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 손주환, 박민식 중위 戰友대담

국군 최초의 해외파병
비둘기부대 파월 50주년
종군기자 손주환, 박민식 중위 戰友대담
첫 베트콩 기습 격퇴 101 경비대대 회고

▲ 1965년 4월 2일 밤 11시, 베트콩 4 개중대가 비둘기 부대를 기습공격했다. 제 101 경비대대는 이들의 공격을 격퇴, 이튿날 날이 밝아 대대장 이광노 중령(예비역 중장-전 수도군단장)과 함께 손주환 특파원(왼쪽에서 두번 째)은 전투현장을 다시 둘러보았다.<사진제공=손주환>

한국군 최초의 해외파병 ‘비둘기 부대’의 활약상에 관한 당시 종군기자의 회상이 눈물겹다. 1965년 3월의 이야기이니 꼭 50년전의 생생한 역사이다. 당시 경향신문 특파원으로 종군했던 손주환(孫柱煥)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 3월 7일, 퇴계로 어느 음식점에서 비둘기 부대 제101경비대대 보급관으로 파월된 박민식 중위(예비역 대령)와 만나 생사고락을 나눈 전우(戰友)로서 그때를 회상했다.

대한민국 첫 해외파병 종군기자

비둘기부대 종군기자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특파 종군이고 비둘기 부대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다. 손주환 종군기자는 국방부 출입기자로 월남전 파병 전후사를 깊이 취재한 경력으로 사상 첫 해외종군 기자로 선발됐다.
당시 종군 기자단은 6.25 종군 경력을 쌓은 동양통신 이지웅 기자(편집국장 역임, 서울광학산업 창업, 국가유공자로 국립현충원 안장)를 비롯하여 합동통신 심상중 기자, 조선일보 이규태 기자, 한국일보 장정호 기자, 동아일보 동남아 순회 특파원 이정석 기자 및 경향신문 손주환 기자로 구성됐다.
손기자는 뒤에 중앙일보를 거쳐 노태우 정부의 청와대 정무수석, 공보처 장관,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한 후 은퇴하여 지금은 경기도 양평에 귀농(歸農)했다. 이날 손 전장관은 비둘기부대 제101경비대대 참전 전우회 정회원 자격으로 박민식 대령과 만나 전우들의 소식을 나누었다.
초대 부대장 조문환 장군(특전사령관 역임)을 비롯한 숱한 전우들이 이미 고인이 됐다. 종군기자단도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많다. 손 전장관은 종군기자단 가운데 유일하게 101전우회 정회원이다. 비둘기 부대가 월맹군으로부터 최초의 공격을 받은 날 유일하게 부대에 머물며 전투장면을 취재, 촬영한 기자로 참전전우회 이광노 회장이 정회원으로 강력 추천했다.

▲ 월남에 첫 파병된 비둘기 부대가 1965년 3월 15일 일주일 간의 긴 항해끝에 사이공항 근해에 도착 후, 본진 병력과 함께미 해군 수송함을 타고온 우리 종군 기자단이 함상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 쪽에서 두번 째가 손주환 특파원. 뒷줄 오른 쪽에서 4번째가 조선일보 이규태 특파원.<사진제공=손주환>

베트콩 기습공격시 전투현장 취재

1965년 4월 2일은 비둘기부대 제101경비대대 전승일로 기념된다. 파월 2주일째인 이날 월맹 정규군 2개 중대가 지역 베트콩과 함께 비둘기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당시 종군 기자단은 사이공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지만 손주환 기자는 카메라를 휴대하고 비둘기 부대 벙커에서 전투장면을 취재했다. 종군기자로서 특종의식이었을 것이다. 손기자는 101경비대대가 적의 기관총, 로케트, 박격포 포격을 효과적으로 격퇴한 과정을 가장 실감나게 취재할 수 있었다.
부대장 조문환 장군이 전력 탐색을 위한 기습공격을 예견하고 미리 관측 매복조를 전진 배치시켰다. 이들 매복조가 베트콩의 이동경로를 시시각각 보고했지만 조장군은 유효 사거리 내로 근접할 때까지 먼저 공격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베트콩의 기습은 사전에 탐지한듯 통신시설과 지휘부부터 선제공격하기 시작했다. 기관총, 로케트, 박격포 포격이 너무나 치열했다. 손기자는 급히 지하벙커로 피신하여 비둘기부대의 작전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제101경비대대는 사전 훈련대로 정확한 조준 응사로 적의 공세를 즉각 제압할 수 있었다. 적은 30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도주하면서 한국군의 막강한 전투력에 놀랐음이 분명하다.
아군도 11명의 부상자가 발생되었고 차량 24대가 파손됐지만 완벽한 승리였다. 그래서 제101경비대대는 이날을 ‘전승일’로 규정하고 매년 국립현충원을 찾아 충혼탑과 박정희 대통령 묘소, 조문환 장군 및 전사한 전우들의 묘비에 헌화한다.
종군 특파원 가운데 유일한 정회원인 손 전장관도 꼭 참석한다. 지금은 모두가 7080 노병(老兵)이라 매년 유명을 달리하는 전우가 속출한다.
이날 손 전장관과 박민식 대령은 비둘기 부대 및 101경비대대 참전 50주년을 계기로 한국군 최초의 해외파병 역사와 전공을 정확하게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다짐했다.

▲ 환송식에서 비둘기부대장 조문환 장군 및 참모들 <사진제공=손주환>

월남전 파병결단은 다목적 국익증진

손 전장관은 한국군의 월남 파병을 미국 용병론(傭兵論)으로 비하시키려는 일부 좌경논리가 역사왜곡이라고 단언한다. 당시 우리정부의 파병결단은 실리와 명분 뿐만아니라 한국군의 전투력 증강 및 월남특수 등 다목적 성과를 거둔 획기적인 국익증진이었다는 뜻이다.
이무렵 김일성의 직간접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을때 한미동맹 강화와 미군원 확대가 절실했다. 또한 6.25 남침전쟁시 미군과 UN군이 참전하여 피 흘린 은공에 보답하는 의미도 있었다.
당시 표면적으로는 미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파병이 결정된 것으로 보도됐지만 내막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파병을 제안할 수밖에 없는 긴급상황이 있었다. 손 전장관은 이무렵 국방부 출입기자로서 박대통령과 김성은 국방부 장관이 미국의 군원이관 10개년 계획의 집행 보류를 위해 고심천만이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한국군은 장비와 탄약에서부터 피복까지 미국의 군원으로 충당하고 있을때 미국은 월남전 부담을 이유로 이를 한국정부에게 떠넘기려 했다. 이에 대응하여 박대통령이 월남파병을 제의하면서 군원 증강과 한국군 현대화를 획득해 냈다는 요지다.
이같은 배경으로 비전투부대 형식의 비둘기부대를 먼저 파병함으로써 미국측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평가하고 국내적으로는 파병에 따른 국민의 충격을 완화하는 의미가 있었다는 해석이다.
비둘기 부대의 파월성공은 여러가지 측면의 성과를 평가할 수 있다. 제101경비대대의 완벽한 전투력이 과시되어 후속 청룡, 맹호, 백마부대 등 전투부대를 파병하게 되고 건설, 용역, 군납 등 막대한 월남전 특수로 경제개발 종자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 1965년 4월 2일 비둘기 부대는 베트콩의 대대적인 첫 기습공격을 받았다.우리 비둘기 부대가 이를 격퇴하지 못했다면 전투부대의 파월은 어려웠을것이다. 이 기습공격이 있었던 날 손주환 특파원은 유일하게 이 전투를 현장에서 취재한 종군기자였다. 며칠이 지났을까, 손 기자가 대피했던 개인호에서 부대장 조문환 장군과 함께 카메라앞에 섰다. 격전의 전진을 털고 다소 편안한 표정들이다. <사진제공=손주환>

비록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지만 월남전에서 보여준 한국군의 용맹성에 김일성도 놀랐을 것이다. 민간 부문의 경우 5대주 6대양으로 뻗어난 오늘의 글로벌 진출력도 이때부터 뿌리를 내렸다고 볼수 있다.

강재구 소령을 軍神으로 보도한 기자감각

손 전장관은 비둘기 부대 종군 특파를 계기로 국방 안보전문 대기자로 성장하여 정계로 진출하여 제6공화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었다고 볼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과는 위관시절부터 국방부 출입기자로 친숙한 관계를 맺어 고위직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는 관측이다.
손 전장관은 고려대 학생신분으로 군입대하여 26사단에서 사병으로 복무했지만 군 내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파월훈련장에서 수류탄 사고로 순직한 강재구 대위(소령 추서) 사건을 널리 보도하여 그를 군신(軍神)으로 추앙토록 이끈 기자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다.
강원도 홍천의 파월 맹호부대 훈련장에서 강재구 대위는 수류탄 투석에 실패한 병사를 살리고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 폭발을 덮고 희생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군에서는 민심동요를 우려하여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있었다. 손 기자가 이를 취재하여 당시 김용배 참모총장에게 건의하여 그의 살신성인을 널리 보도케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최초의 해외파병 종군기자로서 비둘기 부대에 대한 베트콩의 첫 기습공격시 사이공 호텔 숙소에 가지 않고 부대원들과 함께 머물며 전투장면을 생생히 취재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월남전 첫 전투대대 101경비대대 참전 전우회의 유일한 민간인 정회원 자격도 물론 우연이 아니었다는 결론이다.
비둘기부대 파월 50주년을 계기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들의 공적에 새삼 무한감사를 올린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8호 (2015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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