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자립은 우연이 아니다
원자력기술자립의 피나는 노력

글/이익환 전 한전연료주식회사 사장

‘공동설계(Joint Design)’
- 3無 극복위한 한필순 소장의 전략

원자력발전기술의 핵심은 원자로계통(NSSS, Nuclear Steam Supply System)이다. 1986년 당시의 국내 기술 인프라를 보면 한국원자력연구소가 가장 많은 기술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전기술 등의 경쟁자가 있었지만 결국 이 NSSS의 설계업무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수행하기로 최종 결정 났다. 그러나 연구소는 필수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강점이 있기는 하나 과거 설계를 해 본적이 없어 배우면서 설계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기술자립을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전제요건은 인력, 예산 그리고 필요한 시간이다. 그런데 인력은 조직화가 된다하더라도 나머지 돈과 시간은 뒤따라 주어야 한다. 우선 시간이란 사업의 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사업을 추진하면서 기술자립도 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어려움을 갖게 된 특수 여건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필순 소장님은 공동설계란 개념을 도입하였다. 즉, 기술을 가진 외국 회사가 선생님이 되고 우리 기술진은 학생이 되어 선생님과 학생이 공동으로 설계를 한다는 개념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그럴싸한 논리이었지만 실제 이행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술을 가진 자는 계약조건을 최소한 범위 내에서 이행하면서 가능한 기술을 주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하였다. 우리의 경우 최고 경영층을 중심으로 공동설계의 개념을 정립하였다고 하더라도 실제 기술을 배우는 자는 실무진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생이 학생에게 쉽게 전수해 주지 않을 것은 자명한 논리로 예측되었다.
이 공동설계 논리는 CE와의 계약 추진 시에도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설계 절차(Design Logic)에 따라 어떤 설계에 어떤 인력을 투입할 것인가 인데 설계가 세분되면 결국 각자가 맡은 설계를 할 수 밖에 없어 선생님과 학생의 개념은 없어지고 만다.
또한 본인이 수행한 설계가 다른 설계와 긴밀히 상호 연계(Interface)되어 있어 이 협조사항을 잘못하거나 무시하고 나가면 공사현장에서 큰 착오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복잡한 설계에 경험이 없는 우리 인력이 3~4개월의 설계 이론훈련을 끝내고 바로 설계에 투입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연구소의 사업책임자로 김병구 박사가 책임자로 있었고 산하에 유체계통(이병령), 기계계통(손갑헌), 원자로설계(구정의), 계측제어(함창식), 안전해석(김동수)으로 분류되었고 사업관리 책임을 내가 맡았다. 나는 연구소에 오래 근무하였지만 약 7년간 현대건설에서 월성1호기 건설 기계소장과 현대건설 본사의 원자력부장을 지내면서 사업관리 전문가로서 연구소에서 스카우트된 직원이었다.
연구소에서 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그만큼 예산관리가 중요하고 연구원들이 사업마인드를 갖는 것은 매우 필요한 시점이었다. 당시 사업비는 전적으로 한전과의 계약에 따른 것으로 집행 또한 그 범주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연구소의 연구비 집행 위주에서 상당한 변화가 필요할 때였다. 전문가에 의한 사업에 걸맞은 예산 수지계획에 대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던 것이다. 연구개발예산 집행에 따른 규정에 추가하여 사업예산 집행에 대한 절차와 규정을 개발해야 했다. 사업예산은 그 결과에 따라 감사도 받아야 했다. 바로 연구소가 사업을 성공리에 할 수 있는지의 시험대에 선 것 이었다.
연구소의 기존 질서 속에서 사업추진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경영진의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면 어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한필순 소장님은 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사업단에 대하여 예산집행의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시스템구축에 거의 1년이 걸렸다. 일부 간부들의 부정적인 시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사업을 추진하는 측면에서 보면 연구소의 고객은 한국전력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전력도 만족해하였다. 연구개발 운영위원회와 별도로 사업운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설계 사업에 참여한 직원에게 별도의 대우를 할 수 있었다. 외국에 파견되는 직원에 대한 인센티브를 인정한 것이다. 연구소에서 선택한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설계 인력 확보를 위한 줄다리기

조직과 관리시스템이 체계화되면서 설계인프라 구축도 속도를 내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각부서 조직과 최초 장전되는 핵연료를 설계하는 초기노심 설계인력을 포함하여 46명이 미국 윈저 1차 파견팀으로 확정되었다. 설계기술자의 선발은 매우 경쟁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핵심설계라 가장 우수한 직원을 선발하려는 당초의 목적은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설계에 앞서 이론 및 현장훈련을 포함하여 약 3개월의 훈련을 먼저 이수하도록 계약자인 CE와 합의하였고 이들을 먼저 미국 현지로 파견하였다. 파견 출정식에서의 각오는 남달랐으며 심각하기까지 하였다.
다시 사업예산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하기로 한다. 사업추진에서 시간은 사업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기술자립도 하고 사업일정도 맞추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 무엇인지를 고심하였다. 여기에다 예산확보 또한 서로 물려 있다. 원자력연구소의 계약책임자로 있던 나는 설계 발주자인 한전과 사업예산에 근거한 계약을 위한 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전의 시각은 총체적인 설계 사업을 완료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설계 연인원 약 760인ㆍ년이면 된다는 주장이고 더 이상 진전이 없이 고착상태이었다. 연구소는 적어도 1,000인ㆍ년은 되어야 한다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계약시간 목표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약 25%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한전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연구소의 주장은 10년간 평균 100명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실제 사업에 그렇게 인력이 투입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술자립까지 완료해야 하는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따라서 연구소 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추가 예산이 반드시 필요하였고 이를 설득하려 한 것이지만 한전의 실무책임자로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미 해결안건으로 이는 상부에 보고하기로 하였고 우리는 한 소장님께 보고하였다.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한 소장님과 한전 박정기 사장님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이 되었다. 이 모임에 기술자립의 중대한 현안이 보고되었던 것이다. 양 기관의 두 분 경영자께 기대 반 실망 반의 계약현안이 토의된 것이다. 한 페이지짜리의 내용이었다.
김병구 박사와 나는 바깥에서 식사시간이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식사가 끝나고 나오시면서 한 소장님은 드렸던 그 문서를 되돌려 주셨다. 받아보니 박정기 사장의 친필이 타이프 글자보다 크게 적혀있었다. 988인ㆍ년이라 적혀있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사실 이렇게 까지 결정해 주실 것이라곤 미처 예견치 못했던 것이다. 역사의 한 변화가 이 때 이루어 진 것이다. 바로 한전실무자에게 가서 자료를 내밀었다. 당시 한전 실무자는 이중재 부장(한국수력원자력사장 역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계약설계서를 꾸밀 것인가이다. 한전의 요구에 따라 안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우리 간부들은 수안보의 1박2일의 전략수립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연구소 중지를 하나로 모았다. 즉 설계공정에 따라 설계가 진행되지만 이와 별도로 설계 확인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즉, 설계사업에 투입된 직원은 사업일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 작성한 설계의 정확도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를 뒤따라가면서 확인절차를 거쳐야 하며 그렇게 되어야 설계의 완벽여부는 물론 기술자립도 자연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CE가 작성한 설계도 포함되었다. 한전과 연구소는 양 기관의 최고 경영자의 큰 결심에 의해 어려웠지만 어떻든 시간에 맞추어 계약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나라의 기술자립에 큰 이정표가 이때 정해졌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KnowHow를 넘어 KnowWhy

기술도입선을 CE사로 결정한 1986년 9월 30일 이후 6개월 동안 계약 조건을 두고 밀고 당기기를 반복한 끝에 우리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었다. 정식적으로 1987년 4월 9일 KAERI-CE 공동설계 계약이 체결됐다.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각각의 설계공정을 세분화한 ‘설계액티비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CE는 이미 전문화된 집단이기 때문에 설계액티비티에 대한 특별한 매뉴얼이 없었다. 그런데 기술을 전수받는 비전문가 집단인 KAERI 입장에서는 설계액티비티가 중요했다.
CE의 주장대로 매뉴얼화 되어 있는 2천여 가지의 설계공정만 전수받는다면 그들의 KnowHow만 전수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박겉핥기 식이 된다. 노하우의 바탕이 된 근본적인 기술에 해당하는 설계액티비티를 찾아내기 위해서 그들이 해 왔던 것처럼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도 돈도 없었다.
그 때 한 소장님의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최선을 다 하자.”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필사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KAERI의 독신자 기숙사에서 밤샘을 하며 계약조건을 검토했다.
설계공정 2천개(LevelⅠ)에 해당하는 설계액티비티가 총 1만2천여 개의 공정(LevelⅡ 공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CE측에 그 1만 2천여 개의 Level II 공정을 개발한다는 조건을 계약서에 붙이겠다고 했고 CE도 동의했다. 계약 후 3개월 내에 LevelⅡ를 체계화하고 KAERI 설계진이 어떤 식으로 참여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다.
문제는 LevelⅡ에 관한 매뉴얼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3개월 내에 체계화와 참여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공동설계라는 방법을 처음 해보기는 CE도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이 협의를 위해 계약 체결 후 바로 CE의 본사가 있는 윈저로 날아갔다. 윈저에는 이미 우리 공동설계팀 44인과 초기노심설계팀 13인, 총 57명의 설계요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사전에 윈저사무소장 김진수 박사, 설계책임자 이병령 박사에게 나의 출장 임무를 알렸다.
LevelⅡ설계공정 조기추진을 위해 KAERI와 CE의 책임자들은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서로의 입장을 밝히는 과정에서 CE측의 설계책임자 Tom Naton이 인력부족을 이유로 부정적인 접근을 해왔다. 나는 그가 계약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여 사업책임자인 Mike Banoski의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Banoski가 대답하기도 전에 Naton이 인력부족을 앞세워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10분간 정회를 신청하고 Banoski에게 우리 계약조건을 상기시키며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계약위반을 전제로 공동설계에 필요한 비용 청구에 대해 승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회의가 재개 되고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Naton이 또 인력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나는 Naton을 향해 서류를 던지는 것으로 불쾌감을 표현했는데 김진수 박사가 날아가는 서류를 중간에 확 낚아챘다. CE측은 Naton을 향해 날아가는 서류에 놀랐고 우리측은 김진수 박사의 빠른 몸동작에 놀랐다. 평소 김 박사는 ROTC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느긋한 행동으로 고문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Banoski가 벌떡 일어나더니 “KAERI의 요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대신 설계에 참여할 인력은 KAERI에서 지원해 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흔쾌히 “YES”라고 대답했다.
한 소장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떠난 출장에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 고유 원천기술 수출의 감회

세월이 약 2년이 흘렀다. 공동설계의 결과물이 생산되어 여러 관련기관 즉, 주기기 제작회사, 플랜트 설계회사, 그리고 인허가기관 등에 배포되어 발전소 건설공정에 직접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점점 발전소 현장과 관련된 일 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김진수 현지소장과 이병령 실장은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현지소장 겸 설계실장으로 내가 부임하였다. 나의 주 임무는 설계 사무소를 미국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원자력연구소로 옮기는 것이며 나머지 설계업무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설계 위치가 한국으로 올 때에는 우리 직원 뿐 아니라 CE 직원도 같이 오는 것이었다. 그 때가 1989년의 일이다. 아직도 약 100여명의 인력이 현지사무소에서 설계업무를 지속하고 한편으로는 기술전수를 위해 훈련을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마무리를 잘해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었다.
하루는 CE의 계측제어실장인 Bill Gill이 사무소를 찾아왔다. 팔 사이에는 서류뭉치를 끼고 말이다. 그런데 그가 하는 얘기는 우리 직원 한사람이 정해진 기간 동안 기술전수가 안 되니 추가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추가기간에 대한 추가 금액을 달라는 것으로 얘기로 이해되었다. 돈 얘기는 아직 꺼내지 않은 상태이었는데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점잖게 톤을 낮게 깔고 말하였다. “Bill Gill씨, 그런가요? 그렇다면 우리 직원을 가르친 선생을 면담할 수 있소? 학생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그 선생의 자질을 확인해 봐야 하겠소.” 나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필시 우리 직원도 완벽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라면 이를 사전에 감안하여 인텐시브 트레이닝을 학생에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특히 귀하는 분야 책임자로 존경을 받고 있는데 이런 일이 외부에 노출되면 귀하의 관리에도 흠집이 나게 될 것이요. 깊이 생각하고 다음에 만납시다.” 하고 그를 보냈다. 다음에 점심을 같이하자고 전화가 와서 별도로 만났다. 없던 일로 하겠다고 하였다.
기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서류로 꾸며진 기술만 기술이 아닌 것이다. CE는 모든 기술을 주겠다고 회사가 보유한 기술자료 목록을 연구소에 제출하였고 이 목록이 계약서 첨부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때에 따라 더 중요한 기술일 수 있는 것이 CE 기술자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설계 계산서나 계산근거이다. 이 기술은 핵심적인 노 와이(Know-Why) 기술에 해당되는데 이를 확보하는 길이 쉽지 않았다. 설계는 절차와 방법에 따라 생산되는데 이러한 기술은 선생인 CE기술자 개인 서랍에 있다. 이 기술자료는 거꾸로 문제를 풀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확보하려 노력하였다. 계약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인간관계가 이를 해결해 주었다고 본다. 우리 직원이 CE 직원과 식사를 한다든지 초청을 받아 가정을 방문하게 되면 현지사무소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선생과 학생 간의 개인적 유대는 물론 선생님으로부터 진정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선택의 폭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의 한 부분이다.
연구소 현지사무소의 역할은 기술자립을 위해 우리직원의 단합과 함께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최우선 임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와 국민성을 대외에 알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조그마한 시골도시에 산재하여 많은 한국인이 살면서 좋지 않은 얘기꺼리를 남긴다면 개인과 단체 나아가서 국가에 누를 끼치는 것이다. 그만큼 자연스레 조심하며 살았다. 다행히 우리 직원, 가족,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모두가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내가 현지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사회단체에 한국의 문화 등 정보를 알리는 홍보활동을 추진하였다. 우리 직원이 많이 살았던 Connecticut 주의 West Hartford의 인근은 물론이고 CE가 있었던 Windsor, 그리고 Simsbury 지역 도서관에 한국을 알리는 도서를 기증하였다. 또 우리 학생이 다니는 학교에도 이런 활동을 이어갔다. 매우 좋은 반응이고 현지 언론도 좋은 기사를 실어 주었다. 미국 속의 한국문화가 자연스럽게 알려지면서 우리 직원 및 현지사무소의 정체성이 바르게 알려지게 되었다. 도서관에 낡고 빛바랜 채로 뒹굴고 있는 “한국전쟁(Korea War)”이란 것이 고작이었지만 20세기의 한국을 알리는 여러 도서가 그곳에 지금 비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 활동은 연구소 본소에서 지원하지 않았으며 오직 우리가 스스로 조그만 기여를 한 것이며 그래서 더욱 뜻이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세월이 제법 흘렀지만 우리가 자립한 기술이 한국 고유의 원천기술로 개발되고 해외에 수출까지 하게 되어 원자력이 국가 수출산업으로 성장 육성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때 우리가 가진 강력한 희망의 실현에 현장에 참여하였던 한 엔지니어로서 국가 발전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물론 개인적인 긍지를 가져본다. 이러한 결과는 조직에 참여한 각 개인의 역할은 물론 이를 잘 이끌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리더의 역할 또한 중요한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8호 (2015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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