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방조제를 창조경제 인프라로

근대역사문화 박물관도시
군산의 저력…위풍당당
일제의 수탈 유적을 역사교육장으로
새만금 방조제를 창조경제 인프라로

▲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전경 <사진출처=군산 근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새만금방조제로 유명한 전북 군산시가 어느덧 근대산업유산 벨트화사업으로 역사, 문화, 관광 명품도시로 변모하여 국내외 관광인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지난 3월 1일, 소문으로 듣던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방문하니 실로 일제 수탈의 역사를 딛고 새만금방조제 완공 이후 해양산업도시로 발전하는 역동적인 기운이 분출되고 있었다.

새만금방조제와 근대산업 유산도시

전국 최대 근대문화 역사박물관은 소문대로 1930년대 역사현장의 복원·보존이었다. 이날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문동신 군산시장이 실무진과 함께 역사박물관 관장의 안내로 유료 참관 시민들과 만나 대화하며 함께 관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세계 최장 33.9km의 새만금방조제 (사진은 '24년 3월 31일 항공사진><출처=새만금개발청 포토>

옛 군산항은 호남 곡창지대를 배경으로 일제가 조선쌀을 수탈하여 실어 나르던 항구로 일본인들이 흥청거렸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한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 이후 일본 지주(地主)들이 물러가고 한동안 불 꺼진 항구로 쇠퇴하여 도시인구가 급속히 감소했었다. 그 뒤 새만금 댐이 조성되고 민선시장 체제하에 지역경제 살리기 정책과 함께 근대산업유산 보존사업으로 향토 역사와 문화를 창조경제의 인프라로 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세계 최장 33.9km의 새만금방조제는 노태우 정부의 착공 이래 환경단체 등의 극성반대 투쟁으로 공사 중단과 재개를 몇 차례나 거듭했지만 지금은 전북의 ‘경제수도’를 자임하는 군산시의 최대 발전 잠재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또 근대산업유산은 지난 2008년 문체부 주관 지역문화재생 공모 전국 제1위로 선정되어 연중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은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역사박물관에서 진포 해양공원까지

군산시의 근대 역사문화는 1899년 고종 36년, 외세의 압력에 의한 군산항의 개항으로 시작되어 일제의 수탈역사 상처가 가장 깊은 지역이다. 이곳 근대산업유산 벨트관광은 역

▲ 이영춘 가옥<사진=군산 홍보 브로셔 스캔>

사박물관으로부터 옛 일제의 군산세관, 미즈상사, 장미(藏米)갤러리, 장미공연장, 근대미술관, 근대건축전을 거쳐 진포해양공원으로 닿는다.
역사박물관 등은 일제의 잔영을 복원, 재생했기에 그때 그 세월을 체험한 세대에게는 울분과 서러움의 추억이다. 역사기행을 거쳐 진포해양공원에 이르면 고려말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 현장에 현대전에 참전했던 육해공 퇴역 함정과 장비들의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위봉함’은 1945년 미국에서 건조되어 한국전 참전 이후 1959년 한국정부가 인수하여 월남전 최초의 백마부대 수송에 참가했으며 그 뒤 해군사관생도와 해군들의 훈련·실습용으로 수명을 다한 후 2006년 퇴역하여 이곳으로 안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곳 진포해양공원은 매향리 미군 사격장이 평택시민들의 반대로 폐쇄된 후 군산시가 군산 앞바다 직도로 이를 유치함으로써 조성될 수 있었다. 당시 미군 당국은 매향리 사격장 폐쇄 후 대체 사격장을 물색하다가 태국으로 이전할 것을 검토했지만 이곳 민선 문동신 시장이 일부 군산시민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유치했다.
이때 11개 사업, 3,100억원 상당의 투자지원으로 각종 연관사업과 함께 진포대첩 현장을 해양공원으로 조성하게 된 것이다.

▲ (좌)구 군산세관 본관 ▲(우)근대건축관 <사진=군산 홍보 브로셔 스캔>

일제의 식민경영 항구도시의 현장

군산 근대산업유산 벨트에는 국제무역항으로서 군산의 슬픈 과거와 미래의 희망이 함께 있다.
구 군산세관은 1908년 대한제국이 건축한 서양식 단층 건물로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3대 서양 고전주의 건축으로 꼽힌다. 69평 넓이에 벨기에산 붉은 벽돌로 건축된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은 호남 관세 전시관으로 운영된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1922년에 건축된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점장실 등 내부 구조와 일부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일본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지점은 1914년에 건립되어 100년이 넘은 건물로 옛 금고의 일부 형태가 남아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는 근대 미술관으로 변모했다.
장미공연장은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의 쌀 창고로 현재는 소극장으로 활용된다. 장미는 아름다운 장미꽃이 아니라 일제가 조선쌀을 수탈해 간 창고를 뜻하는 ‘장미동’(藏米洞)에서 따온 이름이다. 장미갤러리도 이곳 적산(敵産) 가옥이다.
일제하의 무역상사인 미즈상사 건물은 1930년대 건물로 지금은 카페로 운영된다.
이곳 수많은 일본 가옥들은 숙박체험관, 선술집, 카페, 식당 및 역사교육관 등으로 단장되어 외래 관광객들에게 일제시절의 생활상을 증언해 준다.
신흥동의 일본식 가옥은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장으로 소문이 나 관람객이 붐비고 조선미곡창고㈜ 사택으로 일본인 지점장이 거주했던 40평 저택은 1935년 건물이다. 구 군산부윤(府尹:현 시장) 관사는 식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1920년대 건축인 일본 대지주 구마모토의 별장은 국내 의학박사 제1호인 이영춘 박사 기념전시관으로 바뀌었다. 1912년 건물인 구 임피역사는 국가등록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 근대산업유산 벨트는 일제 식민시대를 살았던 구세대가 오늘의 신세대와 함께 거닐며 소통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소감이다.

▲ (좌)진포해양공원 (우)위봉함 <사진=군산 홍보 브로셔 스캔>

식민정책 참회와 반성 ‘참사문’ 비석

근대산업유산 벨트 끝자락에는 일본식 절 금강사가 동국사(東國寺)로 개명되어 국내 유일의 일본 절로 보존되어 있다. 일제하에 국내에는 500여개 일본 절이 있었지만 패전 후 모조리 철거됐으나 금강사만은 불교조계종에 의해 ‘해동(海東),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동국사(東國寺)로 이름을 고쳐 보존된 것이다.
동국사의 전신 금강사는 일본의 조동종(曹洞宗) 종파의 사찰로 입구 돌기둥에는 일본왕 소화(昭和)가 표기되고 뒷면에는 ‘조동종’ 종파도 새겨졌지만 지금은 이를 파내어 흔적만 남아 있다. 지난 2012년에는 일본 조동종 소속 스님들이 일제의 식민정책과 만행에 대해 참회하고 반성하는 글을 보내와 ‘참사문’ 비석이 새워졌다. 이를 계기로 한일 양국 불교계가 동국사를 매개로 교류하는 민간 외교역을 맡고 있다.
이곳 동국사에서는 올해 5회째 ‘환수 문화재 특별전’이 지난 2월부터 5월말까지 열린다. 일본서 되찾아 온 조선 전기 쌍림열반도 등 불교 관련 문화재와 일본 망명객 김옥균과 의친왕 이강공의 유묵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100년 넘는 항구도시의 저력과 잠재력

일제하의 개항도시 군산시에서부터 오늘의 경제도시, 해양도시로 발전하면서 먹을거리와 불거리가 곳곳에 널려 있는 것도 군산시의 발전 자원이다. 최근에는 새만금방조제 관련 창조경제 프로젝트에다 연중 축제로 활기가 넘친다. 매년 1월 1일 새만금 해맞이 축제를 시작으로 군산 새만금 국제마라톤대회, 5월초의 꽁당보리 축제, 진포 예술제, 군산 시간여행 축제, 군산 세계철새 축제 등이 연중 계속된다.
여기에다 기업하기 좋은 항구도시 정책으로 현대중공업의 조선사업, OCI의 폴리실리콘 등 대기업들을 유치함으로써 전북의 ‘경제수도’ 라고 자부하기에 이르러 ‘위풍당당 글로벌 군산’이라고 외친다.
이곳 민선 3기 문동신 시장은 농업기반공사(현 농어촌공사) CEO 출신으로 출향 40여년 만에 귀향하여 군산시를 기업도시, 축제도시로 변모시킨 것으로 평판된다. 문 시장은 100년이 넘는 항구도시의 저력과 잠재력을 일깨워 기업투자를 유치하고 근대역사유산을 보존 활용하는 아이디어로 창조경제의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군산항 개항 이전부터 그 후의 지도와 사진기록 등을 엮은 ‘군산역사 이야기’(김중규)에 따르면 군산과 옥구 일대 조선쌀을 실어 나르기 위한 일본 미곡상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개항 직전 대한제국 시절 이완용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일본인들의 전주 성내(城內) 출입을 금지했다는 기록도 군산역사 이야기에 나온다.
이렇게 보면 이완용이 을사 5적으로 낙인찍히기 전에는 반일정신이 투철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또한 이완용이 군산시 수산리 만경강 하구에서 탑천 입구까지 간척사업을 추진했던 사실도 뜻밖의 역사적인 사실이다.

▲ 민선 3기의 문동신 군산시장

군산시에 일인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와 일본식 도시건설로 수탈하기 시작한 것은 1898년 5월 개항 이후였다. 이 무렵 일식 요리집, 은근자 마을, 요정, 유곽 등도 번창하고 일본 모리배들이 몰려와 고리 대금업과 토지 브로커 역할도 했다.
1900년대 이후 일인들을 위한 유곽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일본 게이샤가 들어오고 조선 기생들도 흥청거렸다. 그러나 같은 기생이라도 일본 기생이 조선 기생보다 화대(花代)가 꼭 1원씩 비쌌다고 한다.
비록 개항 이래 군산이 일제의 수탈 항구역을 도맡아 왔지만 시민사회의 바탕에는 항일 저항정신이 도도히 흘러 맥을 이어오면서 오늘의 ‘군산의 저력’ ‘군산의 역동력’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군산역사 이야기 속에 한말 의병장 임병찬, 김덕장, 문형모 장군의 활약상이 기록되고 호남 최초의 3·1운동도 이 지역에서 시발되었음을 말해 준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8호 (2015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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