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

미움 받을 용기

글 / 金淑 (김숙 본지 상임 편집위원)

지난 3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 교보문고에 들렀다. 수많은 책들이 고유의, 혹은 획기적인 발상의 제목을 붙이고 저마다 삐죽하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시선을 사로잡은 책은 ‘미움 받을 용기’였다. 내용이야 어찌됐든 우선 제목에 매료되어 책을 꺼내들었다.

윤리의 울타리 넘어 자유로운 삶

그 건 그렇고, 서점 안의 중앙에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간이 독서실 같은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마침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해서 자리를 잡고 앉아 차근차근 읽었다.
미움받을 용기란 말의 핵심은 자유롭게 사는 삶...? 일단은 그렇게 받아들여도 별 무리는 아닐 성 싶었다. 그러나 초야에 묻혀 철저한 야인으로 살아가지 않고서야 어느 누구의 인생이 현실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가령, 영화나 소설의 영원한 테마인 남녀 간의 사랑을 잠깐 예로 들어 보자. 그것도 순풍에 돛 단 듯한 사랑 말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선 채 사회의 제도나 규범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사랑만을 부르짖는 그런 운명적 사랑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의 안타까운 처지나 입장에 숨죽이고 동조한다. 때로는 눈물 찍어내고 콧물 훌쩍거리며 가슴 아파한다. 그들의 사랑이 마치 스스로의 인생에 아주 깊이 개입된 양 한없이 서러워하기도 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그 이상은 허용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통념이 그렇고 질서가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쳐놓은 윤리라는 울타리인 철옹성을 넘어설 자신이 없고 우리가 지켜가야 하는 질서 바깥의 세상을 흔연스럽게 걸어갈 용기가 없다. 소설속이나 영화 속에서의 꿈에 그리던 사랑이 어느 날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다 해도 시치미를 뚝 떼고 지속시켜 나갈만한 능청맞은 재주가 없다. 작품 안에서는 더할 수 없는 사랑 예찬론자였을망정 본인의 경우가 되면 뒷걸음질할 소지가 짙어지는 것이다. 거기에 평소 도덕관념이나 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다른 자아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으려 애쓸 것이다. 어쩌면 아예 없던 일로 단념하고 마음의 빗장을 더욱 단단히 걸지도 모른다.

고지식 양심에서 어찌 벗어날까

그런가하면 본인이 아닌, 본인이 알고 있는 누군가의 경우에는 훨씬 재미있는 모양이 연출될 수도 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마 위에 올려진 그 누군가는 어처구니없게도 이미 발정 난 암고양이가 되어 있을 것이며 수근거림과 손가락질과 온갖 욕설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복잡 미묘한 뇌회로, 여러 갈래의 아이러니가 바로 인간의 이중성 내지 다중성이라 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제 허물을 감추지 않는 몇 몇 친구 중 신경정신과 의사가 하나 있다. 필자가 남과 유달리 인간의 심리에 관심이 많은 것을 온통 그 친구 탓(아니면 덕분)이라 할 수는 없어도 상당부분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다. 여느 친구보다 썩 가깝게 맞닿아 있던 우정이 바탕이 되어 프로이트, 융, 아들러까지 심리학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문학도의 문학적 깊이를 능가하는 정신과 의사의 인문학적 감성과 필자의 심리학에 대한 관심은 만날 때마다 치열하게 부딪쳤다. 소위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한 양심이나 용기의 지혜로운 안배가 언제나 화두의 핵심이었다. 건강한 사회성을 통한 여러 유형들의 자존감 찾기가 논쟁의 중심 줄기인 셈이었으나 솔직히 미움 받을 용기까지 토로하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어쨌든간 무한정 열정적일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친구의 충고는 “고지식한 양심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친구의 말대로 필자의 양심은 고지식하다. 드러내놓고 얘기하자면 병적이다 할 수준이다. 인정한다. 그러나 인정하기는 쉽고 벗어나기란 어려워 여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산다 해도 자신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삶이 과연 존재할까... 반대로 주변의 질서나 법을 깍듯하게 지키며 산다 해도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다른 ‘나’의 아우성으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는 삶이 진정 있을까...
아직까지 필자의 대답은 미지수다. 덧붙이자면 미움 받을 용기와 미움 받지 않을 용기의 경중을 따질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고지식함이나 자유로움이라는 감정들도 기실 한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무형일지라도 인간의 양심이나 용기의 무게감만은 결코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인간의 특수성과 보편성에 대해서 더욱 절실하게 생각해 볼 요량이고 개인적 심리와 공동체 의식도 지속적으로 눈여겨보며 살아가야 할 대목이라 여겨진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9호 (2015년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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