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자유수호 혈전사
실록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작전 영웅들의 희생을 추모하며

글/金武一 (김무일 해병대 예비역 대위. 前 현대제철 부회장)

장진호(長津湖)는 장진江을 댐(Dam)으로 막아 건조된 인공호수다. 장진江은 북한의 함경남도 장진郡을 끼고 돌아 개마고원 하록을 흐르는 江으로, 북위 40도 29분, 동경 127도 12분에 위치한다. 이곳의 겨울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정평이 난 곳이며, 그 면적은 대략 64평방킬로미터로 여의도 면적의 약 22배에 이른다.
‘장진호전투’는 美軍창설 240여年 歷史上, 가장 혹독한 추위 속에서 최악의 고전을 금치 못했던 참혹한 전투로 기록된다. 당시 뉴스위크紙는 ‘진주만 피습이후 최악의 패전’이라고 까지 혹평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어, 美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었다. 더군다나 생전에 보도 듣도 못한 지구 반대편의 생소하고 조그만 나라에서... 그때의 우리나라의 연간 국민소득은 불과 $57에 지나지 않는 세계에서 두 번째의 최 빈소국이었다.(지난해 $28,200불 달성.)

중공군 7개사단 포위속 18일간 후퇴작전

이 전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美 해병 제1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당시 도피 중이던 북한정권의 임시수도인 ‘강계市’를 점령하려다가 오히려 인근의 산악지대에 매복 중이던 7개사단 12만명의 중공군 제9병단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를 뚫고 기적적으로 성공한 후퇴작전이다. 이날 연합군으로선 처음으로 맞닥뜨린 중공군은 사전에 선전포고도 없이 불법으로 개입한 낯선 군대였으며, 아군 병력은 이들에 비해 불과 10분의 1수준인 1만2천여명에 불과 하였다.
그리고 美 해병 제1사단과 함께 참전한 美 육군 제7사단 31연대 전투단의 경우를 든다면, 이 치열한 전투가 끝난 후, 한국군 카투사 875명을 포함한 3,288명의 병력 중에 생존자는 겨우 3분의 1수준인 1,05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중에 전사자로 확인된 숫자는 고작 300여명뿐이었고, 나머지 1930여명은 생사조차도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65년이 경과된 이때까지 언제 어디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 만큼 처절한 전투였었다.
영하 3,40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 치러진 이 후퇴 작전은1950년 11월 26일부터 시작하여 다음달 12월 13일까지 꼬박 18일간에 걸쳐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전개됐었다. 이 지역의 이름인 ‘長津’은 영어로는 ‘Chosin’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로 된 변변한 지도조차도 없어 일본어 독음에 따랐으며, 주력부대인 美 해병 제1사단 外에 美 육군 제7사단의 일부 병력과 영국군 해병대 제41 ‘코만도’부대도 함께 참전하였다.

피난민 9만8천명 구한 흥남철수작전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美 해병 제1사단은 자신의 열배에 달하는 12만명의 중공군에 남하

를 필사적으로 지연 시켰으며, 철통같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용전분투 끝에 돌파하여 흥남에 도착하였고, 흥남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흥남 철수작전은 193척의 군함으로 연합군 병력 10만5천여명과, 피난민 총9만8천여명, 도합 20만3천명의 고귀한 생명을 남쪽으로 무사히 탈출시킨 인도적이며 역사적인 철수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규모의 해상 철수작전으로, 공산화된 북한을 탈출코자 운집한 수많은 피난민들을 승선시키기 위해 이미 선적한 중장비와 실탄, 포탄은 물론 각종 차량과 무기류 等을 전부 바다에 버리거나 폭파 시키고 철수한 작전을 말한다. 이는 당시 이 작전의 참모장이던 ‘윌리엄 포니’대령이, 이 부대의 한국인 통역관이었던 현봉학(1922~2007)씨의 간청으로 美 제10군단장이었던 ‘에드워드 앨먼드’소장을 설득한 끝에 피난민 전원을 무사히 철수시킨 역사적인 작전이다.
기록에 의하면 12월 12일부터 24일 까지 9만 8천여명의 피난민이 193척의 군함에 분승해 남하 하였다. 24일 부두를 떠난 마지막 수송선인 ‘매러디스 빅토리아’號는 정원이 2천여명에 불과 했지만 탑승정원에 일곱 배인 1만4천여명의 피난민을 태웠다. 대신 2백톤이 넘는 실탄과 장비, 500여개의 포탄과 300드럼의 유류 等을 폐기하고 항구를 폭파했다. 이 배는 동월 25일, 거제도 장승포에 무사히 도착해 美軍들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기뻐했단다.
이때에 현봉학씨와 ‘앨먼드’장군과의 기묘한 일화도 소개 된다. ‘앨먼드’소장이 묻기를, “그 유창한 영어를 어디서 배웠소?”라고 물으니, “버지니아州의 리취먼드 의대 재학중 조국에 전쟁이 터졌다 하여 즉시 달려왔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Oh my god..!, 그곳은 나의 고향인데 당신의 고향은 어디요?”, “군단장님께서 주둔하고 있는 함흥입니다.” 하늘이 이들을 도운 것이다.
‘앨먼드’장군은 훗날 이렇게 회고 하였다 한다. “그 청년은 아마도 9만8천명의 생명을 救하라는 하느님의 게시를 받고 이세상에 왔는지도 모른다.”라고... 당시 28세의 현봉학씨는 종전후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바니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에서 의대 교수로 활동하다가 2007년, 79세를 일기로 미국 ‘뉴저지’에서 별세했다. 이리하여 그의 별명은 ‘한국판 쉰들러’가 되었다.
이렇듯 파란만장했던 흥남철수작전을 개시한 날은, 바로 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1.4후퇴를 감행한 날이기도 하다. 꼭 65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이 지연작전으로 하여금 선전포고도 없이 불법 개입한 이들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케 함으로서 부득이 후퇴하는 한국군, 유엔군, 피난민 等 20여만명을 남쪽으로 순조롭게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美 8군이 중공군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누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켜냈는가

한편 장진호 전투에서 보여준 유엔군의 전략적인 육해공 합동작전으로, 그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아 중공군의 피해는 7개사단이 거의 궤멸에 가까운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그 잔여부대를 재정비 하는 동안, 함흥지역의 진격은 무려 2주간 정도 지연시킴으로서 연합군 작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이 막대한 타격이 세상 밖으로 알려진 것은 종전후 60여년이 지난 지난해, 중국정부의 비밀자료 보안해제 문건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 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동안에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던 한국군 병사 카투사부대의 용전도 알려 졌는데, 그들이 이부대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美 육군 제7사단 31연대 전투단의 뼈저린 희생과 분전도 역사의 그늘 속에 영원히 가려질뻔 하다가 동시에 밝혀졌다. 그렇게 지켜진 자유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자유수호를 위해 희생된 연합군의 젊은이들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북한군이 38線을 넘자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반도로 달려 왔다. 그후 1953년 7월 27일, 37개월 만에 휴전이 될 때까지 그 숫자는 무려195만7616명이었다. 독립한지 5년도 채 안된 이름도 몰랐던 신생국을 救하려 달려온 그들에게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보답했는가..?. 그중에 주축인 미국의 청년들은 美 해병기지인 ‘샌디아고’기지에 집결하는데 보름, 병력 수송선으로 태평양을 건너는데 보름이나 걸렸다. 死地로 向하는 한 달간의 긴 旅程 동안, 그 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나라로 왔을까..?. 그중에 수많은 젊은이들은 이 땅에서 숨을 거두거나 혹은 종신 불구자가 되어 젊은 청춘을 초개처럼 불살라 버린 것이다.
필자는 지금 이 순간, 지난날에 필자의 비망록에 남겨진 다음과 같은 실화를 소개 하고자 한다.
“미국의 유명한 Show 진행자 Jimmy Durante Story... 인천상륙작전 60주년..!. 그날을 기려 지구의 반대편에서 참전용사들을 위한 자선 위문공연을 마련, 수차례 출연요청에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한다. 단 몇分이라도...거듭된 부탁에 어렵사리 승락, 막상 행사 당일 무대에 올랐던 그는 웬일인지 한참을 지났어도 내려올 생각을 않고 공연은 계속되었다. 공연이 끝난후 사연을 물으니 차마 끝낼 수가 없었단다. 무대의 맨 앞줄에 각각 한팔씩 잃은 백발의 노병이 남은 한팔씩 서로 부딪치며 천진스럽게 박수를 치더란다. 그들은 꽃 같던 젊은 시절, 인천상륙작전에서 부상을 당해, 종신 불구자가 된 美 해병대의 퇴역 상이군인이었다.”
바로 그들이 오늘에 대한민국을 지켜준 것이다. 금년은 대한민국 광복 제70주년을 맞는 해이다. 만일에 지구 방방곡곡에서 한 달을 걸려 달려온 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이 나라는 어찌 되었을까 ?. 아마도 우리는 지금쯤 김정은 치하에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핍박과 노동에 시달리며 굶고 있을지도 모른다. 從北이니 主思派니하는 정신병자들을 근절하는 원동력은 통일진보당 해체의 헌법재판소에 용단도 수훈이겠지만, 피로 얼룩진 장진호 전설의 역사를 돌이켜 기억함에 간절히 호소를 해 본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의 이 自由와 국가 발전이 과연 어느 누구의 숭고한 희생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리고 오늘날에 눈부신 조국발전의 원동력이 과연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지켜야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르쳐 주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1950년 10월 26일, 開戰 4개월 반전 북상

북한의 남침 도발 4개월로 접어든다. 족보조차도 없는 하찮은 북한군을 상대로 유엔군이 참전만 하면 단숨에 간단히 끝날 줄만 알았던 전황은 의외로 길어졌다. 뿐만 아니라 수세에 몰린 연합군은 밀리고 밀려, 망신스럽게도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전선에 까지 밀린 채 몇 주째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고, 가면 갈수록 희생만 늘어갔다. 전투 지정학적으로 판단컨대 만일 이곳에서 반전의 계기를 잡지 못 할 경우, 결국엔 한반도를 포기해야할 절체절명의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수세로 몰린 협소한 이 지역에 아무리 수많은 병력을 투입한다 해도 돌파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비유컨대 독수리가 제 몸 크기의 여우나 늑대정도는 겨우 움켜쥘 수 있을지 몰라도, 돼지나 하마크기의 동물을 들어올리기엔 역부족인 형국과 같은 것이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연합군의 전면 철수계획 까지도 이미 수립을 끝낸 상태의 이 시점에서, 감히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후방 타격의 인천 상륙작전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大 역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유엔군의 진격속도는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파죽지세로 北上한다. 그러나 수도 서울 탈환과 평양 수복에 자신감을 얻은 맥아더 사령부는 이쯤에서 어이없는 오판을 저지른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전혀 무시한 채 압록강을 向해 대대적인 김일성 체포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극동군 사령부는 한반도 북부의 험난한 지형과 기후, 그리고 중공군 개입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이 압축 포위작전(massive compression envelopment)을 실행에 옮겨, 이 작전의 주공을 美 해병 제1사단에게 부여한다.
美 해병사단은 유엔군의 북진속도에 맞추어 서부전선 배치부대와 협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진호방면의 공격을 위해 10월 30일, 元山만에 상륙한다. 절기는 어느덧 11월로 접어들어 계절적으로 맹추위가 시작되었지만 이들의 복장은 안타깝게도 하복차림 그대로였다. 여름 한철이면 간단히 끝날 줄로만 알고 마치 뒷동산에 ‘피크닉’이나 가는 차림으로 참전했던 것이다. 그해의 맹추위는 유난히도 빨리 왔다. 참전 초기 동부지역에 주둔했던 美 제10군단과 제1 해병사단은 눈보라를 헤치며 장진호방향으로 힘겹게 북상한다. 11월初, 중공군의 참전과 혹한에 밀려, 美 제10군단 병력은 신속히 중부지역으로 철수하고 美 해병 제1사단만 잔류한다.

11월 2일, 평양사수 전차대대와 水洞지구 전투

유엔군 참전이래 이날은 매우 중요한 날로 기록된다. 함흥市의 북방에 위치한 水洞마을 외곽에서 美 해병 제7연대 소속 제1대대와 인민군 제344 전차대대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차부대는 평양을 사수하다가 유엔군에게 밀려 후퇴중 이었으며, 이 전투에서 사로잡힌 포로중에 중공군 탱크兵이 발견되어 이들이 한국전에 개입한다는 첩보가 비로소 사실로 확인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東京에 위치한 유엔군 극동군 사령부(FEC. Far East Command.)는 美 CIA와 기타 정보수집기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에서 160km나 떨어진 水洞지구에서 사로잡힌 중공군 포로는 일부 소수의 지원병일 것이라고 가볍게 속단하면서, 그 이튿날인 11월 3일, 정보참모 윌로비(Charles A Willoughby.)소장으로 하여금, 2만명에서 최대 3만명 가량의 중공군이 북한지역에 들어와 있다고 별거 아닌 표정으로 발표하였다. 實은 그보다 열배인 30만명인데...
실제 중공군 참전부대의 단대호는 제9병단, 제13병단으로 예하 각각 12개사단, 18개사단으로 도합 30개 사단의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美 해병 7연대는 死力을 다해 5일간의 전투 끝에 신승을 거둔다. 중공군과의 최초에 승리였다. 3천여명의 연대 병력중 아군 전사자 50여명과 부상자 200여명에 반해, 중공군의 전사자는 무려 1천5백여명으로 파악되었다. 이 승전고는 중공군 수뇌부의 간담을 서늘케 한 반면, 반전 분위기의 미국 국민들을 설득케 했다.

11월 7일~26일 영하 40도 장진호전투 서막

水洞지구전투 이후, 중공군 일부 부대는 지리멸렬하여 일시적으로 후퇴했고, 美 해병 7연대는 며칠간 소단위 부대와의 탐색과 수색전을 벌리며 북진하여 11월 7일, 폭설이 휘 날리는 개마고원 황초령에 도착해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일주일후인 15일에는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를 거쳐, 25일에 장진호 서측 ‘유담리’마을로 진출했다.
연합군에게 호되게 철퇴를 맞고 일시 후퇴했던 중공군 제 9병단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보복에 나서 11월 25일에 美 8군의 우측방을 공격하는 동시에, 양면의 인해전술로 물밀듯이 몰려와 한국군 제 2군단을 초토화시켜 붕괴로 몬다. 같은 날 칠흑 같은 밤에, 美 육군 제 7보병사단도 敵의 야간기습을 받아, 전투첫날 무려 4천여명의 병력과 사단 포병장비의 대부분을 잃는다. 한국전쟁 역사상 처절을 극한 ‘장진호 전투’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26일을 맞는다. 폭설이 몰아치는 이날의 기온은 아직도 변변한 월동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기온은 급강하 하여 체감온도가 무려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살을 후벼 팔 듯한 이런 혹독한 추위는 아마도 이들 벽안의 젊은 해병대원들에겐 난생처음 겪는 추위였을 것이다. 더욱이 이름도 모르는 이국 전선에서...
이날, 美 해병 제7연대는 장진호를 중심으로 서측방에 포진하였고, 제5연대는 ‘하갈우리’북방을, 그리고 제1연대는 사단본부 후방을 담당하는 형태로 배치됐다. 포진을 끝낸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은 즉시 월동 보급품의 신속한 추진과 비축을 위해 야전 활주로를 긴급히 조성한다. 한편 서부전선으로 진출했던 중공군은 11월 24일, 제3야전군 예하 12만명의 제9병단과 제40야전군 예하 18만명의 제13병단 等, 30만명을 美 8군 전면과 美 제10군단 예하 제1 해병사단 전면에 배치하였다.

11월 27일 중공군, 미8군 포위 人海戰術

세계 戰史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人海戰術로 유엔군의 주력부대인 美 8군이 그들의 포위망에 갇혔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것이다. 이에 美 해병 제1사단은 제10군단장 ‘앨먼드’장군의 명령을 받아 해병 제5연대를 주공으로 하여 美 제8군의 구출작전에 투입된다. 그리고 포위 기동부대의 북측 날개로써 제8군을 포위하고 있던 敵을 격퇴하고 8군과 함께 낭림산맥의 서측방을 함께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계획과 달리 포위작전의 방어부대인 美 8군이 중공군의 물밀듯한 파상 공격으로 중지하고 후퇴하기에 이르른다.
이때 중공군은 해병사단의 진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6만여명의 제 9병단 예하 8개 사단을 장진호에 집결케 하고, 이중 3개 사단은 유담리에 대한 공격을 준비한다. 그리고 또 다른 1개 사단(80사단)은 하갈우리 포위를 위해 해병 제1사단의 우측 방어를 하고 있던 美 육군 7보병사단 예하 31연대 전투단에 대해 공격을 개시한다. 당일 연합군 병력은 해병대와 해군 포함 13,500명과 육군 4,500명에 불과 했다.
이날 밤 9시경, 중공군 제 79, 89 혼성사단은 유담리를 에워싼 고지 능선을 따라 공격을 개시했고, 59사단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요충지인 덕동령으로 공격해왔다. 수적으로 워낙 우세한 중공군 2개 사단의 공격으로 인해 美 해병 1사단 7연대 E중대와 중공군 79사단 236연대가 상호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아울러 이날 밤 11시부터 장진호 동측에 이제 막 진지구축을 완료한 美 육군 제7사단 31연대전투단(일명;Task force maclean) 2개 대대에도 중공군 80사단과 81사단 1개연대, 총 12개 대대병력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는다.
또한, 하갈우리와 고토리에 주둔한 해병 제1사단 지휘본부와 해병 제1연대도 중공군 58,60,76,77사단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고, 이때 장진호 동측에 산개해 있던 美육군 보병 32연대 산하 3개 대대는 유무선 통신마저도 두절된 채 敵과 맞서야 했으며, 해병대와의 협조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공격으로 32연대 1대대, 후방 지휘소의 제31연대 전차중대, 동 3대대, 그리고 제 57야전 포병대대가 큰 피해를 입자 이때서야 美 제10군단은 자신들이 중공군이 쳐 놓은 덫에 걸려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11월 28일 중공군 야습, 장진호 동측 고립무원

중공군은 27일 밤부터 28일 새벽까지, 美 해병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많은 高地를 탈취하였다. 이틀에 걸친 야간 공격으로 중공군 제 59,79,89等 3개 사단이 美 해병 1개 사단을 세 조각으로 분산시켜 파상 공격을 加해왔다. 셋으로 분산된 美 해병대는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에서 각각 고립된 채 부대 간의 연결도로 마저도 차단 시킬 만큼 중공군의 작전은 주도면밀하였다.
이에 해병 제5연대와 7연대는 급편방어로 전환하여 병력을 아껴야한다는 판단아래, 제 5연대 2대대는 눈보라 속을 철수하여 당일 밤 20시경 서남측 하록으로 집결 하였다. 뒤이어 5연대 3대대를 우일선에, 7연대 3대대를 좌일선으로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 하였으나, 敵 58사단은 이미 美 해병 1사단과 육군 제7 보병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하고 주요 보급기지가 주둔한 하갈우리를 포위했다. 아울러 유담리와 고토리의 연결도로를 차단하여 지휘체계 마저 유린당한다.
비로소 심각성을 인지한 극동군 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과 규모를 뒤늦게 인정하고 워싱턴 당국에 긴급 타전하기에 이르른다. 워싱턴 당국도 이에 동조하여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 하려는 맥아더 사령부의 작전계획을 승인한다. 이에 연합군 사령부 일부는 美 8군이 계속 후퇴함에 따라 흥남에서 美 제10군단을 철군시키는 철수계획을 수립한다.
동월 26일 새벽부터 공격을 개시한 중공군은 28일 자정무렵에, 적 제80사단의 예하 부대로 하여금 야음을 틈타 물밀듯이 공격해 왔다. 이 전투로 美 육군 제31전투단 연대장이 포로로 잡혀 전사 하였고, 선임 대대장인 ‘돈 페이스’중령이 현지에서 급히 부대 지휘를 인계 받는다. 제10군단은 이른 새벽에 해병 제1사단 ‘스미스’소장에게 해병대 1개연대를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고토리 간의 도로를 확보하라고 命한다.
그러나 하갈우리의 제1사단 상황도 결코 좋질 않았다. 병력을 분산시켜 장진호 동측의 美 육군 제7사단 2대대를 지원할 경우 하갈우리를 잃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유담리에 위치한 해병 제5연대와 7연대도 모두 죽음에 몰릴 판이었다. 이제 장진호 동측에 고립된 美 7사단 31연대전투단 2개 대대는 어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돈 페이스’중령은 자력으로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연대장 전사후 ‘돈 페이스’중령의 분전

중공군의 공격은 더욱 치열해지고 연일 계속되는 전투로 전투단의 사상자가 무수히 발생하였다. 병력은 시시각각 줄어들어 곧바로 지원군이 없으면 전멸할 위기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이에 ‘돈 페이스’중령은 유엔군 전폭기의 공습시간에 맞춰 포위망을 독자적으로 돌파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전 부대원에게 알린다. 잔여분의 실탄, 포탄을 단시간 내에 소진하고 휴대곤란한 일체의 장비를 파괴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상태가 양호한 일부 차량만을 선정하여 연료를 채운후, 2백여명의 부상병들만 차량에 분승 시키도록 조치하고 나머지 차량은 모두 파괴시켰다.
철수준비를 완료한 부대는 C증대를 선두 첨병부대로 하여, 지난 5일간의 전투에서 적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40밀리 대공자동화기였던 ‘듀얼 40’을 장착한 M19 장갑차를 앞세워 출발하기로 했다. 13시경에 드디어 아군 전폭기가 상공에 나타나자 진지를 출발하였다. 이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중공군의 집중사격은 일제히 시작되었고, 이와 동시에 돌파작전을 근접지원 하던 아군 ‘코르세어’(Corsair)機 4대가 돌연 아군 선두부대를 중공군부대로 오인하고 기총소사와 함께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오폭사고가 발생하였다. 온 부대가 믿었던 M19 장갑차와 수명의 탱크兵이 화염에 쌓이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국전中 공군 최대의 실수였다.
이를 목격한 전 부대원은 가슴을 치며 통탄을 하나 속수무책이었다. ‘돈 페이스’중령은 악전고투 끝에 즉시 잔여 부대를 수습하고, B중대를 선두부대로 임무를 교대시킨다. 필사적으로 남진하였으나 아군 항공기의 공중 지원에도 불구한 적의 추격은 집요하게 따라 붙는다. 5일간의 치열한 철수작전 끝에 ‘돈 페이스’중령과 대부분의 대대본부 요원들은 전원 장렬하게 산화 하였고 지휘와 통제는 상실되었다. 탈출에 실패한 무수한 부대원들은 적에게 사로잡혀 현장에서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참변은 실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참극으로 기록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잔여부대원들은 장진호 남단의 해병 1사단 지휘본부를 향해 무방비 상태로 철길을 따라 걷거나 얼어붙은 호수를 비칠거리며 후퇴한다. 그 뒤를 쫓는 중공군 저격병들은 마치 인간사냥을 즐기는 듯 희희덕 거리며 사냥을 즐겼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느낄 것인가?. 철수 당일 하루를 꼬박 지나 새벽까지 1사단 지휘본부에 살아 돌아온 31연대 생존자는 연대병력 3,288명중 불과 670에 불과 하였다.
이에 해병 제1사단 수송대대 올린 비얼(Olin L. Beall)중령은 즉시 수송대대 병력과 해군 의료지원단 요원들로 구성된 수색대를 편성하여 생존자들을 찾아 나서, 부상자와 동사직전의 빈사상태에 처한 320여명을 구출하였다. 당일 밤 20시 30분 기준으로 이들 귀환부대원을 포함한 장진호 주변의 전 병력은, 이후로 전개될 철수작전을 위해 ‘스미스’사단장의 작전 통제 하에 두게 되었다.
한편 이날 정오경, 美 해병 1사단 지휘본부에서는 고토리에 위치한 해병 제1연대장 ‘루이스 폴러’대령에게 고토리와 하갈우리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격퇴하여 보급로를 확보하고, 하갈우리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이에 따라 영국군 해병 제41 코만도 대장 ‘드라이스데일’중령의 지휘 하에 영국군 해병대와 美 해병 1연대 G중대, 美 육군 7사단 B중대가 임시로 편성되어 총 9백여명의 병력이 차량에 분승하여 전차부대의 선도 하에 고토리를 출발, 하갈우리 지휘본부를 향한 돌파를 시도한다.
이어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곤경에 빠진 美 육군 7보병사단 ‘헨리 호스’장군도 ‘스미스’장군에게 구조요청을 보냈지만 제5, 제7해병연대는 적 3개 사단에 의해 유담리에서 고립상태로, 하갈우리에는 고토리까지의 주보급로를 개통할 병력은 물론이거니와 자체 방어에도 힘겨울 정도였다. ‘스미스’장군은 ‘호즈’장군에게 자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포위망을 뚫고 잔여 병력을 재편성하여 하갈우리로 신속히 집결할 것을 명령한다.

11월 29일 하갈우리 방어, 해병중대 연대병력 격퇴

하갈우리 방어는 美 해병 제1연대 3대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 해병대, 한국군 等 20여개 부대, 3,913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소단위 부대로 편성된 선발대나 파견대로 구성되어 통합지휘제계가 필요하였다. 이에 당일 13시에 3대대장이던 ‘릿지’중령이 하갈우리지역 방어작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하갈우리 전면은 약 2.2km였으며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제11포병연대 2대대 D포대가 지원하였다.
남서측 전면방어는 H중대와 I중대가 맡고 있었다. 밤 22시부터 시작된 중공군 172연대의 공격은 자정무렵에 아군 H중대 진지를 물밀듯이 돌파하고, 사단장 지휘소까지 점령하였다. 0시 30분경에 이르러 사단 직할 수색중대와 인근 I중대 및 전투공병, 수송반으로 편성된 증강 중대병력의 특공대가 결사적인 역습을 감행하여 새벽에 동이 틀 무렵, 돌파지역을 회복하고 방어진지를 점령하는 개가를 올렸다. 1개 증강 해병중대가 3배를 넘는 중공군 연대병력을 물리친 것이다.

사단 직할 ‘드라이스데일’ 특수부대의 勇戰

하갈우리와 고토리의 중간 계곡은 죽음의 계곡이었다.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오전 9시 45분, 전차 29대와 병력수송차량 141대等으로 重무장한 이 부대는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을 개시 한다. 오전 내내 쏟아지는 눈보라는 앞을 가린다. 세차게 불어오는 북풍은 이들의 전진을 더디게 한다. 출발직후 매복 중이던 敵 58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부대는 공격개시 4시간동안 겨우 4km 전진에 그치며 희생자가 늘어만 갔다. 오후 1시50분, 악천후 속에서 부대는 항공사단의 F40 ‘코르세어’機 편대의 엄호 하에 전차부대를 선두로 공격을 재개한다.
이날 오후 4시 15분, 부대는 고토리 북방 6.5km 지점에서 도로 유실과 노면상의 항공폭탄 흔적 等의 장애로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는 난관에 봉착한다. 부대장은 ‘스미스’사단장에게 전진불가의 상황을 보고하였으나, 증원군 없이는 하갈우리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사단장은 계속 전진할 것을 命한다. 극심한 전투 속에 ‘드라이스데일’중령과 부관이 중상을 당하고 차량종대 중간에 위치한 탄약운반차량이 적의 박격포 공격을 받아 폭발했다. 지휘관을 잃은 부대는 삽시간에 혼란에 빠진다. 이 혼란과 화재로 인해 도로가 폐쇄되었고 부대의 절반가량이 고립되었다.
고립된 후방부대는 영국 ‘코만도’일부 부대와 美 육군 제31연대 B중대, 그리고 사단 사령부 및 보급정비부대의 주력이었다. 잔류부대의 최고 선임자인 ‘아더 챠이데스타’중령이 차량부대에게 고토리로 회군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고토리 인근에 있던 일부 전차부대와 트럭을 제외하고는 4개의 그룹으로 분산되어 부득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만 했다. 이 와중에 후방 2개 그룹은 다음날 새벽 2시 30분경에 고토리로 귀환 하였으나, 전방의 2개 그룹은 치열한 혈전 끝에 중공군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 극단적인 선택은 탄약폭발로 인한 실탄부족으로 속수무책이었으며 연합군 최대의 비극이었다. 한편 선두부대는 이런 정황을 모르고 계속 전진만 하여 29일 저녁 7시 15분, 하갈우리에 도착한다. 그렇게도 보무도 당당하게 출전신고에 임했던 연합군 최고수준의 특수부대는 인해전술의 중공군 공격에 맥을 놓고, 출전 이틀 만에 후줄근한 몰골로 3분의 2만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들의 치욕감은 오죽이나 했을까..?.

나흘밤 혈투, 장진호 동측 중공군 돌파

이날 저녁 8시경. 폭설이 쏟아지는 장진호의 밤은 적막 속에 깊어만 간다. 영하 40도를 밑도는 살인적인 추위와 눈보라 속에 이국전선에서 떨고 있는 이들은 생전에 전혀 모르는 나라 ‘코리아’와 생면부지의 ‘코리언’들의 자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왔지만, 그들의 희생과 고충은 너무도 컸다. 칠흙 같은 밤10시경, 갑작스럽게 중공군 81사단의 1개 연대가 가세한 80사단 병력 총 12개 대대가 호적을 불고 징과 꽹과리를 쳐 대고 고함을 지르면서 방어선을 돌파 한다. 장진호 동측의 美 육군 7사단 31연대 3대대와 32연대 1대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31연대 전투단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그러나 물밀듯 밀어붙이던 인해전술로 맹위를 떨치던 그들도 이날만큼은 그들이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막강한 화력을 갖춘 美 육군 제7사단 57야전 포병대대와 제15 대공자동화기대대의 대응, 그리고 육군 제31연대 3대대, 32연대 1대대 용사들의 완강한 용전과 백병전에, 인해전술만 믿고 기고만장하게 기습을 시도했던 중공군의 희생은 산허리 눈밭을 피로 물들게 할 만큼 참담한 꼴로 격퇴 당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벌판에 남겨둔 채...
이날 이후 꼬박 나흘 밤, 닷새 낮 동안 중공군과의 혈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어 극심한 추위와 세찬 바람으로 얼어붙은 각종무기는 작동불능 이었고, 늘어나는 동상환자로 인해 전투의욕 마저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극한 상황 속에서도 美 육군과 한국군 카투사가 半半의 비율로 이루어진 美 육군 7사단 31연대 전투단은 2개 대대의 병력으로 장진호 동측의 중공군 21개 대대 병력을 통쾌하게 격파하는 투혼을 발휘해, 인접한 연합군에 사기를 드높였다.
이윽고 흥남항에 인접한 연포비행장에서는 유엔군 공군 전투물자 공수사령부가 장진호 서측과 동측의 아군 부대에게 탄약과 실탄, 식량 등의 전투에 필요한 각종 장비및 보급품을 공중 및 육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투물자의 공중지원은 4면으로 포위된 아군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자신감을 실어주었다.
다음날 새벽까지 격렬하게 치러진 전투가 끝나고 그토록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장진호를 지켜내던 31연대장 ‘알랜 맥린’대령은 부상을 입은 채 중공군의 포로가 됨으로써 31전투단은 위기에 봉착한다. 공백을 메꾸기 위해 32연대 1대대장 ‘크라크 부레익’중령이 전투단의 지휘권을 급히 인계 받는다. 한편 대승을 거둔 중공군 58, 59사단은 내친김에 다음날인 30일, 하갈우리 공격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30일 트루먼, 원자폭탄 사용고려 소식

혈전에 날이 밝았다. 야음을 틈타 밤을 새워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공격한 중공군은 전날보다 더욱 강력한 화력과 병력으로 장진호 서측 160Km 지점의 美 제8군 소속 육군 제2 보병사단 예하 3대대 G중대 정면과 I중대 측면을 끈덕지게 유린하며 전선을 돌파한다. 주간 내내 벌어진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장진호 주변의 눈덮인 야산엔 피·아군의 시체만 즐비하게 늘어만 갔다. 잇달은 전방 지휘관의 희생으로 사단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으며 후퇴한다. 美 8군단의 퇴각과 해병사단의 위기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긴급명령을 하달한다. 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관의 원자폭탄 사용을 허락할 수도 있다.’라고...
새로운 전황보고를 받은 제 10군단은 이날 오후 7시 30분, 군단을 함흥-흥남지역으로 집결케 하고 제1 해병사단은 1차로 하갈우리-水洞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해병 5연대와 7연대는 하갈우리로 철수를 위해 병력을 재배치한다.

12월 01일 철수명령…‘새로운 전쟁’타전

이날 아침 오전 08시, 철수가 시작된다. 美 해병사단은 제5 해병연대 3대대를 전위부대로 해서 제 5,7연대를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도로를 경유하여 신속하게 하갈우리로 전진토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5연대 3대대를 첨병부대로 철수를 시작한다. 동시에 주변 高地에 매복하고 대기중이던 중공군의 협공과 맹렬한 추격전이 뒤를 따른다.
09시, 해병 7연대 3대대는 도로상의 주력부대가 1542高地의 동쪽을 통과 할 때까지 엄호하기 위해 1419고지, 1542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도 했으나 실패하고 그 동쪽 경사면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중공군 제79사단 235연대의 4개 대대도 이날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에 걸쳐서 1542고지의 동쪽 경사면에 포진한 제7연대 3대대에 대하여 공격을 끊임없이 加해왔다.
이 치열한 공·방 작전에서 G와 I중대의 병력은 4백여명에서 절반수준인 2백명으로 줄어들었다. 얼어붙은 들판에 적군과 아군의 시체만 쌓여간다. 敵은 12월 1일 심야부터 새벽에 이르기 까지, 철수부대의 첨병대대인 5연대 3대대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해 I중대의 병력은 또다시 2백명에서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 만큼 큰 희생을 입는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땅이 얼어붙어 전사자의 시신을 채 묻지도 못하고 산록 노천에 방치할 만큼 혹독한 추위였다고 적혀있다.
한편 측위부대인 해병 제5연대 1대대는 북쪽을 향해 진지를 구축하고 유담리 분지와 장진호로 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날 밤 9시경부터 중공군 전위부대의 침투공격은 밤새도록 지속되어 아군을 괴롭혔다. 대대는 날이 밝아 2일 새벽에 진지를 철수하여 주력부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제7연대 1대대는 영하 35도의 혹한과 적설을 뚫고 밤 9시에 1419고지로 출발했다.
이날, 제1대대는 미군으로는 드물게 폭설과 세찬 바람 속을 헤치며 야간 산악행군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저항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1620고지 동쪽 경사면에서 단위 미상의 중공군부대를 격멸하고 12월 2일 새벽 3시경에 재편성을 완료 하였다. 부대를 잠시 정지 시키자마자 몇 날 몇 밤 동안 지칠 대로 지친 해병대원들은 얼어붙은 맨땅 눈 위에 그대로 엎어져, 추위도 적탄도 아랑곳없이 잠에 곯아떨어짐에 부대 지휘자들은 이들을 독려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기록에서 우리는 이들의 엄청난 고충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맥아더’유엔군 사령관은 워싱턴에 긴급히 타전을 보낸다. ‘유엔군이 전적으로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 라고... 美 8군은 이미 한반도의 북서쪽에서 철수를 시작 하였으며, 장진호 부근의 美 해병 제1사단과 美 육군 제7사단 31연대 전투단의 전황이 급박히 불리해 지자, 美 제10군단은 최초에 세웠던 북진계획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워싱턴의 긴급 훈령에 따라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공군중장이 지휘하는 유엔군 공군사령부 예하 전폭기부대는 즉시 장진호 부근으로 출동하여 본격적인 구출작전에 나선다. 아울러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하는 美 해군 제7함대를 동해안으로 긴급 발진시켜 美 해군과 美 해병 제1항공대 함재기가 합동작전에 참가하는 동시에 연포비행장에서 발진하는 항공지원도 이들의 구출작전에 필사적으로 지원한다. 막강한 유엔군의 공중지원이 시작되었다.
‘윌리엄 터너‘소장이 지휘하는 유엔 공군 전투물자 공수사령부에서는 美 육군 병참공수단의 협조로, 이날 이후 매일 250톤씩 전투에 필요한 보급물자를 공중투하해 철수부대를 지원했다. 이로서 철수부대인 해병 제5연대와 7연대는 12월 1일부터 1사단 지휘부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향한 철수를 시작 하였는데, 철수로 양측 협곡에서의 중공군에 맹렬한 공격은 만만치 않아 공격과 방어를 함께 치루는 고전에 희생이 많았다.
이날,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에 위치한 해병 제1사단 지휘본부에서는 美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앨먼드’소장과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소장, 그리고 美 육군 7사단장 ‘데이비드 바’소장이 참석한 가운데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앨먼드’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에서 흥남지역으로 철수시키는 작전계획을 발표했고, ‘스미스’장군에게 철수에 지장을 줄 수 있는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파괴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탄약과 각종 보급품뿐 아니라 파괴된 장비는 재차 보급해 주기로 약속했다.

유엔군 12만, 피난민 10만 해상 철수

12월 2일. (일요일) 새벽 06시. 美 해병 제7연대 1대대는 5일 동안 고립 되어있던 F중대 구출을 위해 1653고지(덕동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F중대와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F중대는 포위됐던 5일 동안 중대원 2백여명중, 전사 26명, 부상 89명, 총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 하였고, 중대 장교 7명중 6명이 희생될 만큼 격전을 치렀으며 나머지 중대원 전원이 심한 동상과 설사로 빈사 상태에 처해 있었다. 한편 제5연대 2대대는 1276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그 후위부대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날 밤 0시를 기해 중공군은 1276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대대 좌일선의 1개중대가 敵의 인해전술로 인해 포위되기도 했었으나 아군 전폭기의 야간 근접 지원으로 반격을 시작하여 정오에 이르기 까지 중공군과 능선 쟁탈전을 되풀이 하면서 차량중대의 통과를 엄호했다. 이후 대대는 ‘코르세어 40’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후위로 출발했다.
도로를 따라 후퇴하는 부대는 해병포병 3개대대로서 포 48門, 차량 500여대 였다. 중공군은 美 공군의 공중폭격을 피해 주로 철수로 양측의 고지와 도로 양면의 야산지대에 매복하여 맹렬한 협공을 加하여 철수부대를 괴롭혔다. 이날 밤에도 중공군은 포병 제3대대를 공격하여 105미리포 수門과 십여대의 차량을 파괴했다.
12월 3일. (월요일). 전선일대에 세찬 바람과 함께 폭설이 내렸다. 이날 아침 08시, 해병 제7연대 1대대는 덕동고개의 동쪽 고지에 위치한 중공군 1개 대대를 공격하여 몰살 시키고, 오전 10시 반경에 진지를 점령한다. 오후 1시경, 해병 제5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해병 7연대 1대대와 합류했다. 지난달 30일부터 시작된 작전으로 전위대대는 약 56%의 병력을 잃었다.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까지는 항공지원단의 엄호를 받으며 7연대 1대대를 선두로 철수하여 이날 밤 20시경에 드디어 선두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12월 4일. (화요일). 후위부대인 7연대 3대대가 하갈우리 진지에 도착을 완료 한 것은 이날 오후 2시경이었다. 힘든 철수였다. 어느 정돈가 하면 해병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약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부대는 59시간, 최후미 부대는 무려 77시간이 소요되었다. 시간당 겨우 300에서 350여 미터, 즉 1km를 전진하는데 평균 세시간 반이 걸린 셈이며, 이 기간중, 들것에 실릴 정도의 중상자 600명을 포함 1,5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 할 만큼 치열했다.
이들 환자중 3분에 1이 비전투 손실로서, 주로 동상환자 일 만큼 혹독한 추위 속을 걸으며 철수한 것이다. 특기할 것은 악전고투 속에서도 단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을 후송했으며, 155미 야포 9門을 부득이 현장에서 폭파하고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지프차 몇 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비를 무사히 철수시킨 투혼을 발휘 하였던 것이다.
12월 5일, 6일. (목요일). 하갈우리에서는 1일부터 이날 밤까지 5일간에 걸쳐 4천여명의 부상자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서부전선의 美 8군은 평양, 원산간의 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하여 이날밤 평양에서 철수를 감행한다. 6일 오후 2시 40분경, 최종 철수 단계에서 하갈우리 통신 중계시설이 해체 되었고 오후 6시경에는 야전 활주로가 폐쇄 되었으며, 동시에 마지막으로 4,312명의 부상자와 173구의 전사자 시신도 함께 후송하였다. 美 수송기를 통해 보급품을 받던 해병 제1사단은 차량 1,000대를 이용해 중공군 9병단의 공격을 뚫고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후퇴하였다.
12월 7일 - 12월 10일. (월요일). 7일 자정무렵에 1만여명의 병력과 1천여대 이상의 차량이 하갈우리를 빠져나와 약 40여시간만에 고토리에 전원 도착하였고, 8일, 9일 이틀에 걸쳐 美 제10군단의 모든 유엔군은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리고 10일 오후 6시, 美 해병 제1사단의 행군 행렬이 함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12월 11일 저녁까지 최종부대가 함흥에 도착했다. 흥남철수는 14일부터 24일 까지 유엔군 12만명과 피난민 10여만명이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무기와 차량 동파, 장병은 동상 희생

세계 戰爭史에 남을 한반도의 ‘장진호 전투’는 이제 서서히 幕을 내린다. 피·아 양측의 피해는 막대하였다.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4일간, 美 해병 제1사단은 전·사상자 3,637명, 비전투전·사상자 3,657명, 도합 7,294명의 손실을 기록했고, 이중에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환자일 만큼 혹독한 추위였었다. 중공군 9병단도 큰 손실을 보아 장진호 전투로 인해 거의 무력화 되었는데, 해제문건에 의하면 10월 15일부터 12월 15일까지 전사자 25,000여명, 부상자 12,500여명, 도합 37,500여명의 손실을 입었다.
아울러 당시 主저항선이었던 개마고원 장진호일대는 고도 천미터 이상의 험준한 산악고지로 형성되었고, 주간기온 평균 영하 25도, 야간 체감온도 영하 40도로 적군, 아군 모두 전 병력 태반이 심한 동상에 시달렸다는 기록이다. 당시의 혹독한 추위로 인해 수냉식 중기관총은 부동액을 채워도 불통이었고, 경기관총은 얼어붙어 불발을 방지하기 위해 상황이 있던 없던 주기적으로 아무데나 사격을 해야 했으며, M1소총은 윤활유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시로 도포를 해야 할 만큼 혹독한 추위였었다.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투하되는 보급품도 얼어붙은 지면의 충격으로 파손되는 바람에, 4분에1만이 사용가능했고, 대부분의 차량도 동파되어 사용불가 했으며, 지표면도 굳게 얼어 참호와 축성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동상(凍傷)과 설사였다. 군화와 양말이 얼어붙어 탈착이 어려웠고 부상자를 위한 링거나 마취약等 수액이 얼었으며, 얼어붙은 전투식량을 그대로 섭취해 심한 장염과 설사로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체온으로 인해 무감각해진 팔, 다리의 끝부분이 퍼렇게 잉크色으로 썩어드는 증상이 동상의 초기 증세였다. 이쯤에서 생명을 구하려면 동상부위를 속히 절단 할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했다. 거의 매일 밤 중공군의 기습으로 인한 수면부족은 이들을 지칠 대로 지치게 했다. 심지어 이 고통을 피해 자폭할 정도의 극한상황의 연속이었다.
美 해병대의 오랜 전통중에 하나는 어떠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전사한 戰友의 명예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부상자와 시신을 회수하는 전통이 있어, 그들을 거두기 위해 또 다른 희생이 늘어만 같다. 이렇듯 극한상황 속에 한창나이에 뛰어놀 벽안의 젊은이들은 하나하나 무기력 속에 스러져 가고 있었다.

장진호 혈전의 영웅들을 잊을 수 있는가

과연 누구를 위해 이 전투에 휩쓸렸는지, 또 무엇 때문에 이역만리 이곳에까지 와서 동상과 전쟁공포에 시달려야 하는지조차 알지도 못한 채, 정신마저 혼미해 가는 가운데 오직 하루라도 더 연명 하기 위해 혹독한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 이 전선을 지켜낸 것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
이 참혹한 전투가 끝난지 꼭 30년 후인 1983년 가을무렵, 미국 전역에 흩어졌던 50代 初老의 생존자들이 한데 모여 ‘Chosin Few.’ 라는 모임을 결성한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戰友들...’이란 뜻이다. 그후, 이들이 조직한 ‘장진호 冬傷 위원회’의 노력으로 47년 만인 1997년에, 비로소 미국 원호청의 동상 후유증 보상을 받게 되었다. 또 50년만인 2000년, 美 해군은 최신형 ‘타이콘데로가’級의 ‘이지스’ 순양함을 건조하여 ‘USS Chosin.’이라 명명하여 美 해군 제7함대에 배치했다. 우리말로는 ‘장진함’이 되겠다.
그리고 2004년 12월 7일, 진주만 피습 63주년을 돌이켜 보던날,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국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문을 남긴다. “한국전 당시 美 해병 제1사단은 북한의 ‘장진호 전투’에서 그들의 열배인 중공군 10개사단에 포위됐지만, 적의 7개사단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둬, 다시금 美 해병대의 위대한 전통을 다시금 세웠노라..!.”고...
우리국민은 자신의 생명을 내 놓을 만큼 이웃을 사랑한 적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도 이웃이 아닌 생면부지의 머나먼 나라에서... 그러나 남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내 놓을 때가 힘들긴 하겠지만 그 또한 큰 보람이며 행복임을 우리는 장진호 전투에서 볼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불법 남침으로 풍전등화의 생소한 나라를 救하기 위해 달려온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
그리고 목숨을 걸고 10여만명의 피난민을 해상으로 탈출시킨 ‘앨먼드’장군의 용단, 2천명 정원에 무려 1만4천명을 태우고 마지막 철수에 나선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의 ‘레너드 라루’ (1914-2001) 선장의 모험. ‘라루’선장의 마지막 항해일지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항해 사흘 동안 새 생명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4,005명 무사히 상륙....”
금년은 조국 광복 제70주년의 해..!. 저만큼 새로운 희망과 열정의 새해가 힘차게 떠올라 중천에 떴다. 아침해를 향해 폭설 속에 스러져간 ‘장진호 전투’의 젊은 영웅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흰눈이 내리던 그날 밤, 이국전선의 이름 없는 산야에 묻힌 그들에게, 부디 그들 각자의 수호신에게 강복하심을 기원 드린다...‘삐아트 뿌른따스 뚜아..!.’ 主여 부디 그들을 主님의 뜻대로 거두어 주소서..!.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6호 (2015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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