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Erlangen과 미국 Windsor를 넘나들며

원자력발전기술의 자립
원자로 노심설계기술 자립 달성
독일 Erlangen과 미국 Windsor를 넘나들며

글/ 장문희 한국원자력학회장

에너지는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에너지안보라고 하지 않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등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화(Globalization)가 점차 가속되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문제만큼은 세계화가 아니라 오히려 지역화(Localization)로 가고 있다. 에너지는 국가생존 요소이자 또한 국가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핵심인자이기에, 에너지와 관련되는 한 정치적 동반자도 한 순간에 등을 돌릴 수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일어난 갈등 경우가 좋은 예일 것이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에너지 기술자립을 향한 국가정책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기술자립이라는 의미가 문자적·언어적 의미 그 이상이라는 것을 필자는 이제야 깨닫고 있다.

풋내기 연구원 시절, 유학 그리고 귀국

세월이 한참 지나 과거 역사의 기록들이 조금씩 우리 앞에 펼쳐졌을 때야 비로소 짧았던 5년의 왕초보 연구원 시절에 필자가 맡았던 연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1976년 대학졸업과 동시에 연구생활을 시작했던 한국핵연료개발공단(입소 시에는 한국원자력연구소 특수사업부)은 습식재처리 기술자립의 염원이 담겼던 곳이었다. 처음 접한 습식재처리 설비에 대한 “임계도 분석” 연구를 풋내기 연구원이 조수 없는 사수로, 그리고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ANL)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죽어라 깨우치고 나서 귀국해 보니 그 임무는 없어진 상태였다. 없어진 이유는 바로 핵확산금지와 관련된 국제정치적 이슈 때문이었다. 그 다음 맡은 업무가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 관련 노심해석 업무였다. 국산화사업? 글쎄. 맡은 업무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데 무슨 국산화? 풋내기 초년 연구원은 비공식적으로 입수한 노심설계·해석 전산코드와 기술 이해에 힘겹게 급급했을 터인데.
ANL에서 기술훈련을 받던 때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아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을 등 뒤로 하고 1981년 국비유학생으로 미국MIT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는 핵연료개발공단이 서울의 원자력연구소와 통합,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막 바뀐 직후였다. 학위논문이 끝나갈 때 연구소에서 유치과학자로 부르겠다는 제안이 왔고, 논문심사와 행정적 절차를 마무리하고 1984년 10월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있었던 학위수여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연구소에서는 이미 몇 분의 유치과학자가 뭔가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경수로핵연료 국산화사업”이었다. 그 때 필자를 유치과학자로 불러 주신, 우리나라 원자력기술을 오늘에 이르게 하신 기술자립의 대부이시자 지휘관이셨던 한필순 소장님을 처음 뵈었다.

기술습득과 입찰서 평가

유학 전 잠깐 참여했던 중수로핵연료 국산화사업 대신 이번에는 경수로핵연료 설계·제조기술 국산화 사업의 설계분야에 참여하게 되었다. 1985년 12월부터 독일 Erlangen에 있는 KWU사에서 3개월 간 재장전 노심설계를 위한 노심예비분석(Scoping Analysis)과 KWU사의 설계기술에 대해 훈련을 받고 돌아왔다.
독일에서 습득한 기술을 연구원들에게 전수하고 있던 중 1986년 4월 경 갑자기 원전(KNU) 11/12호기(한빛3/4호기) 초기노심설계 기술도입 및 공동설계 입찰서 평가팀(Task Force)에 참여하게 되었다. 2개월 여 꼼꼼하게 들여다보며 큰 방안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평가의견서를 작성했다(필자가 작성한 평가의견서는 나중에 기술도입선 선정관련 정치적인 논쟁 때문에 한전이 증거물로 국회에 제출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BCM(Bid Clarification Meeting, 입찰서내용 확인 회의)에서 불분명한 기술전수 내용과 조건을 확인하는 실무협상을 담당했고,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당시의 ABB-CE사(현재 Westinghouse사)사와 초기노심 및 핵연료 공동설계 내용과 일정에 대한 실무협상도 맡았다. 그 때 만든 노심설계 업무와 일정은 아직도 관련회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술협상과 공동설계 실무계획을 만들면서 드디어(?) 기술자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공동설계, 기술전수, 기술자립 등의 용어가 모두 생소하였지만 지휘관인 한필순 소장님의 뜻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기술자립이 원자력기술의 독립과 자립뿐만 아니라 에너지안보 확보라는 깊은 뜻을 내포한다는 것을 이해한 것은 시간이 더 지난 후였지만 말이다.

독일 Erlangen으로, 미국 Windsor로…

1986년 5월 경수로핵연료 공동설계팀이 독일 Erlangen으로 먼저 떠나고, 그 해 12월, 한빛 3/4호기 초기노심 공동설계팀이 미국 Windsor로 떠났다. 실무경험이 풍부한 시니어급 연구원과 유치과학자 대부분은 KWU로 파견되었고 젊은 연구원들은 Windsor로 파견되었는데, 아마도 사업의 시급성과 사업기간을 고려한 전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필자는 그때부터 경수로핵연료 공동설계사업을 실무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1990년 1월 KWU 사무소장으로 파견되기 전까지 4년 가까이 연구소 본부에 남아 독일(재장전 노심설계)과 미국(초기노심설계)에서 오는 모든 설계 자료와 기술정보(노심 핵설계 분야)를 취합·분석하는 업무에 몰두하였다. 당연히 설계기술과 내용에 대한 인허가 기술지원 실무도 책임져야 했다. 필자가 노심설계분야에서 본소에 남은 몇 안 되는 시니어급이였기 때문이다.
공동설계 점검 및 기술전수와 관련하여 수 없이 Windsor와 Erlangen을 다니면서(젊은 연구원들이 파견된 Windsor에 더 집중했다) 신기술 흡수에 모든 시간을 투입했다. ABB-CE와 수 없이 가진 사업진도점검회의에서 불명확한 것을 확실히 하고 한 가지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CE 기술자와 늦게까지 입씨름을 벌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파견되어 있던 우리 연구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필자는 기술을 파헤치는데 “갑질(?)”하는 것으로 Windsor에서도 소문이 났었다고 한다. 기술이해와 종합에서 나아가 “을”인 용역사업자로서 “갑”인 한전과 “특갑”인 인허가 기관(KINS)을 기술적으로 이해시키는 것도 본소에 있는 필자의 몫이었다.
한전을 상대로 서울 한전 별관에서 한빛 3/4호기 노심설계 기술설명도 했다. 기존 Westinghouse(WH)사 원전의 노심 및 핵연료와 판이하게 다른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랬지만 공동설계팀, 본소 팀 할 것 없이 모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진 모든 정열을 기술흡수에 쏟아 부었다. 기술자립 의무와 열정 때문에 필자는 인허가심사기구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의 안전심의회(당시에 안심으로 약칭)에서 KINS 실무책임자와 충돌하는 사건(?)도 겪었다. 그 사건으로 필자는 윗분이 노여워하신다면서 한 동안 KINS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그 곳 친구의 연락을 받아 조심하기도 했었다.

원자력기술자들의 도전·집념·열정 그리고 실력

짧은 시간에 우리 연구원들의 기술흡수 속도와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우리의 능력을 평가조차 하지 않았던 ABB-CE사 기술자들도 나중에는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우리 연구원들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곤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 연구원들의 본색은 기술자립을 위한 염원 바로 그 자체였다. 실력과 정신력 그리고 열정으로 똘똘 뭉친 대한민국의 연구원들의 욕심을 과연 ABB-CE가 감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해서 한빛 3/4호기 원자로는 각각 1995. 3월 그리고 1996. 1월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그들 연구원들과 그 열정이 없었다면 과연 원자력기술 자립과 나아가 세계 5대 원전국가, UAE 원전 수출, 요르단 연구로 수출, 우리 고유 원자로기술인 SMART의 사우디아라비아 공동협력 진출 등이 가능했을까? 라는 고마움을 한 번 만이라도 마음속에 새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재장전 노심설계와 관련해서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고리2호기 6주기 비상노심설계이다. 당초 WH사가 수행한 설계를 갑자기 바꾸어야 했다. 한전에서 설계공급사인 WH사에 의뢰했는데 과도한 비용을 요청한다면서 비공식적으로 필자에게 우리 기술진의 설계능력을 타진해왔는데, KWU에 파견나간 우리 연구원들이 일주일 만에 설계를 완성한 후 용역 업무를 공식화 하였다. KINS로부터 우리가 재설계한 비상노심의 운전허가도 원전 운전일정에 차질 없이 받았다. 업무는 공식화 하였지만 당연히(?) 무료서비스였다. 외화절약도 절약이지만 그 때 필자는 그 건을 계기로 우리 기술력이라면 재장전 노심설계 기술자립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우리 손으로 노심설계를 공급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술은 마침내 우리 것으로 만들어졌다.

KWU 사무소장으로, 경수로핵연료 설계기술로

1989년 12월 늦게 필자는 KWU 현지사무소 제3대 소장으로 발령받아 현지로 부임했다. ABB-CE 기술에서 다시 KWU 기술로 돌아왔다. 약 30여 명의 공동설계팀은 어느새 대부분 젊은 연구원들로 채워져 있었다. 14개월을 현지 사무소장으로 일하는 동안 KWU 기술자들이 매우 힘들어 했다. 사무실마다 우리 연구원과 KWU 기술자 간에 “이것이 옳니, 저것이 그르니” 하는 논쟁이 끊이지를 않았다. 궁금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파헤쳤기 때문이다. 그 만큼 우리 젊은 연구원들의 열정이 넘쳐났다. 그러나 기술자립의 걸림돌은 Know-How가 아니라 역시 Know-Why 이였다. 예를 들어 설계와 제조 간에 발생하는 정량적 차이(NCR, Non-Conformance Report, 비적합보고서)가 노심 성능 및 안전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Know-Why이다. Know-How는 반복된 설계과정을 통해 습득할 수 있지만 Know-Why 이해에는 고도의 기술이해와 많은 실무경험이 요구된다. 기술자립의 어려움과 기술자립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Know-Why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 연구원들이 추구했던 핵심가치가 바로 Know-Why 이해였으며 당연히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사무소장으로 재임 시 KWU 프로젝트팀과 본소에서 날아 온 NCR 문제 해결에 대한 협의가 매일 오전의 주 일과였었다.
담당한 재장전 노심설계 또는 핵연료설계를 마친 연구원들이 하나 둘 본소로 돌아가면서 KWU 현지사무소의 임무는 서서히 정리되어 갔다. 그리고 재장전 노심설계 및 핵연료 설계사업의 공동설계 완료가 선언되었다. 세세한 분야에서 아직 부족한 부분들도 조금씩 있었지만 사업목표를 2년 정도 앞 당겨서 달성한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당초 계획에 포함되었던 잔여 공동설계 부분은 국내에서의 독자설계로 전환되었다. 우리 연구원들의 뛰어난 능력과 열정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고, 원자력기술 선진국인 독일에게 한국의 힘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기고 1991년 2월 말로 KWU 현지사무소 임무를 마감하였다. 설계와 관련된 모든 업무는 본소로 이관되었으며, 이후 당초 계획된 잔여 업무가 독자설계로 추진되어 중수로핵연료 국산화사업에 이어 경수로핵연료설계 국산화사업도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명실상부 핵연료설계기술 자립국가 반열에 오른 것이다.

원자력기술 자립의 국가적 의미와 대명제

세계화는 좋은 의미로 분업화이자 공동시장이라고 본다. 모두가 잘 살자는 정치이고 경제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디서 무엇인가 일어나면 전 세계는 도미노현상처럼 연쇄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즉 세계화는 종속이 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진 자에게는 세계화가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 세계가 자본이고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지지 못한 자는 언제 세계화의 문이 닫힐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세계화를 매우 불평등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기술자립과 세계화를 어떤 관계로 보아야 할까?
기술자립(Localization)은 기술종속의 대척점에 있지 않을까? 기술개발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기술을 가진 국가는 지배국이 되었으며 기술이 없는 국가는 식민지 또는 시장으로 종속이 되었던 것이 멀지 않은 가까운 역사이다. 현재라고 해서 과거와 달라질 이유가 없다. 내 기술이 있어야만 세계화에 동참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에너지기술에서 종속의 의미는 국가로서 존재와 국민의 삶이라는 명제에서 보면 정말 끔직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한 국가의 에너지 미래를 이웃 국가가 보증해 주지 않는다. 이젠 산유국도 원자력에너지기술의 도입과 자립이라는 국가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에너지자원은 언제든지 민족자원화로 될 수 있고, 그래서 구하고 싶을 때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유일한 해결책은 기술을 가지는 것이다. 자원이 없으면 기술이 더욱 절실하다. 필자는 에너지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기술자립이 바로 지속가능한 국가안보와 국민의 삶을 보증하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우리가 존중해야 할 절대적인 핵심가치라고 확신하고 있다.

지난 날 들을 돌아보며

나이와 관계없이 10여년 이상을 기술자립에 매달렸던 연구원들의 열정과 자긍심은 이제 고스란히 뒷전으로 묻혀가고 있다. 누가 나서서 영광을 나누어 가지자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때 열정과 사명감으로 기술흡수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젊은 연구원들 대부분은 이제 60을 바라보며(이미 많은 분들이 직장을 떠나 또 다른 삶을 살고 계신다) 후배들이 기술자립과 국산화의 열매를 거두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훗날 영광이 있으면 그들에게도 조금씩은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필자의 바람은 너무 염치없는 과한 욕심일까?
필자가 헌신한 그때의 10여년은 연구원으로서 삶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지면을 빌어 원자력기술자립이라는 거대한 국가사업의 한 귀퉁이에서 필자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주신 故 한필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님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여 전에 생전 좋아하시던 탕으로 점심을 대접하고 가까운 주말에 체육공원에서 운동을 한 번 하자고 일정을 잡으라고 하셨는데, 돌아가셨다는 비보는 정말 듣고 싶지 않았던 충격적 소식이었다. 한 소장님께서는 필자와 식사를 하실 때면 으레, 1990년 가을 IAEA총회에 참석하신 후 배탈이 난 상태에서 필자가 독일 KWU 사무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를 추억하시곤 했다. 그때 필자는 얼른 소장님을 사택으로 모시고 가 얼큰한 김치찌개와 우리나라 음식을 대접해 드렸고 다음날 거짓말처럼 깨끗이 회복하셨다. 그 때의 고마움을 두고두고 전하시곤 하셨는데... 이제는 직접 들을 수 없게 된 그리움 이렇게 글로 끄적여 달래 본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0호 (2015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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