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종교 ①]

이슬람교(Islam· 回回敎)

글 / 배흥직 안동 경안노회 회장

이슬람(Islam)교는 본래 교주의 이름을 따서 마호메트(mahometanism)교라고 부른다. 동양으로 전파되면서 회회교(回回敎)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창시자는 마호메트(570-632)이나 초기 이름은 무하메트(Muhammed) 또는 모하메트(Mohammed)였다. 그의 종교가 이슬람교, 마호메트교라고 불리었다.

창시자 마호메트

마호메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부모를 잃고 숙부 밑에서 자랐다. 출생지는 수도 메카로서 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km 떨어진 도시이다.
그가 삼촌의 대상(隊商)을 따라 다닌 곳은 인도양에서 지중해를 거쳐 예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성지(聖地)로 매년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었다. 마호메트는 이곳 메카의 귀족인 ‘하삼’가(家) 과부의 유복자로 태어나 삼촌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과 시리아 등지를 다니며 잔심부름 하며 자랐다.
그는 25세 때 15세 연장인 부자 과부 ‘카디아’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6남매를 낳았지만 딸 하나만 남고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
마호메트는 여행하는 과정에 유대교와 그리스도 교인들과 교류하면서 종교적 열정으로 금식(禁食) 기도했다. 그가 글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성서(聖書)이야기와 종교인들의 말을 들으면서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호메트가 40세에 이르러 히라산 적막한 동굴에서 기도생활을 시작하여 아라비아의 각종 종교의 통일을 기원하며 종교 지도자들과도 교류했다.
하루는 동굴에서 기도하는 중 천사장(天使長) 가브리엘을 만나 신의 계시(啓示)를 받았다.
“첫째, 유일신 알라(Allah)를 믿으라. 둘째, 알라를 절대자로 숭배하라. 셋째, 신의 계율을 줄 것이니 이를 철저히 지키라.”
마호메트는 이로부터 신의 예언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군중 속에 나타나 3년간 가족을 비롯하여 주위사람 40여명을 개종(改宗)시켰다. 그는 스스로 예언하고 순례하면서 설교했다.
우상을 배척하고 반대자를 설득하면서 토론도 하고 때론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박해자가 출현하여 메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서기 622년 7월 17일로 이슬람교의 기원으로 삼는다.

이슬람교의 원리

인구 300만명의 아랍인들은 이때부터 천막생활을 하고 있었다. 생활수단으로는 양, 산양, 말, 낙타 등을 이끌고 물과 풀을 찾아다니는 유목민 생활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낙타를 이용하여 대상(隊商)을 지어 타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교역했고 반면에 소수는 도시에 정주(定住)하면서 농사와 공업에 종사했다.
이슬람 민족은 기원 9세기부터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자리 잡았으나 종교다운 종교가 없었다. 부락마다 원시적 종교로서 사막의 오아시스를 상징하는 여신(女神)들이 있었고 사막에 필요한 비(雨)와 부족 간 전쟁하는 신을 제각각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뚜렷한 내세관(來世觀)이나 통일된 신앙도 없었다. 다만 인간과 정신이 교통한다는 막연한 관념에서 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돌로 된 신체(神体)에 붓는 신앙적 행사로 삼았다. 이 무렵에 마호메트가 출현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지(敎旨)를 느낀 바 있어 ‘알라’라는 유일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유일신으로 종교적 혁신과 통일로 창조적인 종교를 건설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그의 아내 ‘카디자’(Khadija)의 재정적 정신적 도움을 받았기에 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마호메트는 본래부터 유대인의 선민(選民)사상과 3위일체의 신관(神觀)을 부당하게 생각했고 아라비아인들의 다신교(多神敎)사상을 일신교(一神敎)로 지향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민중의 박해로 메카로 떠날 때 부인도 세상을 떠나 고독감을 가지고 메디나로 쫓겨났던 것이다.
그는 메디나에서 이슬람 교단을 조직하고 신앙규칙을 만들고 무력과 정치가를 동시에 얻어서 제1인자로 군림하여 스스로 재판자가 되어 여러 가지 제례(祭禮)를 정했다. 또한 신정 정치단(神政 政治團)을 결성하여 이곳에서 8년간 자기세력을 육성했다. 그 뒤 8년이 지난 630년에 무력으로 추방당했던 메카를 공격, 정복하여 이슬람교의 성지로 삼고 세계를 정복하는 무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마호메트는 어느 정도 이슬람교 확장과 무력배양으로 신정정치(神政政治)에 아라비아인들이 참가하자 마침내 이슬람 신앙과 정치로 통일을 이루고 더욱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페르시아와 이집트에까지 진출했으나 632년 6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확고한 계율을 수립해 놓았다.
첫째, 알라신을 배신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하라. 둘째, 생명과 재산을 몰수하라. 셋째, 신정(神政)을 실시하기 위해 코란에 기본을 둔다.

이슬람 경전 코란(Koran)

유일신 마호메트는 이슬람교의 근본교리와 신앙, 종교행사에 관해 코란(Koran)을 통해 규정해 놓았다.
마호메트가 가브라엘 천사에 의해 신의 계시로 얻은 코란의 특징은 첫째, 알라신은 유일신이다. 이를 절대자로 숭배하며 계율이 엄하고 내용적인 면에서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자신이 신의 교리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마호메트는 632년 6월 8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의 죽음은 자연사(自然死)가 아니고 신의 계시와 유일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일부 지도자들이 그의 신성(神性)을 과신하여 마호메트와 논의하여 독약으로 죽였다가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예수 부활처럼 널리 전파하기 위해 독약을 사용했으나 다시는 소생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는 설이 있다.
그들은 또한 신이 이미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고 예수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한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마호메트를 통한 신의 계시는 유일하면서 이것이 신이 최종적으로 인간에게 주신 계시라고 주장한다.
신이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시 밖에 없다고 하고 그 책임은 예언자에게 주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유일신 알라는 이슬람 계시의 신으로 6일간 천지를 창조했고 전능(全能)하신 신은 인간이 지키게 하는 율법을 주셔서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직 신에게는 복종할 것뿐이고 신에게 귀의(歸依)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강조한다.
그들이 이슬람(Islam)이라는 말의 과거분사인 모슬램(Moslem)을 교도(敎徒) 또는 신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신의 계율에 절대 복종만이 신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교주 마호메트만이 예언자라는 것은 그의 교훈 그대로 신의 계시이며 유일한 예언자 마호메트를 떠나서는 구원도 신으로 가는 통로도 없다고 강조한다.
이밖에 신을 보좌하면서 한편으로 인간에게 협조하고 천국과 지옥을 지키는 업무를 맡아보는 천사들, 또는 경전, 심판의 날, 선과 악에 대한 신의 예정 같은 교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교훈은 자연스럽게 신도들에게 절박한 심판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며 사후의 부활, 최후의 심판뿐만 아니라 낙원과 지옥의 교리까지도 제시해 주고 있다.

알라(Allah) 신(神)

마호메트는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부터 다른 모든 다신교(多神敎)의 신을 부정하고 유일신만 믿게 했다. 알라신은 우주만물을 창조했으며 알라신 이외는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알라신은 지상신(至上神)으로 전지전능한 절대자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대자대비한 덕을 갖춘 초월적이며 가장 친근한 존재자라고 주장했다.
코란경은 650년경에 제3대 칼리프인 우스만의 명을 받아 만들어진 표준본으로 그 속에 교리와 제도가 있고 마호메트의 생애와 사상이 있다.
‘무슬림’(신자)들은 이를 독송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함께 갖춘 경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랍어의 원전에 따라 저작된 것이므로 해설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경전의 구성 요소는 3가지다.
첫째, 지(知), 알라신의 계시를 잘 알고 이해하라. 둘째, 언(言), 마음으로 믿고 이를 잘 표현하라. 셋째, 행(行), 믿는 자로서 의무를 실행하라.
또 이슬람교도에게는 5가지 행위가 있다.
첫째, 증언(告白), 나는 알라신 외는 믿는 것이 없다. 둘째, 예배(살라트), 일정한 시간에 규정된 예배를 드린다. 일출·정오·하오·일몰·심야 등이며 반드시 메카를 향해 절을 한다. 셋째, 희사(자카트), 일종의 세금으로 신도의 의무이며 이슬람 국가의 재정이다. 넷째, 단식(禁食), 음식·흡연·성교를 금하고 잡담도 금지된다. 다섯째, 순례, 모든 무슬림은 매년 12월에 메카 또는 카바신전을 순례해야 한다.
이슬람에 입교(入敎)하면 먼저 알라신에게 복종하는 절대 서약이 있다.
첫째, 유일신 알라에게 예배하고 마호메트가 예언자임을 믿는다. 둘째, 하루에 5차례씩 메카를 향해 기도하고 매주 금요일에는 특별기도를 드린다. 셋째, 믿음에 따르는 물질을 시여(施與)해야 한다. 넷째, 교주가 계시 받은 9월에는 단식행사를 갖는다. 다섯째, 정한 일자에 메카를 향한 순례의 의무를 지킨다.
1년 후에는 지도자에 따라 기도 대신에 코란경을 암송하는 사례가 생겼으나 오직 메카를 순례하는 행사는 가장 중요한 신앙 행위로 엄수한다.
메카 순례는 AD 631년 마호메트가 처음으로 참례한 이래 순례자는 카바의 벽상에 있는 돌에 입 맞추고 그곳 우물물로 몸을 씻고 사원을 일곱 번 돈 다음 언덕으로 올라 돌 7개를 던지고 산에서 제물을 잡는 행사를 갖는다. 이 같은 모든 계시와 교훈이 코란에 수록되어 있다.
계시(啓示)라는 뜻은 코란경이 이슬람교의 신조와 교리를 대표하는 것으로 신을 1인칭으로 예언자의 입을 통해 말한 것이며 메카를 성지로 삼아 마호메트의 교훈과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 즉 신의 말씀이 마호메트를 통해 계시된 것이 코란이라는 뜻이다.

코란의 편집

마호메트가 생존해 있을 때는 코란이 없었다. 그의 사후 최초 귀의한 제자 아부베크르에 의해 수집되고 그 후 점점 추가되었다. 이렇게 수집된 내용들은 장단이 일정하지 않아 114장으로 정리되어 그 어느 장에도 자비와 사랑의 신으로 이름을 부르며 편집됐다.
코란의 내용이 연대별로 정리되지 않아 신앙적 교훈 이외 예언, 법률. 정치, 군사 등의 내용도 들어있다. 처음에는 아부베르크 교장(敎長) 당시 (632~634) 기록이나 다시 644~656년 사이에 증보되어 오늘날의 코란으로 완성됐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교도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는다.
코란과 전설집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4개 학파가 각기 특성 있게 경전을 해석한다.
1학파, 아나스파(메디나의 법률가, 796년 사망)는 전설의 사실(史實)에 구애됨이 없이 법률로써 실행할 수 있는 것에 중점을 두는 학파로서 북부 아프리카, 이집트, 스페인이 중심 지역이다.
2학파, 라니파(페르시아 출생, 767년 사망)는 전설보다 코란에 의해 실제 적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비유적인 해석으로 돌린다.
3학파, 샤이피파(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활동, 820년 사망)는 코란이나 전설에 실려 있지 않더라도 교단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주로 아라비아에서 적용되어 있었다.
4학파, 함발파(남부 아라비아 출생, 855년 사망)는 함발의 주장을 그대로 해석한다. 주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통용되어 왔다.
이처럼 경전과 그에 부가되어 있는 전설에 대한 색다른 주장들을 가지고 경전해석의 4대 학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전파

이슬람교는 군사에까지 종교적 신념을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에 왼손에는 코란, 오른손에는 검을 잡고 포교와 정복을 동시에 일으키고 있다. 아라비아로부터 시리아, 인도,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스페인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660년에서 750년 사이 다마스코 시대에는 북부 유럽을 제외한 지중해를 호수로 하는 큰 세력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 잠시 이슬람 내부에 대립과 분열이 있었다. 그러나 1517년 이후에는 터키가 이슬람의 중심세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역사 과정에서 교권이 확립되고 종교적 세력이 확대되어 수학, 천문, 화학, 의학, 광물학 등 학문도 넓혔다. 그러나 회회교 자체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을 통해 이슬람의 원대한 종교철학을 수립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집이 오늘의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이슬람의 신앙내용에 융화되어 그들의 신학과 세계관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신 프라톤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서양철학에서 회교적인 신관(神觀)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주목할 만한 이슬람의 종교적 세계관을 형성해 주었다는 결론이다. 먼 뒷날에 이슬람을 통해 유럽의 철학과 철학계가 깊은 영향을 받아 중세기의 스콜라 사상을 성취시켰음은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적 철학사상의 신관도 이슬람의 전설적인 신학에 반동적 세력이 일어나서 반대편에서 대립을 가져오게 됐다. 그 세력의 주체가 알 아샤리라는 지도자이다. 그는 꿈에 마호메트로부터 코란을 사수하라는 신기를 받았다며 이슬람의 전설성을 지키는 경건한 신앙운동을 전개했다.
알 아샤리는 코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신의 창조, 심판, 예정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의 뒤를 잇는 알 가자히는 이성을 배척하고 신에 의한 구원의 신앙을 굳게 깊이 체험하기를 중요시하면서 신비주의적 경향을 강조했다.
철학적인 신관에서 경견주의 신앙으로 재건을 위한 신앙운동에도 많은 협조자가 나타났다. 18세기에 이르러 원시 이슬람교로 복귀하여 후대의 불순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운동이 이슬람교 내부에서 크게 일어났다. 19세기 초에는 이슬람교가 전 아랍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중세기에 와서 이 운동의 주축이 와하브라는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와하브파’라 명명하니 일종의 복고운동이었다. 현재도 아라비아는 물론 중국, 아프리카, 태평양의 여러 섬사람들에게 전파되어 그 수는 2만 4천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국과 일본에서는 교회와 신도가 크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십자군과의 전쟁

이슬람 세력이 성지를 장악하자 바티칸 가톨릭은 성지회복을 위해 이슬람과 전쟁을 일으켰다. 로마제국의 그리스도 교도들이 주체가 되어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거의 200년간의 전쟁이었다.
제1차 원정에서부터 성공, 패전, 승전을 거듭하면서도 결코 성지는 완전 회복하지 못하여 8차 전쟁까지 벌였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성지는 이슬람의 관할 하에 있다.
그러나 세계의 여론에 따라 이슬람도 성지를 개방하여 세계가 자유롭게 관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도 동양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인도는 오래전에 선교가 됐고 말레이시아에도 상륙하여 동남아가 이슬람교화 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슬람교도는 약 25억 내외로 세계인구의 25%를 점한다. 주로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중동, 동부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중국의 오지,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한국의 이슬람교

1950년 6.25 때 세계 16개국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터키군에 의해 1955년 9월 ‘한국 이슬람교’협회가 발족했다. 교회는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시작하여 1976년 용산구 한남동에 이슬람 중앙성원이 설립되고 1980년에는 부산에 제2성원, 1981년에는 경기도 광주에 제3성원, 1986년에 안양시에 제4성원 및 전주시에 제5성원이 건립됐다.
한국 이슬람교는 1970년대 중동건설 붐으로 교세가 확장되는 계기를 맞았다. 그로부터 이슬람교 배가운동이 전개되어 경기도 용인에 ‘이슬람대학’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
이슬람 문화는 7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동안 아라비아에서부터 정치적 중심세력으로 이란인과 투르크인들에 의해 세계문화로 발전했다. 이슬람 문화는 고대 서아시아 문화를 계승하면서 그리스와 인도 문화를 혼합하여 세계적인 이슬람 문화로 형성됐다. 이슬람 문화는 AD 661년경 우마이야 왕조시대에 시리아 정치의 중심이 되면서 그리스의 학문과 공예를 받아들이고 다시 본래의 이 지방 문화를 계승하여 이슬람 문화로 발전했다. AD 750년부터 1258년 사이 정치의 중심이 이라크로 옮겨가자 페르시아계 제도의 문화가 이슬람 문화로 흡수되었다.
이에 따라 다시 그리스 고전 연구와 번역사업이 발전했다. 9세기에는 그 문화가 절정을 이뤄 바그다드에 세워진 ‘지혜의 집’을 중심으로 철학과 천문학에 이어 수학, 의학, 지리학 등은 물론 문학에도 영향을 미쳐 독특한 우화집으로 아라비아나이트의 모체인 ‘천일야화’가 탄생했다. 또 9세기에는 이것이 아라비아어로 번역되고 인도의 천문학과 의학도 함께 번역되었다.
이어 아비스 왕조 초기에는 중국의 제지기술이 들어와 기록과 인쇄술이 발전하고 회화와 직물까지 11세기 초에는 이슬람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0호 (2015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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