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스웨덴 작품, 감독 보 비델베르크

[DVD로 만나는 명작 영화 (9)]

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
1967년 스웨덴 작품, 감독 보 비델베르크
피아 데게르마르크, 토미 벨그렌, 렌나르트 말메르


글/ 박윤행 전KBS PD, 파리특파원, 경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역임

‘1889년 스웨덴 육군 중위 식스틴 스파레와 덴마크의 줄타는 소녀 엘비라 마디간 /본명 헤드비그 젠슨 덴마크 숲에서 권총을 쏘아 자살하다. 이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다’라는 자막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꽃밭에서 뛰어 다니며 놀던 어린아이가 어딘가 바라보면, 멀리 풀밭에 누워있는 두 남녀가 보인다. 잠시 움직임이 없는 두 사람 혹시?
그때 남자가 벌에 쏘였다고 소리치며 일어나 뛰어 다니다가 자신의 군복에서 금장 단추와 금줄을 떼어낸다.
이제 탈영병이 된 남자 식스틴과 함께 있는 금발의 처녀는 서커스단에서 줄타기를 하는 엘비라 마디간으로 둘은 사랑에 빠져 자신이 소속되었던 사회에서 도망쳐 나왔다.

▲ 덴마크의 줄타는 소녀 엘비라와 스웨덴 육군 중위 식스틴. <사진=필자캡쳐>

“행복해?” “네. 행복해요. 내가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난 언제나 줄 위에서만 용감했는데”
“나를 사랑하오?” “네.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모차르트 피아노 콘첼토 21번 2악장- 시적 감흥을 자아내는 안단테의 낭만적인 선율은 이제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두 사람의 한없는 기쁨을 연주해준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묻곤 하오.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겠지. 그러나 언젠가는 살아가는 방법이 하나만이 아니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거요”
사랑의 기쁨에 마냥 행복한 두 사람은 어린아이들처럼 꽃밭에서 나비를 쫓아 다닌다. 나비가 자유의 상징이기나 한 것처럼.
그러나 야외에서의 즐거운 식사 중 넘어뜨린 술병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포도주는(순간 음악이 멈춘다) 문득 불길한 미래를 점지하는듯하다.
돈은 떨어져가고 그들을 알아본 사람의 신고를 피해 황망히 도피하는 그들에게 군대친구가 찾아온다.
“일주일동안 널 찾아다녔어. 너의 미래를 그녀가 망쳤어” “그럴거야. 그러나 사랑이 이런 게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느끼듯이 나는 그녀의 눈을 빌려서 세상을 경험하고 있어”하고 귀대를 설득하려는 그에게 식스틴은 답한다.
“행복한가요? 난 불행한 사람들 셋을 알죠. 당신 때문에 식스틴이 떠난 뒤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해 본적 있나요?” 이번에는 엘비라에게 따진다.
“그에게 두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러나 나도 그가 필요해요”
“당신에게 필요한건 남성 팬이죠. 당신 직업이라면 많은 기회가 있을 텐데요”
“그는 내게 첫 남자는 아니지만, 마지막 남자에요”
식스틴의 처 헨리에타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얘기를 먼발치로 들은 엘비라가 (귀를 막자 아무소리도 나지 않는다)자리를 뜨자 식스틴은 “너 일부러 그녀가 듣도록 거짓말한 거지? 넌 이제 친구도 아니야”

▲ 엘비라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겨누는 식스틴.

결국 친구를 설득해보려던 동료의 시도는 무위로 끝나고, 오직 사랑만이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제 돈은 바닥이 나고 식스틴은 일거리를 찾아 나서지만 구할 수가 없고, 배고픈 두 사람은 산딸기를 따 먹으며 허기를 때운다.
축제에 연기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엘비라에게 다리를 보이라며 춤을 추면 돈을 주겠다고 한다.
무릎 위까지 다리를 보여줬다는 한 남자의 말에 흥분한 식스틴은 그를 두들겨 패고, 덕분에 엘비라는 돈도 못 받고 동네를 떠나야한다. 풀밭을 뒤져 열매와 나물을 캐먹는 두 사람. “사랑만으론 살 수 없어요”
“그럼 내가 일자리를 갖기를 원해? ‘난 탈영병인데 일자리 좀 주세요’하고 말할까?” 다그치는 식스틴. 다툰다.
시냇가에 따로 따로 떨어져 앉아 물끄러미 시냇물만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식스틴이 수첩을 찢어“용서해 줘”라
고 써서 물에 흘려보내고 이를 본 엘비라 달려와 포옹한다. 그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엘비라는 결코 식스틴을 원망하거나 떠나려하지 않는다.
주린 배를 채우려고 꽃도 따먹고 풀을 뜯어먹던 엘비라 토하고 만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이해 못해요? ”
“말하지 마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늦은 밤 꼭 껴안고 누운 두 사람 “배가 너무 고파요”
“어떻게 하면 끝나나요?” “심장” “관자놀이”
죽을힘을 다해 팔씨름에서 이기고 얻은 한 덩이 빵과 양계장에서 훔친 네 알의 달걀을 피크닉 바구니에 담아들고 둘은 아침을 먹기 위해 들로 나간다.
식스틴은 슬며시 권총을 바구니 안에 숨긴다.
허기져 쓰러진 엘비라를 부축하여 큰 나무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조촐한 최후의 식탁을 준비한다.
엘비라는 빵조각에 버터를 바르고 식스틴은 포도주병에서 맹물을 따르고, 바구니에 눈길을 주던 엘비라 물기어린, 그러나 강열한 눈빛으로 재촉하듯 식스틴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길을 피하는 식스틴. 엘비라는 팔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진다. ‘오 슬퍼하지 말아요.’ 하고 말하는 듯.
시선을 떨구고 빵 한쪽 베어 물은 식스틴, 그의 목을 가볍게 쓸어안는 엘비라, 다가앉은 식스틴 그녀의 목을 당겨 꼭 끌어안고 바구니의 권총을 꺼내 그녀의 관자놀이에 겨눈다.
“난 할 수 없어” “해야 해요”
“할 수 없어” “해야 해요. 다른 선택이 없어요”
식스틴은 강하게 머리를 가로 젓는다.
다시 나비를 쫓아 다니는 엘비라, 바라보는 식스틴, 엘비라, 총을 겨누는 식스틴, 잡았던 나비를 놓아주는 엘비라, 총소리, 정지화면. 다시 총성.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 잡았던 나비를 놓아주는 엘비라,

도저히 사랑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식스틴 자신도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을 포기하거나 후일을 기약하고 각자 자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까?
조국과 가정을 배반한 파렴치한 범죄자의 신분으로 추락하여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굶주림이란 막다른 골목에까지 쫓긴 도피자와 그의 여인의 무모한 애정행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대부분 현실을 받아들이고 결국엔 사랑을 포기하기 마련인 상황에서, 사랑대신 목숨을 포기하는 어리석고도 눈물겨운 선택을 한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은 풀려난 나비처럼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그들이 가질 수 있었고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것. 사랑.

사랑은 그 둘의 모든 것이었다.

스웨덴 영화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인 이 작품은 1967년 칸느 영화제에서 방년 18세의 신인 피아 데게르마르크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삽입곡으로 쓰인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은 이후 엘비라 마디간이라 곡명이 부쳐질 정도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스웨덴 귀족 출신의 31세 유부남 장교와 서커스단 줄타기 18세 소녀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과 정사는 당시 유럽을 떠들썩하게 하였고, 1943년 영화화되었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보 비델베르크 감독은 수채화를 그리듯 유려하고 아름다운 파스텔 톤의 영상을 빛으로 그려낸다. 행복한 시절에 깔리던 초반의 배경음악은 그들의 기쁨이 사라지면서 점차 사라져 뒤에는 배경음악이 거의 없고, 마지막 정지화면은 영화사상 가장 효과적인 정지화면의 하나로,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라스트 씬으로 영화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1호 (2015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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