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명위, 제2차 발표회 및 세미나

친북반국가행위 진상
좌익운동 뿌리와 실체
규명위, 제2차 발표회 및 세미나
이주천 교수, 8·15 후 6·25까지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 세미나에서는 한국의 좌익운동 실체와 전개 과정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제1주제, 해방 후 좌익운동(이주천 원광대 교수), 제2주제, 60~70년대 좌익운동(유광호 한국전략연구소장), 제3주제, 80년 이후의 좌익운동(최진학 뉴라이트 전국연합 정책실장) 등 이었다. 발표자들은 오늘의 국가적 위기는 김대중, 노무현의 친북 좌익정권이 햇볕정책이라는 미명으로 친북연공, 대북 유화정책에서 비롯됐다고 비판했다.

8·15후 6·25까지 파업, 폭동

한국 좌익의 기원은 해방 전후의 좌익 활동으로부터 지금의 친북 총수격인 DJ의 젊은 시절 좌익행각, 6·25의 빨치산, 햇볕정책기의 ‘좌파 역사 세우기’로 이어졌다.
일제하의 좌익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민족자결 원칙이 선포된 1917년에서 19년에 이르는 기간에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모임, 파고다 공원에서의 조선독립선언이 있었다. 이때 약소민족 지도자들은 레닌의 선동에 솔깃하여 마르크스 주의를 학습하고 코민테른의 계획적인 지원을 받았다.
좌익단체들의 분파와 노선투쟁이 극심했지만 공산주의 사상을 도입하고 국제 공산혁명의 일환으로 조선의 민족해방 투쟁을 벌였다.
해방 후 좌익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찬탁운동을 벌이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해 테러, 방화, 총파업, 유격대, 무장폭동 등을 전개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9월 총파업, 10월 대구 폭동에 이어 남조선 노동당 출범으로 6·25 남침 전쟁시까지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사회를 혼란시켰다.
서울대 종합화 반대를 위한 ‘국대안 사건’, 2·7 폭동, 제주 4·3 폭동, 여순반란사건 및 지리산 무장유격투쟁 등이 그것이다. 또 투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46년 5월, 조선정판사를 접수하여 100원 권 지폐 1천200만 원을 발행하여 사용하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제헌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

5·10 총선거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급진세력이 남로당과 간첩들의 사주를 받아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국회를 장악하려는 남로당 프락치 사건을 일으켰다.
노일환, 이문원 의원 등이 남로당 세포들에게 포섭되어 남북협상, 무력통일배격, 양군철수, 한미협정반대,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했다.
검찰은 남로당 전우겸의 진술을 받아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의원을 구속하고 개성에서 이북으로 넘어가려던 여간첩 정재한의 음부에서 비밀 암호 문건을 발견했다.
남로당 특수조직부가 박헌영에게 보내는 보고문으로 UN 한국위원회에 외국군 철퇴 요구, 국회에서 외국군 철퇴안 상정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검찰은 곧 노일환, 김옥주,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김병희 등 국회의원과 변호사 오관을 구속했다. 이들은 15회의 공판 끝에 전원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항소 중에 6·25로 탈옥하여 서용길 의원을 제외한 모두가 월북하여 평양에서 평화통일협의회 간부 등을 지냈다.

DJ는 목포의 좌익핵심

해방 후 김대중 씨의 좌익행적은 백남운이 창설한 좌익정당인 신민당에서부터 본격화 된다. 백은 동경상대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교수로 있다가 8·15후 좌익운동에 나섰다.
1946년 모스크바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된 후 북의 김두봉이 조선독립연맹을 신민당으로 개편하자 남조선 신민당을 만들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 뒤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남조선 신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합쳐 남로당이 됐다. 백은 1948년 자진 월북했다가 79년에 죽었다.
김대중은 당시 공산당, 신민당 등의 행동대원 단체인 민청(#民靑)에 가입하여 10·1 폭동 등 좌익계 극렬단체에서 활동했다. DJ는 6·25로 인민군이 목포에 진주하자 조선노동당 전남 목포시당 위원장 앞으로 당원 등록 청원서를 낸 문서가 경찰에 압수됐다.
그 뒤 목포 경찰관서를 습격한 좌익폭동에 연루 되었지만 장인 차보륜의 도움으로 풀려나 좌익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해운사업에 종사하다 한국 민주당에 가입했다.
DJ는 6·25 1년 전, 좌익에서 전향한 단체인 보도연맹 목포시 운영위원으로 등장했지만 살아 남았다.
이교수는 우파논객 지만원씨의 논리를 빌려 “빨갱이는 유전한다. 한번 빨갱이는 영원히 빨갱이다.”라는 말로 한국의 좌익은 그 뿌리가 깊고 유전되어 내려온 것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87호(2006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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