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곡(思母曲)

글/金 淑 (김숙 본지 상임 편집위원)

고려가요 중 ‘사모곡’이 있었다. 호미도 날이언마라난...... (이하생략)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버지도 어버이시지만 이 세상에서 어머니같이 나를 사랑하실 분이 없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에게는 올 해로 89세 된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고령(?)임에도 아직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도 맑은 편이다. 시력도 청력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나름대로의 건강을 잘 유지해나가고 있으니 그만하면 자식의 입장으로는 더 바랄 게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여태까지는 어머니나, 자식인 필자나 주변 어르신들이 겪는 노환의 애환을 속속들이 실감하며 살지는 못하였다.
평소 어머니는 정치, 경제를 비롯하여 문화, 예술은 물론 시시콜콜한 연예인들의 사생활까지 낱낱이 기억한다. 어느 때는 어머니의 그런 점이 너무 지나치다 싶어, 제발 쓸데없는 데에 관심 갖지 말라고 화를 낸 적도 있다. 그랬을 만큼 어머니의 기억력이나 정보수집 능력은 필자보다 늘 한 수 위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건 어머니의 관심도 관심이었을 테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어머니만의 노력이 숨어있었음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얘기는 지금부터다. 어머니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처럼 어머니의 기력이 눈에 띄게 쇠약해져 심지어 횡설수설하기에 이르렀다.
말로는 어머니가 건강하다고 했지만 관절도 약해졌고 혈압이나 당수치도 높은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살아 온 세월만큼의 노화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맥락에서다.
인간의 삶속에 어느 누구도 ‘생로병사’를 떠나 살 수는 없으므로 노약자의 육체적인 병듦은 생활의 한 부분이고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수순이라 한들 영판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아픔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을 잃음으로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이 전체를 상실하는 가혹한 슬픔이 없기만을 바라는 심정이다.
바로 엊그제 일이다. 그날도 언니와 전화통화를 했었다. 필자의 자매간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의 일과가 자매간의 통화로 시작되고 통화로 마무리 된다. 언니와 통화를 끝내고 막 저녁밥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언니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전에 없이 다급한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이상하니 통화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어머니께 출발한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는, 옆집에 혼인잔치가 있는지 시끄러워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언제나 어머니 곁에 있지는 못하더라도 하루 한 번 이상은 꾸준히 통화하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입장이었다. 옆집의 결혼얘기란 그야말로 엉뚱하고 느닷없었다. 울먹이며 어머니에게 정신 차리라고 소리 질렀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꾸 현관에 발길질을 하고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의 두서없음에 가슴이 방망이질 치며 어지러웠다. 착잡해진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머니께, 필자가 도착할 때까지 통화하자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려웠다. 어머니가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게 붙잡아두자는 심산이기도 했다. 친정인 사당에 도착할 때까지 약 한 시간 내내 어머니와 통화했다. 어머니는 통화를 하는 동안 다소 진정을 찾았음인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한 모습으로 문을 열어주며 필자를 반겼다. 방에 앉자마자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울면서 어머니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너무도 작아져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무턱대고 서러웠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필자를 달랬다.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필자는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한 설움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있음에 비해 어머니는 “그렇게 울면 눈 부어 못쓴다... 계속 울면 머리 아파 안 된다... 그러니 어서 눈물 거둬라...”하며 연신 필자를 달랬다.
참으로 슬픈 동상이몽의 현실이었다.
뒤이어 언니가 달려왔다. 우리 자매의 참담한 심정을 눈치 채지 못한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부스러지고 말 마른 잎 같은 손으로 두 딸의 손을 번갈아 잡고 힘없이 토닥거렸다.
어머니의 눈짓이나 손짓, 표정이나 몸짓, 목소리나 숨소리마저도 어머니를 통해 나오는 모든 것들이 그저 눈물겨웠다. 울면서 천정을 보았다. 어머니가 예전처럼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흥미롭게 얘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세상 누구보다 분명하고 똑똑한 어머니의 정신을 꼭 다시 찾아달라고 하나님께 빌고 또 빌었다.
이제 설이 되면 어머니의 연세가 아홉수에 해당된다. 아홉수가 안 좋다는 속설이 있다. 마음이 약해지다 보니 예전에는 안중에도 없었던 속설마저 떨쳐버리지 못하고 굳게 믿는다. 휴... 남자한테만 해당된다는 말이었음을 기억해내고 간신히 가슴 쓸어내린다.
어머니가 했던 앞뒤 안 맞는 말이 제발 악몽이었기를 기대한다. 꿈에서 깨어나 예전의 분별력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자신에 찬 눈빛으로 자식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불효자식의 기도가 확실하게 하늘에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6호 (2015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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