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能善(윤능선) ‘경제단체 40년 인생’ 의 기록

피난시절 부산 임시수도
낙망과 환락의 교차
尹能善(윤능선) ‘경제단체 40년 인생’ 의 기록
실향민 눈물 속에 일부 댄스 불야성

피난살이의 희생과 눈물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하고 여기에 정치적 논쟁을 덧붙이려는 기도는 대한민국 국민의 도리가 아니다. 김일성의 남침전쟁으로 대한민국 운명이 풍전등화이던 시기, 피난민들과 전쟁고아, 상이군경들이 몰린 200만명의 피난수도 부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의 기록에 어떤 정파적 논리나 시각이 개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흥남철수작전 피난민들의 국제시장

박근혜 대통령이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니까 경례 하더라”고 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로서 애국심의 상징이다.
김무성 대표와 문재인 의원이 영화를 관람하고 눈물을 흘렸다. 6.25 세대의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두 정치인의 눈물은 지극히 자연적인 생리작용일 뿐 정치적 언행이 아니다.
당대표 경선에 나선 문재인 의원이 국제시장을 ‘보수영화’이니 ‘애국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당치 않다고 논평했으니 옳은 말이다. 문 의원의 부모도 흥남철수작전 때 무기를 바

▲ 영화 ‘ 국제시장’ 을 관람하며 김무성 대표와 문재인 의원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에 버리고 피난민들을 싣고 내려온 미군 함정 편에 거제도에 기착하여 살아났다.
대한민국이 죽다가 살아남은 6.25 전쟁사는 눈물의 ‘장진호 혈전’과 ‘흥남철수작전’을 먼저 이야기 해야만 한다. 그때 긴박한 철수작전 중에 한국인 통역관 현봉학 씨의 간곡한 청원으로 미군 측을 설득하여 문 의원 부모를 비롯한 1만4천여명의 피난민들이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빽빽이 들어선 피난민 대열 속에 만삭의 임산부들이 출산하여 미 군의관들이 급한 김에 이름을 ‘김치1’ ‘김치2’ 등으로 지었다. 그들 모두가 거제에 기착했다가 부산 등지로 정착하여 문재인 씨는 변호사가 되고 대선후보를 거쳐 지금은 부산 사하구의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고달픈 피난살이 한편에선 댄스홀 환락

당시 피난수도 부산의 피난살이에 관한 체험이 경제계 원로 윤능선(尹能善) 회장의 ‘경제단체 인생 40년’(1997년 도서출판 삶과 꿈)에 기록되어 있다. 윤 회장은 피난시절 부산에서 대한상공회의소 공채 생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대한상의 임시 사무실이 있는 부산 광복동 거리는 전국에서 피난 온 학자, 실업인, 종교인, 작가 등으로 만원이고 실향민과 전쟁고아 및 외제품을 장사하는 ‘평안도 아줌마’들로 북적였다. 문화예술인과 지식인들은 국제극장을 출입하고 일반인들은 동아극장을 애용했다. 동아극장에서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김승호와 눈물의 여왕 전옥이 주연하는 ‘사랑 뒤에 오는 사랑’이 상영되어 극장을 나올 때는 모두가 눈물에 젖은 얼굴이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낙망의 시절 댄스홀이 흥청거려 ‘전쟁 피난처’ 아니면 ‘타임 킬러’라는 지적이 있었다. 전쟁미망인과 피난 여대생들이 댄스홀을 찾아 미군 장병과 외국선 마도로스 등과 어울려 밤을 새고 동래온천 일대 방석집은 불야성을 이뤄 당시 동아일보 사회면에 ‘피난 왔소, 유람 왔소’라는 기사가 실렸다.
또 다른 한편에선 밀항선으로 도피하려는 졸부들이 의리의 주먹 김두한(金斗漢)의 철퇴를 맞고 금은보화가 압수되어 학도병들의 출정자금으로 요긴하게 활용되기도 했다.
당시 술과 댄스는 전쟁의 공포를 잠시 잊게 해준 마취제의 역할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도의 메논 박사가 전쟁 중에 방한하여 대한상공회의소가 송도구락부에서 환영 댄스파티를 열었다. 메논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30 총선거 시 유엔 선거감시 단장으로 역할한 공적이 있었다. 이날 댄스파티에는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시인 모윤숙(毛允淑) 여사가 참석하여 배가 뚱뚱한 메논 박사와 배를 맞대고 춤을 추어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피난살이 속의 환락이던 댄스열풍이 서울 환도 후 정비석(鄭飛石) 소설가의 서울신문 연재소설 ‘자유부인’ 소재로 작품화 됐다. 대학교수 부인의 춤바람을 묘사한 자유부인이 당시 서울대 황산덕(黃山德) 교수와의 논쟁으로 번져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었다.

거리의 신문팔이 슈샤인보이, 다방엔 시인묵객

임시 피난수도 부산거리의 신 풍속도는 우후죽순 격인 다방의 시인 묵객 담소와 거리의 신문팔이, 슈사인 보이 및 부두가의 미군물자 얌생이꾼이었다.
낮 12시가 넘으면 거리에는 전쟁고아들이 “내일 아침 신문이요”라고 외쳐댔다. 미군 MP들은 부두 창고에서 휘발유 드럼통이 제물에 굴러가는 신기한 모습을 보고 총격하려 겨냥했다가 눈감아 준 사례가 있었다. 얌생이꾼들이 드럼통에 끈을 메달아 멀리서 잡아당기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었지만 배꼽을 잡고 웃느라고 모른 척 했다는 이야기다.

이 무렵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레이션 박스가 피난민들의 영양소가 되기도 했다. 레이션 박스에는 쇠고기 통조림, 돼지기름이 들어 있고 과자와 껌, 치약과 칫솔 및 럭키 스트라익과 캬멜 등 양담배가 들어 있었다. 허기에 쪼들린 피난민들은 이 레이션 박스의 맛과 향에 흠뻑 젖기도 했지만 광복동 일대를 돌며 값비싸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경제단체인생 40년 저자인 윤능선 회장은 당시 레이션 박스의 감미가 외제품을 숭상하는 악습의 시초가 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문학, 예술인 및 작가와 교수 등은 서민들과 어울려 남포동 자갈치시장에서 피난살이의 애환을 체험하고 기록했다. 자갈치시장에서는 바닷가에 즐비한 좌판들의 싱싱한 생선에다 부산 명물로 각광받은 순대와 고래고기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이곳에서 숱한 전쟁문학 소재를 잡고 로맨스의 싹도 피웠다. 뒷날 유명작가로 이름을 날린 작품과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많이 나왔다.
대한상의 임시 사무실 건너편 골목에는 옥호가 ‘3층집’인 빈대떡집이 유명했다. 피난살이를 겪은 저명인사와 작가들 중에 이곳을 들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곳 3층집의 술잔이 바가지 급으로 어느 주당도 두 잔 이상을 마실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3층집에서 석 잔은 안된다”면서 “‘2층집’으로 가야한다”는 우스개가 유행했다는 이야기다.

전쟁 인플레 생활고에 ‘마카오 신사’ 눈총

전쟁 인플레가 극심했던 사실은 6.25를 체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잊을 수 없다. 정부는 참

전 17개국 장병들을 위해 유엔군사령부와 합의하에 한국은행이 발행한 현찰로 매월 ‘UN 대여금’을 지원했다. 월 500억원씩 지불하기 시작하여 휴전 시까지 1조원 상당을 지원했으니 한국은행에서 통화를 남발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유엔 대여금은 전후 미국 달러화로 상환하기로 약정했지만 문제는 원·달러 환율이었다. 처음 1대 1800원이던 환율이 수시로 급등하여 3천, 4천을 넘어 6000 대 1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전시 인플레에 따른 피난살이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부의 조세기능이 약화되기도 했지만 시장이 거의 암시장으로 변질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군경 상이용사들의 생계마저 정부가 보장하지 못해 목발을 딛고 절룩이며 구걸하는 모습이 너무나 눈물겨웠다.
당시 수출품이라야 텅스텐, 고령토, 형석에다 김과 활선어 등이 고작이었다. 원조물자로 재정을 끌어가던 판국에 달러화 조달능력이 거의 없었다. 나라 형편이 이 지경인데도 거리에는 일부 ‘마카오 신사’들이 뻐기고 다녔다. 밀무역을 통해 마카오로부터 영국제 양복지를 들여오고 영국산 필그림 모자를 사와 세상을 희롱했으니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당시 피난수도 거리는 대다수가 염색한 군복을 입고 다녔으니 그들 마카오 신사들은 강심장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광복동의 대한상의 피난 사무소

경제단체로 뿌리가 깊은 대한상공회의소는 1.4후퇴 후 부산 광복동 미진상회(美進商會) 건물에 임시 사무실을 얻어 업무를 재개했다. 부산 갑부 이년재(李年宰) 씨가 3층 건물을 무상으로 빌려주어 1층에는 충무공기념사업회, 2층은 대한상의, 3층은 무역협회가 사무실로 사용했다.

부산 기업인들은 전쟁의 피해로부터 안전한 편이었다. 부산토박이 이년재 회장은 우산을 팔아 거부가 되어 부산상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실크재벌로 유명한 조선견직의 김지태(金智泰) 사장과 동방유량 신덕균(申德均) 사장도 피난살이를 적극 지원했다. 일본 와세다를 나온 신덕균 사장은 정미업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나중에 ‘해표 식용유’로 대성하여 재계로 부상했다.
대한상의는 초대 회두(會頭)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柳一韓) 박사가 1년 만에 사임하고 2대 회장 이동선(李東善) 씨는 납북되어 3대 전용순(全用淳) 회장이 피난시절을 이끌었다. 부회장은 경방 김용완(金容完) 사장, 천우사 전택보(全澤珤) 사장이 맡고 이사진은 화신산업 박흥식(朴興植) 사장, 삼흥실업 최태섭(崔泰涉) 사장, 개풍상사 이정림(李庭林) 사장, 제동산업 심상준(沈相俊) 사장 등으로 구성됐다.
전용순 회장은 당시 나이 50대로 유머 감각이 뛰어난 호남(好男)으로 평판됐다. 개성 태생으로 선린상고를 나왔지만 독학으로 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금강제약을 설립 운영했다. 전 회장은 일제하에 모르핀을 제조하여 중국 전선에 공급함으로써 거부가 됐다고 한다.
전 회장은 한문과 영어에도 능통하여 대내외로 활발한 외교력을 발휘하면서 이승만 박사가 귀국 후에는 가회동의 2천여평 대저택으로 초대하여 극진히 모셨지만 부산 정치파동 뒤에는 반 이승만 노선으로 돌아서 공식행사 때 만나도 대통령이라 호칭하지 않고 박사님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피난 경제인들 한강 도강증 발급

필자 윤능선 회장은 박순천(朴順天) 의원과 부군 변희용(卞熙瑢) 박사 부부의 피난살이에 관해서도 기록했다. 필자는 모교인 성균관대 임시 사무실에 들러 변희용 박사를 자주 만났는데 늘 하오에는 얼큰한 기분으로 영도다리를 건너 자택으로 귀가하면서 부인이 정치하느라고 집을 비워 쓸쓸하다면서 투덜댔노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집에 가보면 박순천 의원이 저녁상을 준비해 놓고 단정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박순천 의원은 6.25 직후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해 인민군 치하에서 숨어 지내다가 1.4후퇴로 부산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 피난수도 부산의 피난살이에 관한 체험을 기록한 윤능선 회장.

7.27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피난 경제인들은 하루라도 빨리 상경하고 싶어 대한상의를 통해 당국과 교섭했다. 유엔군사령부가 한강 도강증(渡江證) 발급권을 대한상의에 부여하여 마치 여권과 같은 성격의 국·영문으로 된 도강증을 마련하여 회원사들에게 발급했다. 대한상의 직원들은 ‘전시요원증’을 미리 발급받아 군용 트럭 편으로 상경하여 경제인들을 안내했다.
필자 윤능선 회장은 이 무렵 국군은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는 군가를 부르고 피난민들은 ‘서울 가는 12열차에…’를 목청껏 불렀다고 기록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6호 (2015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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