을 올렸다. 그 자신은 출마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유엔사무총장 재선 임기가 끝나는 2016년 말 이후에 어떤 결정을 하게 될 것인지는 그 자신도 아마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론 지지도가 현재의 수준을 계속 유지한다면 생각이 바뀌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러나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지금은 박 대통령에게 소신껏 국정을 이끌 기회를 주는 게 옳다. 정부를 실패케 하면 그 피해는 국민의 몫이 된다. 국민의 피해를 발판 삼아 정권을 쟁취하겠다는 세력이 있다면 이들이야 말로 국민의 공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들을 권좌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민주국민의 책무일 것이다.
그리고 반 총장에게도 명예롭게 총장직을 수행해 갈 수 있도록 배려와 지지와 사랑을 보내줘야 한다. 국내 정치 상황에 그를 끌어들이면 국제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급속히 떨어지고 만다. 유엔사무총장직을 대통령 선거의 지렛대로 삼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게 될 경우, 반 총장 개인은 물론 우리나라의 이미지도 추락하게 마련이다. 반 총장의 부인 유순택 여사도 최근 “남편이 정치하는 것에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동아일보가 외교소식통을 인용, 지난 17일 보도했다. ‘반 총장 보호’를 통해 우리 정당들 및 정치인들이 도덕성 성숙성을 스스로 입증해 주길 기대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4호 (2014년 12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