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김형직이 손정도목사 숭실동문

▲ 북한 김일성의 은사인 손정도 목사

김일성과 기독교 가문
3대 세습권력 주고받기
부친 김형직이 손정도목사 숭실동문
강돈욱 장녀 강반석이 김일성 모친


글 / 배흥직(裵興稷) 목사(안동 거주, 90세)

경북 안동시 거주 배흥직(裵興稷) 목사께서 북한 김일성의 은사인 손정도(孫貞道) 목사 가문, 김일성의 외조부인 강돈욱(姜敦旭) 장로 가문,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金亨稷) 집사 가문 등 기독교 3대 가문 이야기를 우송해 왔다.
배 목사는 올해 아흔으로 일제치하에서 선친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가 소화 19년, 1949년 12월 관동군에 강제 소집되어 중국 화북지방 철도부대에 일등병으로 근무하다 8.15를 맞아 탈출하여 광복군에 편입되어

▲ 손정도 목사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지사이다.

1946년 4월 16일 귀국선을 타고 인천항으로 입국했다. 배 목사의 이야기는 경제풍월 2014년 9월호에 ‘68년 전 귀국선(歸國船)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편집자)

김일성 은사 손정도 목사 가문

김일성의 은사인 손정도(孫貞道) 목사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장(현 국회의장)을 지낸 독립지사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되찾아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면 단결(團結), 협력(協力), 정직(正直), 근면(勤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920년 임시정부 초기의 내부 혼란에 실망하여 만주 길림(吉林)으로 이주하여 길림 한인교회(韓人敎會)를 설립하여 교인들에게 국가관과 애국심을 심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당시 손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을 역설하면서 자신의 몸에 붙은 더러움을 닦아내는 걸레로 사용하겠다면서 ‘걸레철학’을 실천했다.
이보다 앞서 손 목사는 1882년 평남 강서(江西)에서 태어나 그 지역의 유명한 기독교 가문인 강돈욱(姜敦旭) 장로를 알게 되었다. 강 장로는 평남지역에서 초기 기독교에 입문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 기독교 가문이었다. 이로부터 손정도 목사와 강돈욱 장로 가문은 서로 친밀한 관계로 우의를 쌓았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손 목사는 김형직(金亨稷) 집사를 통해 김일성(金日成) 김정일(金正日) 김정은(金正恩)의 3대 공산세습을 이루게 만들었다. 또한 그 김일성을 통해 외가인 강돈욱 장로 가문을 ‘조선 그리스도연맹 위원장’이라는 3대 세습을 이룩했다는 사실이 역사적이다.
그러니까 김일성 가문의 기독교 3대 가문 친교가 공산독재 3대 세습과 조선기독교연맹 위원장 3대 세습을 서로 주고받았다는 웃지 못 할 사연인 것이다.

▲ (좌로부터)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외조부 강돈욱 장로, 모친 강반석

김일성 외조부 강돈욱 장로 가문

김일성의 외조부인 강돈욱(姜敦旭) 장로는 평북에서 일제시 만주 길림(吉林)으로 이주하여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문하여 장로 안수(按手)를 받고 만주지방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협력했다.

▲ 유원중학교 1학년 재학당시의 김일성

강 장로의 장녀가 강반석(姜盤石)이고 동생 강양욱(姜良旭)이 목사이다. 강 장로가 딸을 ‘강반석’이라 이름 지은 것은 딸에게도 기독교 사상을 주입시켜야겠다는 정신이었다. 이 딸이 바로 김일성의 어머니다.
강반석이 기독교 사상으로 신앙이 돈독하여 김형직 집사와 결혼하여 김일성을 낳았으니 강 장로는 김일성의 외조부가 되는 것이다.
또 손정도 목사는 평양 숭실(崇實)중학교에서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을 알게 된 숭실중학 동문으로 뒷날 김형직을 통해 김일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 강양욱 목사의 아들 강영섭 목사와 (오른쪽)손자 강명철 목사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의 작은 아버지인 강양욱 목사는 김일성의 외삼촌으로 북한의 대외 선정용 ‘조선기독교연맹’을 설립하여 외가의 기독교 가문 체면을 세워주었고 다시 강양욱의 아들 강영섭(姜榮燮) 목사가 30년간 ‘조선기독교연맹’을 이끌면서 남한의 한국교회와 교류하기도 했다.

▲ 필자 배흥직 목사

그러나 그도 연로하자 다시 그의 아들 강명철(姜明哲) 목사에게 조선그리스도연맹 위원장을 세습시켜 주었으니 김일성의 독재 3대와 강 목사 가문의 그리스도연맹 위원장 3대가 너무도 상통(相通)하지 않는가.

김일성 부친 김형직 집사 가문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金亨稷) 집사 가문으로 보면 숭실중학교에서 손정도 목사를 알게 된 것이 3대 권력세습의 시발이었다. 손 목사는 교회를 통해 봉사와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김형직도 손 목사의 영향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1926년 김형직이 교회봉사와 독립운동에 시달려 병고로 죽음에 이르자 15~16세인 아들 김일성에게 유언을 통해 “어머니를 모시고 만주 길림에 있는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 내 말을 전하면서 도움을 구하라”고 했다. 당시 김일성은 겨우 철들 나이로 아버지의 유언 따라 손 목사로부터 기독교사상과 학업 및 독립운동 영향을 받았다.

▲ 김일성이 아내 김정숙, 아들 김정일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이 무렵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도 교회의 새벽종을 치면서 아들이 학업과 신앙에 열중하도록 희생적으로 양육했다. 그의 어머니의 교육은 착하고 믿음직했었다. 그러나 기독교사상을 배운 김일성이 집권한 후 기독교를 말살하고 탄압한 것은 불효막심하다고 해석된다.
김일성은 1994년 사망하기 전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의사로 개업하고 있던 은인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자 그의 친구인 손원태(孫元泰) 의사를 평양으로 초청하여 옛 스승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북한의 3대 세습권력과 기독교 3대 가문의 인연과 세습 대물림이 참으로 기묘하다는 생각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4호 (2014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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