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그레고리 펙· 오드리 헵번

[DVD로 만나는 명작 영화 ⑤]

윌리엄 와일러 감독
로마의휴일(Roman Holiday)
1953년, 그레고리 펙· 오드리 헵번


글/ 박윤행 전KBS PD, 파리특파원, 경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역임

윌리엄 와일러감독은 미국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감독으로 오락적인 영화에 예술성을 접목하여, 격조 높은 작품성을 끌어내는 정통적인 연출가이다.
어떤 단순한 소재나 가벼운 줄거리도 그가 손을 대면 마법처럼 관객을 사로잡고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변한다.

▲ 신문에 난 왕녀의 사진을 보고 놀라는 조

26세에 연출을 시작하여 50여 년간 한결같은 정열과 재능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발표했는데, 사극의 <벤허>, 서부극의 <빅칸츄리>, 뮤지컬의 <화니 걸>, 심리극의 <콜렉터>, 사회극의 <우리생애 최고의 해>, 범죄극의 <필사의 도망자> 등 수많은 그의 작품 중에 타작이라곤 단 한편도 없으며, 세 번의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고, 5명의 여배우와 두 명의 남자배우에게 아카데미 주연 연기상을 안겨준 걸출한 그의 영화를 한편도 안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영화는 대부분 주옥같은 명작들이다.

군주국의 왕녀와 평민의 하루사랑

로맨티시즘 장르의 최고봉에 이른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는 한,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다.
(They will cherish this movie in memory as long as they live)
화면을 꽉 채운 뉴스특보 타이틀과 거창한 해설은 오슨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에 대한 오마주이다.
유럽을 순방중인 군주국의 왕녀(왕위 계승권자)앤은 이태리 로마에 도착하여 자국 대사관에서 리셉션을 갖는다.
연일 계속된 꽉 짜인 스케줄과 공식적인 행사에 지칠 대로 지친 앤이 히스테리를 부리자 주치의가 수면제와 진정제를 놓아주며 “최선책은 잠시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겁니다”하고 말한다.
대사관 밖의 떠들썩한 사람들 소리에 들뜬 앤은 이 말에 용기라도 얻은 듯 관저를 탈출한다.
늦은 밤 카드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미국인 기자 조 브래들리는 길가 벤치에 누워있던 앤을 만나고, 자꾸 잠이 들려는 그녀를 하는 수 없이 자신의 하숙방으로 데려간다. 깔끔하고 지적인 젊은 그녀를 괴짜(screwball)정도로 생각하고 경찰에게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녀가 사라진 것을 안 대사관에서는 난리가 나고 갑자기 병이 났다고 둘러댄다. 늦잠을 잔 조는 사무실에 갔다가 신문에 난 왕녀의 사진을 보고 놀라, 보스에게 독점 인터뷰를 하겠다고 제안하고, 거금 5천 달러에 계약을 한 후 황급히 집으로 돌아간다.
잠에서 깨어난 앤은 깜짝 놀라 “여기가 어디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하고 묻는다. “내 아파트라 할 수 있죠”
“나를 억지로 여기에 데려왔나요?”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내가 여기에 밤새 혼자 있었나요?”
“나를 세지 않는다면 그렇소”
“그러면 내가 당신과 밤을 보냈군요”
“난 그런 말을 쓰진 않지만 어떤 각도에서 보면 그렇소”
황당해하던 그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반가워요 당신은?” “조 브래들리요” 그녀에게 이름을 묻자 “아니야”라고 답한다.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약간의 돈을 빌린 앤은 거리로 나가 오가는 사람의 물결, 장터의 상인들을 구경하며 다니다가, 미용실에서 과감하게 머릿결을 짧게 커트(훗날 헵번스타일이라고 전 세계를 풍미하는 유행이 되는)한다.
틀에 박힌 도식적인 생활에서의 탈출과 변신을 하고픈 욕망의 표현이다.

▲ 신분을 속이고 로마에서의 휴일을 만끽하는 앤과 조.

신분 속이고 스쿠터로 사고치며 자유분방

이 영화 때문에 너무도 유명해지는 스페인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앤에게 우연히 만난 척 접근한 조는 취재를 위해 하루 종일 휴가를 즐기자고 권하고, 카메라맨 어빙까지 합세하여 함께 로마를 여기저기 돌아보는데 두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속인다.
스쿠터로 사고를 치고 경찰서에 끌려 가는가하면, 진실의 입에선 서로의 거짓말을 눈치채기도하고, 저녁에는 산탄젤로 성 앞의 유람선에 춤을 추러간다.
왕녀를 찾기 위해 본국에서 파견된 비밀경찰들이 앤을 발견하고 강제로 데려가려하자, 저항하던 앤은 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어빙 등도 가세하여 난투극을 벌이다 두 사람은 강물에 빠진다. 헤엄쳐 나온 두 사람은 첫 키스를 하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다시 조의 하숙방으로 돌아온 앤은 라디오에서 앤 왕녀의 병이 심각하여 본국의 국민들까지 걱정한다는 뉴스를 듣고 동요한다. “이제 가 봐야할 것 같아요”
“아니야 당신께 하고픈 말이 있소”
“아니, 아무 말도 하지마세요”
대사관 모퉁이 건너편에 차를 세운다. 멀리 보이는 대사관 정문-이제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조와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떠나야겠군요. 내가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당신은 운전해서 가세요. 모퉁이에서 날 보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내가 당신을 떠나듯이 그냥 차를 몰고 떠나세요”
“알겠소”
“뭐라고 작별인사를 하죠?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나요”
“하려고 하지 마오” 마주보는 두 사람 포옹한다.
앤은 차문을 열고 대사관으로 뛰어간다.
관저로 돌아온 앤은 대신들에게 말한다.
“내가 만약 내 가족과 조국에 대한 의무를 추호라도 잊고 있었다면 오늘밤 돌아오지 않았을 거에요. 다시는...”
신분이 다른 가난한 평민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끝내야만 했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창가로 가서 로마의 야경을 바라보는 앤. 로마의 야경을 바라보는 조.
여기서 영화가 끝났더라면 아마도 평범한 로맨스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와일러 감독은 여기에 이 영화를 불후의 명작으로 만드는 마지막 시퀀스를 이어간다.

▲ 기자회견장에서 재회한 기자 조 브래들리와 왕녀 앤.

사랑과 그리움의 소중한 추억 로마

이튿날. 왕녀와의 인터뷰 취재기사를 달라고 찾아온 보스에게 조는 기사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미리 예정된 기자회견장. 조를 발견한, 놀란 앤의 눈길이 그에게 멎는다. “아. 기자였구나...”
순방여행 중 어디가 가장 좋았었느냐는 질문에 앤은 “로마에요. 살아있는 한 이곳의 방문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어요 I will cherish my visit here in memory as long as I live” 조의 물기어린 눈을 바라보며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담아 말한다.
“기자들 몇 분을 만나보겠어요” 단 아래로 내려와 한 사람, 한 사람 기자들과 악수를 하고 이제 그의 차례다.
“미국 뉴스 서비스, 조 브래들리입니다”
“정말 기뻐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본래의 신분을 되찾은 두 사람의 첫 만남이다.
천천히 돌아서서 단에 오른 앤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돌아본다. 밝은 웃음을 띠고. 그 짧은 순간 지난 24시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 황당한 사건과 어이없는 실수들, 그리고 사랑의 기쁨.

▲ 앤이 떠난 빈 공간을 바라보는 조.

우리 참 웃기고 즐거웠죠? 그러나 곧 그 사랑을 지키고 키울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에 얼굴은 흐려지고,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눈길은 그에게서 떠날 줄을 모르다가 이윽고 단념한 듯 이제 안녕히 하고 말하는듯하다.
모두가 다 빠져 나가도록 앤이 떠난 빈 공간을 바라보던 조는 이윽고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걸어 나온다.
터벅터벅 걷는 그의 발걸음 소리만이 텅 빈 홀에, 그리고 텅 빈 그의 가슴속에 메아리 치고 있었다.
24시간의 짧고도 엉뚱한 만남- 고귀한 왕녀와 평범한 서민의 만 하루는 이렇게 풋풋하고도 설익은 풋사랑으로 마무리 된다. 그래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신인으로 데뷔하여 아카데미 여자주연 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순식간에 전 세계 영화팬들의 왕녀가 된 오드리 헵번의 기자회견 장면은 영화사에 가장 아름다운 명장면의 하나로 모두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7호 (2015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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