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난중일기

[원로 정치논객 칼럼]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
이순신, 박정희&박근혜
‘난중일기’ 속으로 들어가라


글/ 鄭在虎 (정재호 헌정회 원로회의 부의장, 제8대국회비서실장,
9·10대의원, 전 경향신문 정치부장, 논설위원)

‘가고파’ 시인의 영웅 만들기

“영웅의 심안(心眼)만이 능히 영웅을 알아본다.” 불후의 명작 ‘가고파’의 작가 노산 이은상(1903~1988)의 어록 중 인상적인 한 대목이다.
노산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한글로 옮겨 최초로 세상에 펴낸 저명한 국학자이며 언론인 출신의 시인이다. 서정적인 노랫말로 이 땅의 가곡사(歌曲史)에도 큰 자취를 새긴 그는 말년에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과 안중근 열사 승모운동에 몸을 던져 이끌어 온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난중일기 친필초고를 바탕으로 충무공 전서(全書)에 있는 내용을 보충, 날짜· 숫자·시간 등을 조선시대 당시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놓은 철저한 고증 주석을 단 노산의 난중일기해의는 충무공 연구의 압권으로 평가받는다.
그 속에 투영된 이순신의 절절한 우국충정과 전란(戰亂)의 소용돌이 마디마다에 흩뿌려진 장수의 인간적인 내면이 살아 숨 쉬듯 고스란히 잡힌다.

▲ 광화문 앞 이순신 동상

책값을 15,920원으로 정한 것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을 상징하는 섬세한 배려의 결과다. 노산은 정부의 고위 관료를 포함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이순신의 영웅상(像)을 오늘에 부활시킨 공로는 전적으로 박정희의 몫이다.”라고 토로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박정희 사후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말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 박정희는 난중일기를 일찌감치 국보(제76호)로 지정하고 충무공을 기리는 현충사를 조성, 성역화 했으며 충무공 동상을 서울 광화문 중심에 세워 친필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헌사 했다. 동상 제막식전에도 참석했다. 노산은 박정희의 행적을 들어 이순신의 영웅상을 입체화한 박정희의 공덕을 내세웠다.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이렇게 시작되는 ‘박정희 조가’도 노산의 작품이다.

▲ 노산 이은상

5.16 군사혁명 이후 불안정한 내외정세와 나라의 곳간 사정이 어려운 가운데 박정희 장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심혈을 기울인 것은 당시의 현실 상황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지난한 결단이었다.
일인당 국민소득 68달러 북한(280달러)대비 초라한 국세(國勢)였기 때문이다. 노산은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승만과 박정희’를 묶어 난세가 낳은 불세출의 영웅이란 주장을 기회 있을 때 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던 위인이다.
특히 대물림의 굶주림에 지쳐 자학(自虐)의 늪에 빠졌던 한국인의 영혼을 흔들어 깨운 박정희의 초혼(招魂) 리더십을. 12척의 배로 330척 왜선과 맞선 이순신 리더십과 나란히 세운 노산의 안목은 눈부신 비교 관찰의 핵심이다. 이순신과 박정희 리더십의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친 민심에 감동의 물결

2014년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에 휘둘려 심리적 공황에 가위눌린 채 오금을 못 폈다. 비창(悲愴)의 늪은 잔인했다. 정치는 초점을 잃고 방황했다. 슬픔을 헤집고 정략(政略)의 춤사위만 요란했다. 민생은 뒷전으로 내몰렸다. 정체성이 미심쩍은 자들이 무리지어 상중난적(喪中亂賊)을 꾀했다. 툭하면 낯익은 단식 삭발 풍속도가 한바탕 위세를 가장한다. 화살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했다.
떼법이 공권력을 넘어 공정(公正)을 위협했다. 목청의 크기는 유세(有勢)의 척도로 통했다. 누적된 피로감이 짜증으로 변질되는 전이속도가 바람을 갈랐다. 끝내 ‘세월’은 가엾고도 원망스런 두 개의 문양으로 교직(交織)되고 말았다. 민심의 서글픈 민낯이다.
이때 영화 ‘명량’(鳴梁)이 만들어낸 감동증후군이 진하게 밀려왔다. 압도적 왜적과 맞선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다룬 영화의 위력은 대단했다. 실의에 잠긴 한국사회를 향한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였다.
역경을 뚫고 박정희가 만들어낸 영웅의 재림(再臨)이었다. 세월호에 지친 길고도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는 막바지다. 지난 7월 30일 전국 1,159개 영화관에서 개봉된 ‘명량’은 단숨에 1,760만 9,242명의 유료 관객을 동원하는 경이적 기록을 수립했다.
한국 영화사상 최단 시일에 최대관객을 끌어안은 기록을 갈아치웠다. 사람들은 이순신 신드롬 속에서 박정희 리더십의 향수를 접속하기도 했다.
‘명량’이 동남아와 중국공략에 나섰다는 소식이 한국인의 가슴에 한줄기 풋풋한 자긍심을 안겨주고 있다.
중국신문 청스콰이바오(城市快報)는 “한국에서 수많은 기록을 낳은 ‘명량’은 곧 중국에서 상영돼 한국 개봉 후 가장 빨리 중국에서 상영되는 기록을 세웠다.”고 보도했다.
지난 7월에 방한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특강에서 이순신 장군에 관해 언급하면서 함께 왜적에 맞선 명나라 수군(水軍)제독 진린(陳璘)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제공한 바 있다.
‘명량’은 북미와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대만,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등 13개국에 수출계약을 성사시켰다는 소식이다.

▲ 영화 ‘명량’

12척의 배가 포진하는 한…

명량대첩. 400여년이 지난 오늘이다. 한반도 주변의 안보환경은 쉼없이 흔들리고 있다.
북핵(北核) 해결 전망은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주변 강국의 힘겨루기는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미·중G2 패권 파고 속에서 한국의 전략적 선택폭은 매우 비좁다.
우리의 상대는 글로벌 스텐다드를 비웃는 불확실성에 갇혀있다. 그들의 교조적인 모험주의는 마침표를 거부한다. 국내 정치문화는 질적으로 퇴행했다. 제대로 된 백성의 눈높이를 정조준하는데 한참 뒤떨어져있다. 정치불신은 거의 한계상황이다. 경제사정은 초겨울 날씨만큼이나 싸늘하다. 게다가 국민의식 선순환의 구심력을 발휘하여야 할 지식사회는 구역질나는 양시양비론에 매달려 말장난을 즐기고 있다.
이념갈등의 틈 사이에서 그 앞잡이들이 국론분열에 추임세를 불어넣고 있다.
사방의 눈치 살피던 종북(從北) 패거리들이 야행성(夜行性)을 벗어던지고 백주대로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다. 딱히 외우내환의 기상도가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통령 박근혜의 국정 지지도가 효과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괄적인 국제외교활동 탓에 집권 2~3년차 역대 정권의 지지율대비 건실한 편이다.
박 대통령도 ‘명량’을 봤다. 많은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발휘했던 불퇴전의 기백을 떠올렸을 것이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는 이 말 속에 난국돌파의 이정표가 분명 함축되어 있을 법 하다. 그 길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겼을때 비로소 열리는 법이다.
박근혜에게는 아직 12척 이상의 든든한 배가 포진하고 있지 않은가. ‘난중일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4호 (2014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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