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기술자립의 단초 확립

[원자력연구 회고(12)]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 (7)
중수로형 핵연료 국산화
원자력 기술자립의 단초 확립

▲ 故한필순 박사

故한필순 박사(2015년 1월 25일 작고)가 남기고 간 미완성 원고는 생전 그의 바람대로 우리나라 원자력기술자립의 길을 함께 걸어온 동료이자 후배들에 의해 엮어졌다.
2015년 새해를 맞이하기에 앞서, 한필순 박사는 그와 함께 원자력기술자립의 험난한 고개를 넘어준 동반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후세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함께 완성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마치 1982년 원자력연구소 대덕공학센터 분소장으로 부임한 그가 국내외 정세 변화로 시련에 빠진 연구원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잃은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에게는 넓은 부지와 그 동안 어렵게 마련한 연구시설이 있으니 힘을 모아 보자.”며 희망을 주었던 당시로 되돌아 간 듯했다.

故 한필순 박사의 미완성 회고기록

한필순 박사는 1991년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퇴임한 후, 과학자로서 접어두었던 삶을 살아오다, 지난 2010년 원자력계 후배들의 권유로 한국원자력연구원 상임고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나라가 UAE에 수출한 원전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논할 때면, 어디서든, 누구든 한필순 소장님을 회상하곤 했고, 그가 돌아오자 후배들은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허심탄회하게 그를 찾아 의견을 나누곤 했다.
운명하기 전까지 원자력기술자립 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의와 집필 활동에 전념했던 한필순 박사는 오늘날 젊은 세대들을 보며, 17살에 피난길에 올라 어머니를 잃고 갈 길을 헤맸던 자신이 떠올라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1950년 당시 고아가 되어버린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은사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따뜻한 한마디와 예리한 조언을 건네며, 멘토가 되어 주었다.
한필순 박사가 후세에 전하고 싶어 한 ‘우리나라의 에너지 자원 확보를 위한 원자력기술자립 정신’은 본지 1월 호 원고를 작성한 남장수 원자력학회 사무총장을 비롯, 한국원자력연구소 선임단장(부원장급)을 역임한 박현수 박사, 사우디 현지에서 원자력기술 자문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병구 박사, 추운 겨울 난방시설도 없는 연구실에서 핵연료주기 연구에 흠뻑 빠졌던 노성기 박사와 서인석 박사, 사업관리 능력을 발휘한 이익환 전 한전원자력연료㈜ 사장,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활약한 전풍일 박사, 원자력국제정치기구에서 활약한 장홍래 박사에게 이어졌다.
또한 기술자립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 한국원자력연구소에 갓 입사한 신입 소원이었던 현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최영명 원장, 현 원자력학회 장문희 학회장의 회고에서 한필순 박사의 리더십과 지혜가 후배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국산 중수형 핵연료 최초 출하 (1984년 8월 29일)

우라늄 분말제조의 주역 이야기

이번 7월호, 후세에 전하는 이야기의 마지막 주인공은, 우리나라 원자력발전 기술자립의 단초가 된 ‘중수로형 핵연료 국산화 사업’의 핵심기술인 우라늄 분말 제조를 성공으로 이끈,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장인순 박사이다.
한필순 박사가 대덕공학센터로 부임한 1982년 3월, 대덕공학센터는 한국원자력연구소의 분소로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뚜렷한 연구 목표조차 세울 수 없었던 시절의 비참함을 대변하듯, 퇴근 시간만 되면 대부분의 연구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런 데카당스 한 분위기 속에서도 밤새 불빛이 새어 나오는 실험동이 있었다. 바로 이번 호의 주인공인 장인순 박사가 이끄는 핵연료변환팀의 천막 실험동이었다. 5~6명의 연구원이 군대 막사 같은 실험동을 만들어 놓고 밤낮 없이 실험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 모습은 연구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고민하다 늦은 산책을 나온 한필순 박사의 눈에 들어왔다.
이 후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이 시작되자, 핵연료변환팀은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 한필순 박사는 그 때 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구비를 증액시켜주었다. 장인순 박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필순 박사의 핵연료변환팀에 대한 특별한 애정덕분에 다른 동료 연구원들의 부러움과 질투 아닌 질투를 자아냈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핵연료로 사용하는 농축우라늄을 분말형태로 만드는 10톤 규모의 파이롯트 플랜트 건설을 위한 예산서를 만들 때의 일이다. 당시 장인순 박사는 빠듯한 연구소 재정을 생각해 9억원을 만들어 감사 결제를 받고, 최종 소장 결제를 받으러 한필순 소장을 찾아갔다. 실제 파이롯트 플랜트 건설에 10억원 이상이 필요했지만, 1980년대 당시 9억원도 워낙 큰 예산이었기 때문에, 선진기술자료는 물론 실험실에 필요한 비품 등은 발로 뛰어서 확보할 생각으로 줄일 수 있는 비용은 줄여 최소 예산안을 작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필순 소장은 예산서를 쭉 보시더니 결재 서류에 크게 X자를 그리시며, 장인순 박사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장 박사는 줄이고 줄여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 했는데, 한필순 박사는 오히려, “9억원으로는 부족할 것이니, 11억원으로 증액시켜라.”고 지시했다. 한필순 박사는 평소 장인순 박사와 핵연료변환팀원들의 연구자로서의 사명감에 대한 믿음으로 최대한의 지원을 해 주었으며 이는 핵연료 국산화를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인 장인순 박사는 고려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아이오와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그는 1979년 유치과학자로 귀국하여 한국원자력연구소 화공연구실장과 화공재료연구부장 그리고 연구개발 단장을 거쳐 1999년부터 2005년까지 6년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역임 하였다. 이어 IAEA사무총장의 원자력에너지자문위원(SAGNE)을 역임하였다.
대표저서로는 ‘상상력은 우주를 품고도 남는다.’, ‘Overview of Nuclear Fuel Cycle Engineering’가 있다.

- 한필순 박사의 경제풍월 기고 목록 -
2014년 8월, ‘지도자의 자주국방 의지-ADD창설, 원자력기술 자립까지’
2014년 9월, ‘일본의 힘, 원자력 기술-600만평의 인프라’
2014년 10월, ‘중국, 원자력강국의 꿈-원전 273기 건설을 향한 일념’
2014년 11월, ‘미국, 핵의혹 대상 지목-원자력연구소 폐쇄 압력’
2014년 12월, ‘원자로 도입에서 수출까지-연구용 원자로 자력 설계·건조’
2015년 1월,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①-핵연료 기술 국산화 대장정(남장수)’
2015년 2월,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②-원자력외교 주역들(전풍일, 최영명, 장홍래)’
2015년 3월,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③-원자력기술자립 일생, 한필순 박사 공적 추모’
2015년 4월,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④-혁신적 사고의 동반자(김병구, 이익환)’
2015년 5월,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⑤-핵연료주기기술 연구개발(서인석, 노성기, 박현수)
2015년 6월,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⑥-원전의 심장, 노심 설계기술자립(장문희)’
2015년 7월,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⑦-비커에서 상용공장까지의 긴 여정(장인순)’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1호 (2015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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