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수, 김병구, 최영명 세분의 회고

[원자력연구회고 ⑥]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
원자력 기술자립 주역들
남장수, 김병구, 최영명 세분의 회고

글/ 한필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장

원자력 기술자립이라는 미션

한국의 원전기술 자립은 몇 명의 천재 과학자가 어느날 갑자기 이뤄낸 것이 아니다. 사명감과 애국심에 불타는 한국의 과학기술자 수천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원자력 발전기술을 완성한 진짜 주인공은 이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우수한 두뇌와 열정이 없었던들 원전기술 자립은 정녕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0년대 당시, 한국형 원전기술 자립이라는 미션은 누가 보더라도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특히 원전 기술 중에서도 핵증기공급계통(Nuclear Steam Supply System, NSSS)설계 기술은 선진국에서도 기술이전을 기피하는 원자력발전의 핵심기술이다.

한국의 원자력 함대 어디로 갈 것인가

1984년 당시 원자력연구소 분소인 대덕공학센터(DEC)에는 1981년부터 착수한 중수로형 핵연료국산화 사업과 1983년부터 착수한 경수로형 핵연료국산화 사업, 그리고 30㎿급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 설계ㆍ건조 등 힘겨운 임무가 주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한국형 원전기술자립화 사업은, 아직 임무가 주어져 있지 않은 서울의 원자력연구소(KAERI) 연구원들에게 맡길 심산이었다.
1984년 8월 말, 서울 공릉동에 위치한 원자력연구소(KAERI)에서는 「우리가 NSSS를 주도할 수 있느냐 없느냐, 참여한다면 어디까지 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 연구소 간부들이 이틀에 걸친 Brain Storming(BS)으로 답을 찾기 위해 모였다. 결과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한 도전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필자는 간부들의 의견에 대해 침묵 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기술기반이 미약한 상태에서 불가능한 도전이라는 원자력 전문가들의 의견이 잘 못된 판단은 아니었지만, 부존자원이 전무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한국형 원전사업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
필자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이 과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죽기로 결심하면 못할 일이 무엇이랴!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이틀간에 걸친 KAERI의 BS 결과가 관계기관인 한국전력기술과 한국중공업으로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비록 BS에서 결론이 났다고는 하지만 KAERI의 선장인 필자의 결심을 아직 공표하지 않았기에 양 기관의 방문에 필자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 표준원자력발전소 설계사업 추진계획안 과학자들을 독려했다. ‘실패(1985.3)

당시 KAERI에서 만 25년 동안 근무해 온 원로 연구원들은 갓 소장으로 부임한 필자가 원자력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우리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기술자립을 무리하게 추진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한편 한국전력기술은 기술자립에 부정적인 KAERI의 원로 연구원 60여명을 한국전력기술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필자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기술자립에 대한 ‘부정적 사고의 늪’에 빠져 있는 전문가들에 의한 기술자립은 영원히 한국을 외국기술의 노예로 만드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필자는 결국 대덕공학센터의 과학기술자들과 함께 불가능한 임무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 필자는 KAERI의 소장이자 KNFC의 사장으로서 전력그룹협력회의, 원자력위원회, 동자부장관회의에 번갈아 참석하며, “과연 한국의 원자력발전 함대는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만족할만한 답을 찾기 위해 관계기관들과 끝없는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는 헛되지 않았다.
동자부장관회의에서 최동규 동자부장관이 인력과 능력을 갖춘 KAERI가 NSSS설계기술을 전담하도록 결론을 내린 후, 1985년 전력그룹협력회의와 원자력위원회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죽음까지 각오하는 불굴의 자립의지

한국형 원전사업을 본격 추진하던 1985년 당시의 「표준원자력발전소 설계사업 추진계획안」을 보면, 우리나라의 기술자립도는 필리핀, 브라질 등과 같이 하위권 수준으로 분석되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비해 원자력 발전 규모는 10배, 원자력 연구개발비는 40배

▲ 당시의 우리나라 원자력기술 현황 분석

에 이를 만큼 격차가 상당했다.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당당히 일본 수준의 기술자립도를 완성하여 일약 상위권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국내 여러 원자력기관 별로 설계업무를 역할 분담하여 추진했다. 에너지연구소로 명칭 변경된 원자력연구소는 원자력발전의 핵심인 원자로 계통설계와 핵연료 설계를 담당했다(자료 참조).
이후의 과정은 아직 단련되지 않은 신병들을 모아 전쟁터로 나가는 것과 같았다. 기술자립에 대한 우리의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必 設計技術自立’을 위한 ‘萬歲三唱’을 외치며 원자력연구소 과학자들을 독려했다.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자’는 다짐까지 나올 만큼 우리의 열의는 높아져갔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이만한 과업이 과학기술계에 맡겨진 적이 없었다. 그 역사적 의무를 지각한 우리 과학자들은 죽을 결심으로 과업을 완성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기술자립 역사 속 주인공들

필자는 이번호에서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 한국핵연료개발공단(KNFC) 창설에 참여하고, 폐쇄위기를 넘기고 부활에 직접 참여했던 원자력기술자립의 주역들이 직접 작성한 원고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원자력발전의 역사 속에서 후세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 ▲당시의 국내 원자력기관별 설계 역할 분담

1970년대 말 수백 명의 과학기술자들이 국가 원자력 기술자립을 목표로 기술개발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로부터 핵무기 개발 가능성 의혹을 받은 한국핵연료개발공단(KNFC)은 정치적 변화와 함께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의 분소로 통합되어 대덕공학센터(DEC)가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DCE에 남겨진 구 핵공단 연구원들 사이에 불화가 생긴 상태였고, 이는 외부로까지 전해져, DEC에 대해 “Let them sink.”라는 악담이 오갔다. “Let them sink.”란 “DEC는 사라져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기관장으로 부임한 필자는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압력을 견뎌야했고, 내부적으로는 부정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DEC의 일부 간부들을 설득해야 하는 힘겨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다행히 KAERI-DEC요원에게 “진정한 독립국이 되기 위한 원자력발전기술 자립”의지와 애국정신이 살아있었다. 그들의 애국심이 오늘날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을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재탄생시켰다.
2015년 새해 소개하는 글은 바로 1980년대 원자력기술자립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합쳤던 KAERI의 연구원들의 1988년 4월 ‘KAERI뉴스’에 실렸던 글을 현재에 맡게 재구성한 글이다. 이 글을 통하여 국가 원자력 발전 기술자립의 의지와 실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당시 원전기술 자립의 주역들의 글을 직접 소개함으로써 필자와 함께 한 숨은 “한국 원자력발전기술자립”의 주역들의 면모를 엿보는 것도 적지 않은 교훈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번 호부터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필자를 따라준 KAERI의 영웅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남장수, 김병구, 최영명 3명의 소회

첫 글의 주인공 남장수 사무총장은 1968년 서울공대 전기과를 졸업하고 원자력 분야에 투신, 한국핵연료개발공단(KNFC)과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를 거쳐 한전과 한국수력원자력(주)에서 일했다. 2004년 정년퇴직 후, 현재는 한국원자력학회 사무총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력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자립 역사의 산 증인이며, 원자력기술 발전을 위한 수난의 역사를 함께 헤쳐나간 모험가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주인공인 김병구 박사는 1963년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거쳐 캘리포니아공대에서 응용역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75년부터 원자력연구소 응용역학실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원자력통제기술센터장과 미래기술단장, IAEA 사찰분야 사무총장 자문위원, IAEA 기술국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사우디 원자력에너지청 자문관으로 활동 중이다. 필자가 1982년 KAERI로 부임했을 당시 연구원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필자가 제시하는 KAERI의 비전에 대해 희망적인 반응을 보였다. 필자는 그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KAERI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지막 글은 현재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원장으로 재임 중인 최영명 박사가 썼다. 그는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에서 공과대에서 경영과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2년부터 원자력연구소 원자력정책연구부장, 원자력연수원장, 원자력통제기술센터장을 역임하는 등 원자력통제정책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전문가다. 현재 IAEA 안전조치 이행 자문단 위원이기도 하다.

원자력 발전기술의 자립
핵연료 기술 국산화 대장정
KAER I 인들의 도전과 성취기록

글/남장수 한국원자력학회 사무총장

에너지 자립이라는 대명제는 우리나라와 같이 부존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나라로서는 국가적으로 절실한 문제이다. 1958년 3월 11일 원자력법이 공포되고 이듬해인 1959년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가 창설되어 제3의 불을 에너지로 이용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 우리나라는 1978년 드디어 국내 최초로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를 가동하고 의욕적인 원자력 발전 계획이 진행되어 왔다.
원자력발전소의 핵연료를 국산화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은 12년 전인 1976년 12월 1일 한국핵연료개발공단(KNFC)이 대덕연구단지 내에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1978년 10월에 성형가공시험시설이 준공되고 핵연료개발에 필요한 시설인 정련·변환시험시설, 조사후 시험시설,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의 건설도 속속 착수되었다.

엄청난 기술료 2,500만C$

“아는 것이 힘이다”
이 말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이야기이지만 피부로 실감나게 느끼지 못한 사람도 많으리라.
그동안 연구하며 축적한 실력을 바탕으로 1979년 7월부터 한국핵연료개발 공단(KNFC)에서는 핵연료 국산화사업 (CANDU 및 PWR핵연료)에 대한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하여 1980년 6월에는 중수로형핵연료 국산화 기술개발 국산화계획(안)을 성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즈음 캐나다 AECL의 코크고, 실력 있는 도둑님(?)들이 Licensing Agreement를 제의해왔고, 댓가로서 기술료 2,500만C$을 요구해 왔다. 이것은 완전히 우리의 기술 수준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긴 것이다.
드디어 1980년 12월 과학기술처는 중수로형 핵연료국산화기술개발을 1981년부터 국가주도과제로 추진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1981년!
이 해는 우리나라의 핵연료 사업의 분수령이었다. 이 해에 정부출연금으로 착수한 중수로형 핵연료 국산화 기술개발사업 (이하 W-project라 한다)은 1982년에 국가주도형 특정연구과제로 선정되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핵연료 설계, UO2 분말제조, 핵연료제조, QA/QC, 노심관리 및 안전성 해석, 노외시험평가, 조사후 시험 및 평가기술의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유능한 항해사 겸 선장의 출현

1982년 3월, 한필순 박사가 대덕공학센터장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전임 이한주 박사로부터 W-project 사업책임자의 바통을 이어받았으며 추진방향의 궤도 수정이 단행되었다.
궤도 수정은 당시 이 과제를 수행하던 각 분야 책임자들로 볼 때는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당초 정부의 과제승인은 시제품개발까지였다. 시제품에 대한 노내 실증시험이 필수적임에도 예산상 반영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KAERI는 정부방침 상 2년간의 R&D만으로 이 사업을 종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의 방침 상 핵연료를 국산화하여 양산하는 일은 막 설립을 추진중이던 한국핵연료주식회사(현 KNFC)의 몫이었다.
그런데 KAERI에 갓 부임한 사업책임자(한필순 박사)는 사업의 최종목표를 완벽한 실증시험을 거쳐 국산화하여 양산공급까지로 확대 설정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상황으로는 어느 누구도 KAERI주도하에 실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 연구소의 기술능력, 경험, 수행능력을 아무도 믿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둘째, 막대한 개발비가 과연 조달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고, 셋째, 연구소가 무슨 양산화를 추진하느냐 하는 주변의 부정적 견해였고, 넷째, 국제간 특허권 문제와 다섯째, 경제성이 있겠느냐는 연구소로서는 감히 해결할 수 없는 외적인 문제와 솔직히 연구원 자신들의 자신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업책임자는 강한 의지와 추진력으로 정부를 설득시켰다. 연구원들에게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 넣어줌과 동시에 사업팀을 대폭 보강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1982년은 필자에게도 개인적으로 많은 의미가 있었던 한 해였기에 당시 상황을 잠깐 짚고 넘어가야겠다.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이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통폐합되어 한국에너지연구소로 개편ㆍ출발하면서 핵연료공단의 많은 연구원들이 속속 연구소를 떠나고 있었다.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이 계속하여 연구소를 떠나가고 있을 때인 1982년 3월 한필순 박사가 대덕공학센터장으로 부임하였다. 부임한 직후 어느날 당시 핵연료성형가공 연구실장이었던 서경수 박사와 필자를 불러 중수로형핵연료 양산사업구상에 대한 검토보고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미 정부 방침상 양산화 사업은 KAERI의 품을 떠난 상황이었기에 될 수도 없는 일을 시키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어, 두 사람은 양산화까지 가는 국산화사업은 KAERI로서는 불가능함을 보고하기로 사전에 의견을 모은 후 그렇게 보고하자, 한 박사는 대뜸 “기술자립의 의지와 의욕이 없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간부라고 앉아 있으니 외부로부터 희망없는 연구소라는 소리를 듣지.”하면서 호통부터 치는 것이었다. 이때 필자는 “별난 사람 다 보았다. 원자력과 연구소에 대해 뭘 안다고 첫 대면에서 호통인가?”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서 박사에게 “나는 핵연료주식회사로 떠날 사람이니 서 박사는 남아서 한번 잘 해 보시오.”하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면 부임하면서부터 한 박사는 이미 중수로핵연료개발 방향과 목표 그리고 오늘의 연구소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KAERI핵연료 검증시험사업” 계약체결

1982년 10월 5일, 이날은 KAERI-AECL간 “KAERI핵연료 검증시험사업”계약서 서명일이다. 핵연료 검증시험이란 핵연료개발단계에서 상용 원자로에 장전하기 전에 시험로에서 연소도 및 개발된 핵연료의 완벽성을 시험하는 일인데 우리나라는 그러한 시험로가 없어 불가피하게 캐나다의 AECL의 NRU원자로에 시험을 하기로 한 것이다.
계약에 서명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당시 연구소 입장에서는 수십만불은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적은 돈으로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AECL측은 300만C$라는 거액을 요구해 왔다. 한필순 박사와 AECL의 연구담당 부사장 간에 수없는 줄다리기 끝에 가까스로 40만C$에 합의하였다. 그런데 장문의 텔렉스가 AECL로부터 날아들었다. 기술자들끼리 합의한 계약서 초안에 AECL측은 자기들의 고문변호사 의견을 넣어야겠다는 것이었다. 향후 KAERI가 양산을 하게 되는 경우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었다. KAERI로서는 자력으로 양산화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응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 박사는 캐나다 향발에 앞서 과학기술처 고위층과 사전협의를 하고 캐나다로 날아갔다.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조건이 추가된 계약에는 서명할 수 없다는 정신으로 AECL측과 대화한 결과 협상은 결렬되었고 귀국을 위하여 몬트리올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렸다. 이때 비행기 출발 1시간 전 AECL의 부사장이 급히 공항으로 계약서를 들고 찾아왔다.
KAERI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 계약서였고 극적으로 공항 대합실에 앉아 계약서의 서명은 이루어졌다. 상대방의 절대적인 양보를 받아낸 것이다. 국제간 계약에서 이런 배짱과 뚝심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다른 속박조건을 KAERI와의 다른 계약에서 찾아내었기 때문인가? 나중에 발생한 이야기지만 양산화를 추진할 때 역시 AECL측은 1982년 6월 KAERI가 AECL과 맺은 기술협력 Master Agreement의 조항을 들고 나오며 끈질기게 기술료를 요구해 왔었다.
핵연료검증사업의 내용은 NRU원자로에서의 조사시험, 조사후시험, 화학분석 외에도 훈련생파견, 전문가초청강좌, 각종 기술자료의 이전이 포함됨으로서 핵심기술을 거의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정말로 싼 비용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40만C$ 용역을 승인해 주었던 이정오 과기처 장관은 그 후 언젠가 KAERI를 방문하였을 때, 그때를 회고하면서 “40만C달러라는 외화가 아까워서 결심할 때까지 사흘간 잠을 못 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투자에 대한 효과를 우려하고, 또 그때는 그만큼 외화가 부족하였던 우리나라의 상황을 강조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핵연료검증사업계약이 체결됨으로서 노내 성능시험이 가능하게 되었고, 연구소 내에는 1982년 12월 뇌외실증시험시설이 김병구 박사팀에 의하여 자력설계 건조됨으로써 핵연료의 노외 성능시험 준비도 완료되었다.

강력한 후원자 박정기 한전사장

사업은 예정대로 추진되었으나 사업예산 확보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과학기술처는 1983년도 KAERI가 요구한 20억 원의 개발비중 6억 2천만원 이상의 예산지원이 불가함을 통보해 왔다. 큰일이었다. 당초에 우려했던 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미 양산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자금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자금원을 찾아나섰다. 한전으로 동자부로 수없이 드나들었다. 6개월 이상의 발걸음 끝에 드디어 한국전력으로부터 1983년 10월 연구소 역사상 처음으로 12억 5천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자금을, 그것도 조건 없는 R/D출연금으로 지원받았다. 이 얼마나 귀중한 돈이며 고마운 돈이었던가! 핵연료 기술자립의 의지를 불태우며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던 100여명의 연구원들은 용기백배하였고 국산화에 성공하겠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 후로도 4년간 계속 매년 비슷한 수준을 출연 받으며 W-project는 완전히 성공할 때까지 사업비에 관한한 순풍에 돛을 달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은 「원자력기술자립을 위한 끝없는 집념과 의지」를 편 당시 연구소 대덕공학센터장 한필순 박사와 「원자력을 통한 에너토피아 건설」이라는 켓치프레이즈를 내건 당시 한국전력 박정기 사장과의 만남이 없었던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으로 우리 KAERI인들은 생각하며 다시 한번 박정기 사장께 감사드린다.

최초의 KAERI핵연료 노내시험 장도에

1983년 2월 26일 천연핵연료 집합체 2개와, 1.58% 농축핵연료 집합체 1개를 노내시험을 위해 카나다 AECL의 CRNL (Chalk-River National Laboratory)에 보냈다.
KAERI가 제조한 노내시험용 핵연료는 AECL측의 노내장전시험전 엄밀한 검사 후 1983년 3월 30일 캐나다 NRU원자로에 이상 없이 장전되고 약 7개월의 연소시험을 무사히 마쳤으며 조사후 시험결과 농축핵연료는 월성원전의 평균 연소도인 168MWh/Kg-U보다 훨씬 높은 202MWh/Kg-U나 연소되었고 천연우라늄 핵연료는 124MWh/Kg-U가 연소되었음에도 완벽함이 입증됨으로써 세계적 공인을 획득하게 되었다.
핵연료 검증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어 조사후 시험이 수행되던 W-Project는 또다시 새로이 김병구 박사를 사업책임자로 맞게 되었다. 당시, 사업책임자였던 한필순 박사가 제4대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신임 사업책임자 김병구 박사는 당시 노외실증시험 분야를 책임 맡고 있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모든 연구원들은 배전의 노력으로 양산공급개발에 따른 많은 난제들을 찾아내고 또 해결하기 위한 출항을 시작하여 쉬지 않고 노를 젓기 시작하였다.

정부, 중수로형핵연료 국산화 공급방침결정

1984년 중반부터 핵연료양산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상용로에 우리 핵연료가 시험장전되면서, 1985년부터는 KAERI의 기존 년 10톤U 규모의 시험공장을 년 100톤U 규모로 증설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월성원전 1기분을 전량 공급할 수 있는 규모이다. 이 공장은 생산 Line의 일부증설로도 년 200톤U의 규모가 가능한 시설이다.
1985년초부터 동자부, 과기처, 한전, KAERI간에 국산핵연료 양산공급에 따른 원칙과 공급가격등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1985년 4월 30일 동력자원부는 아래와 같은 조건의 중수로핵연료 국산화방침을 결정하여 KAERI에 시달하였다..
첫째, 핵연료 성형가공비는 국제가(U$ 35.80)의 120%까지 인정.
둘째, 외국의 특허문제를 해결하고
셋째, 사업주체를 ’89년에 재검토할 것이며
넷째, 원가절감방안을 수립할 것
이렇게 양산공급을 향한 난제가 첩첩산중일 때 김병구 박사는 또다른 연구소의 대형사업으로 착수된 NSSS 설계사업책임자로 전보되고 서경수 박사가 제 4대 사업책임을 이어 받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85년 당시 과학기술처장관이던 김성진 박사에 대한 이야기다. 1982년 어느 여름날, 김 박사가 개인적으로 휴일을 이용, KAERI를 방문, 약 4시간에 걸쳐 시설을 자세히 둘러 본적이 있었는데, 시찰후 떠나는 자리에서 시설을 안내하던 간부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여러분들의 표정에서 원자력기술자립에 대한 의지와 진지함을 느낄 수 있어 많은 감명을 받았다.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여러분들을 언제라도 돕고싶다.”며 원자력기술자립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나타낸 바 있었다.
그로부터 약 3년후인 1985년 초 김 박사는 과학기술처장관으로 부임하여 1년여의 짧은 재임기간중 원자력기술자립사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현재도 원자력위원으로 재임하면서 계속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고 있어 KAERI인들은 항상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KAERI핵연료, 월성원전에 시험장전

1985년 5월 17일 KAERI와 한국전력간에 월성원자력발전소에 KAERI핵연료를 시험장전하기 위한 핵연료 부분공급 계약이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인도물량 : 1984, 1985년 각 24집합체
•가격조건 : 우라늄가격(단, 가공비는 제외)
이로써 KAERI는 상용원전을 이용하여 국산핵연료의 실용화시험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록 극히 적은 물량이지만 한전으로서는 처음으로 국산핵연료로 발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84년 9월 8일 최초로 국산핵연료가 월성원자력 발전소에 장전 되었다. 1985년 9월 30일은 1년전 월성원자력 발전소에 시험 장전한 핵연료를 마지막으로 인출한 날이다. 평균연소도가 164MWh/Kg-U이었으니 CGE핵연료에 비해 손색이 없음이 입증된 것이다. 이로써 한전은 KAERI핵연료의 성능과 완벽성을 신뢰하게 되었고 양산을 위한 각종 지원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장장 15년 격전, 최후의 승리자

- 2,500만 C$이 0C$로 -
1980년 당시 우리나라 원자력과학기술계를 형편없이 얕잡아 보고 2,500만 C$의 기술료를 요구하던 캐나다 AECL측과 1985년말에서 1986년초에 이르는 동안 KAERI의 중수로 핵연료 양산 공급에 따른 기술료 문제와 관련하여 또다시 협상이 진행되었다.
•ACEL, 300만C$을 요구 - 한필순 소장의 일언지하 거절,
•다시 상징적 의미의 10만C$요구 - 이것도 거절,
•드디어 1986년 1월 29일, 기술료 0 C$와, 대등한 위치에서의 R/D결과의 상호교환을 내용으로 하는 기술도입 계약이 체결되었다. 정말 아는 것이 힘이요, 실력이 무기임을 실감케 해 주었다.
서경수 박사팀의 집념어린 노력으로 1987년 7월부터 중수로 핵연료는 본격적인 양산공급에 들어감으로써 Lab에서 양산까지의 장장 15년, 본격적인 사업착수에서부터 양산까지의 7년 6개월은 끝이 났다.
지금까지 핵연료 성형가공 및 QA/QC 책임을 맡아 묵묵히 할 일을 다하던 서경수 박사, 그는 핵연료를 위하여 태어나고 핵연료에 생명을 건 핵연료국산화 개발의 산 증인이다. 최근 위암이라는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핵연료기술개발을 위하여 남긴 일화와 투병은 「인간승리」로서 일간신문에도 소개된 바 있다.
그 동안 우리가 얻은 교훈은 너무나 많다. 원자력기술자립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끈기와 의지가 필요하고 집결된 다수인의 노력과 도움이 필요했던가! 현재 우리 연구소에서 수행중인 많은 대형개발사업의 책임자와 참여자 모두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당부하고 싶다.

지원해준 분들…역대 과기처, 동자부장관

W-Project, 1981년에 착수하여 오늘의 성공이 있기까지 이 사업은 과학기술처, 동력자원부, 한국전력에 근무한 많은 분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특히 1980년부터 1985년 초까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재직한 이정오 박사는 1980년 말 동사업의 착수를 직접 지시했던 특별한 인연과 1982년 7월, 오늘과 같은 사업 방향으로의 전환 승인, 그리고 원자력발전기술 자립의 강한 의지로 해마다 특정연구개발비 중 많은 몫을 지원해 주었다. 또한 김성진 장관도 각별한 관심으로 지원해 주었음을 앞에서 언급하였다. 동력자원부 장관이었던 최동규 장관, 최창락 장관, 그리고 이봉서 장관도 원자력발전기술 자립의 의지를 실천에 옮기면서 W-Project는 물론 KAERI의 기술자립 사업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한국전력의 박정기 전 사장, 1983년부터 1987년에 이르는 재임기간 중 어느 누구보다도 원자력발전기술 자립을 강조하면서 KAERI를 아껴주고,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준 사실은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다.
과학기술처 원자력국, 동력자원부 원자력발전과, 한국전력 핵연료과 및 월성원전 현장에 근무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무적으로 흔쾌히 도와 주었다.
이 모든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KAERI인의 원자력발전기술 자립 노력중 첫 번째 사업의 하나인 중수로형핵연료 자력기술개발 국산화 사업은 성공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1987년 7월 양산 공장 준공에 즈음하여 당시 이태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원자력발전기술자립 사업 첫 성공을 역사적으로 길이 기리기 위하여 KAERI단지 내에 핵연료 공원을 만들고, 대통령으로부터 ‘원자력은 국력’이라는 휘호를 받아 주었다. KAERI 인들은 이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채찍과 성원이 있기를 기대한다. (다음호에 계속)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5호 (2015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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