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S 동아방송의 특별수사본부…

반공포로 가족사 일기
간첩 수사극 애청 추억
DBS 동아방송의 특별수사본부…
KBS 사회교육방송도 열성 청취


글/ 김대성(평택거주, 반공포로 2세)

황해도 봉산 출생의 반공포로 김명근(金明根)씨는 1남 3녀를 두고 66세로 지난 1989년 별세했다. 그의 유자녀들은 하나같이 선친으로부터 반공 애국심을 물려받았다. 특히 아들 김대성(金大成, 44)씨는 경기도 평택에서 노모와 함께 어렵게 살면서 수시로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글을 보내온다. 최근에는 1970년대 특별수사본부의 간첩사건 수사극을 애청했던 사연을 보내왔다. (편집자)

▲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방송된 라디오 동아방송(DBS)의 대공수사실록드라마 ‘ 특별수사본부’ 시리즈

반공포로 간첩수사극 애청

1970년대 부모님이 애청하시던 동아방송(DBS)의 간첩 수사극이 5공의 방송 통폐합으로 없어졌을 때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아버님은 늘 라디오를 옆에 두고 심야프로인 간첩 수사극을 애청하셨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필자는 이따금씩 잠에서 깨어나 보면 아버님께서는 남파간첩 관련 수사극을 들으며 열심히 메모하셨다. 어머님도 옆에서 함께 청취했다. 아버님은 북쪽에 가족을 남겨두고 온 실향민이지만 어머님은 이곳 평택에서 만나 혼인한 사이다.
아버님은 인민군에서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국군에 입대하여 3년간 복무하고 제대했다. 당시 남한에는 혈육 한 점 없어 중대장이 안내해 준 무연고 평택에 정착하여 머슴살이 끝에 새 어머니를 만나 고달픈 삶을 살다 가셨다.
어머님은 이 같은 아버님의 한 많은 생애를 잘 알기에 늘 간첩관련 방송이나 남북이산가족 프로를 함께 애청하며 한숨과 눈물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지금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어머님 혼자 외롭게 생활하며 이따금씩 ‘바깥양반’이 애청하신 라디오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대공수사실록 애청하다 반공가족

당시 아버님이 애청하신 동아방송은 매일 밤 11시 10분부터 20분간 특별수사본부 대공수사실록이었다. 아나운서가 “남파간첩 아무개 사건 수사기록을 극화했다”는 안내 멘트를 하면 곧이어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고문이나 취조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간첩 김소산’ 이야기였지만 사건의 내용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아버님이 존경하신 오제도 반공검사께서 부하 직원에게 지시하신 대목이 기억난다. “끝까지 철저히 캐내야만 해. 어물쩍 넘어가서는 절대 안돼. 알겠어…”
이 같은 간첩 수사극 방송을 부모님 따라 틈틈이 애청하다보니 어느새 우리집안은 반공 애국심 가족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됐다.
당시 평택군 청북면 어연1리의 우리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단칸방에 부모님과 4남매가 함께 기거했다. 아버님은 석유 등잔불 아래 라디오 볼륨을 최대한 줄여 조용히 간첩 수사극을 청취했다. 그렇지만 종종 잠결에도 방송을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님은 방송이 시작되기 전 미리 메모지를 준비하여 방송 내용을 요약 메모하는 습관이 철저했다. 다음날 저녁 가족이 함께 저녁밥을 먹는 시각에 방송내용을 꼭 들려주셨다. 이 시절 아버님의 메모습관을 그대로 배워 지금도 각종 시사프로를 시청한 후 내용을 요약 메모한다.

▲ 1980년 장안의 화제였던 드라마 ‘ 특별수사본부’ 의 마지막회를 녹음하고 있는 DBS 제작팀들.

DBS 고별방송날의 부모님 눈물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방송 통폐합으로 동아방송이 KBS로 흡수되고 말았다. DBS 방송국이 고별방송 하던 날 부모님께서는 더 이상 간첩 수사극을 들을 수 없게 됐다면서 눈물을 쏟았다. 초등학교 3년생인 필자도 절로 눈물이 나와 훌쩍거렸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요즘엔 간첩을 잡는 사람이 없고 잡아도 무죄로 판결되니 마치 세상이 뒤집힌 꼴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과거의 간첩사건들이 이제 와서 무죄로 뒤집혀지고 국민 세금으로 국가가 거액을 배상하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묻고 싶다. 이럴 때 아버님이 생존해 계신다면 얼마나 한탄하실까.
그동안 대공수사기관들이 간첩 잡으려다 정치적으로 많은 곤욕을 당한 모습을 지켜봤다. 또한 판·검사 및 변호사 등 사법계에도 친북·종북성향이 적지 않다는 소문이니 어쩌다가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산가족찾기 방송 매일 청취

부모님께서는 KBS의 사회교육방송도 15년이나 열성으로 애청하셨다.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2시간 동안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꼭 청취하셨다.
아버님은 이북 고향에 아내와 딸자식 및 여러 형제들을 남겨두고 내려왔기에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목을 걸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산가족 관련 기쁜 소식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KBS 라디오의 사회교육 낮 방송시간 때는 라디오의 건전지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고 일터로 나가셨다. 시장에 내다 팔 산나물을 손질하던가 텃밭 일을 하시면서도 곁에 라디오를 두고 청취하셨다. 낮방송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리랑과 경복궁 타령이 나오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휘날리는 태극기’가 합창으로 3절까지 나온다. 이때 아버님은 나직한 음성으로 따라 부르며 흡족해 하셨다.
그 뒤 재외동포 소식이 나오고 중동 건설 근로자들 이야기와 새마을운동 소식도 귀담아 들었다. 아버님은 이때 대한민국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소식이 북녘으로도 전해질 것으로 믿었다.
저녁 6시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으로 아버님이 가장 간절히 기다리는 시각이다. 방송이 시작되면 아버님의 애창곡이 흘러나온다.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희 희망은 무엇이냐’는 희망가를 따라 부르시는 아버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산가족 찾기 대목에서는 중국과 소련에서 보내온 동포소식이 나오고 전화 인터뷰도 연결된다. 아버님은 매년 2~3차례나 이북에 두고 온 가족들의 안부를 듣고자 우편을 보냈지만 한 번도 채택되지 않아 실망했다. 끝내 아버님은 북에 있는 가족들의 생사도 모른 채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셨다.

돌아가신 후에 KBS 한민족 방송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2009년에야 KBS 사회교육방송 후신인 KBS 한민족 방송이 ‘이제는

▲ 1983년 7월 1일 KBS이산가족찾기 생방송에서 33년만에 상봉한 남매.

만납시다’라는 타이틀로 평택 우리집까지 출장 왔다. 작가와 녹음기사가 어머님과 인터뷰를 통해 돌아가신 아버님 일생의 한(恨)을 담아가 2주 뒤에 방송했다.
이날 녹음할 때 어머님은 계속 울음 섞인 육성으로 “바깥양반 생전에는 한 번도 말 못해 본 사연”이라며 한탄을 쏟아냈다. 방송국 사람들이 돌아간 뒤에도 어머님은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필자는 반공포로의 자식으로 왜 아버님께서 고향에 가족을 두고 남으로 내려오셔야만 했는지 무한히 한탄한다. 또한 왜 지금까지 이북에 있는 아버님 가족은 생사도 알 수 없는지도 한탄한다. 더구나 아버님은 평생 공산당을 저주하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에게 반공 애국심을 대물림해 주셨는데 아직도 이 나라에 친북 종북세력이 활개를 치고 있는지 분노한다.
지하에 계시는 아버님의 한을 풀어드리지 못하는 죄인의 심정으로 오늘도 반 대한민국 세력을 규탄하는 메모를 차곡차곡 기록해 둔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5호 (2015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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