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연료 물질 U O₂분말제조
Beaker에서 상용까지 긴 여정

글/ 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

정부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1979년, 필자에게 주어진 연구과제는 원자력발전소 핵연료에 사용할 수 있는 이산화우라늄(UO₂) 분말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고압 하에서 사용되는 핵연료는 원자력발전소 가동의 안전성과 크게 관계가 있으며, UO₂분말 자체의 스펙이 매우 까다롭고 조건이 많아 최적의 생산 공정의 조건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제로베이스에서 핵연료 분말 제조 연구

1979년 당시 연구소의 연구 환경은 그야 말로 제로베이스였다. 필자가 속한 화공연구실에 모인 연구원 5명이 1년동안 사용할 수 있는 연구비는 1천만원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실험대조차 구입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사과박스를 쌓아 올려 비닐을 씌운, 제법 그럴듯한 실험대를 만들어 사용했다. 싱크대와 제대로 된 환기 시설은 꿈도 꾸지 못했고, 실험을 위해 꼭 필요한 비커 몇 개만을 갖출 수 있었다.
옛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당시에 연구소의 빈약한 도서관 시설 및 연구 시설의 미비로 대부분의 연구원이 관련 문헌을 찾기 위해 또는 실험에 필요한 기자재를 구입하기 위하여 서울의 타 연구소 도서관이나 청계천 주변 상가를 찾아 헤매고 다녀야만 했다. 30여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가난한 조국의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 당시 청계천 주변 상가들은 그야말로 만물상이었다. 청계천 상가는 부품과 재료를 공급하는 유일한 곳으로 특히 연구기관이나 중소기업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 곳이 없었다면 많은 기업들이 필요한 부품을 구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부언하면, 필자는 서울시가 청계천을 복원한다고 할 때에 그 곳에 “조국근대화 상징물”을 건립 할 것을 건의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 당시 청계천 상가를 오가며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연구자, 기업가들은 그 중요성과 역할을 잊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이런 열악한 연구환경 속에서도 우리 연구자들이 불굴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후손에게는 더 나은 세상을 안겨줘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리라.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우리 연구자들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다.
‘과학기술강국’의 기치가 지도자의 부재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창시개명’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필자는 당시 과연 이곳이 내 생의 모든 열정과 시간을 바쳐서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할 가치가 있는 곳인가 하는 회의와 깊은 좌절에 빠져 고민하기 시작했다. 연구를 할 수 없는 연구소라면 차라리 대학에 가서 강의를 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해서 연구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몇몇 동료연구원들은 이미 떠났고, 나머지 동료들도 모두 다 자기 살길을 찾아 뿔뿔이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침체된 연구 분위기는 마치 거대한 선박이 기관 고장을 일으켜 방향감각을 잃고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연구과제는 그저 연구를 위한 연구일 뿐이고 더욱이 정부나 관련 기관의 기술자립의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가 1년 이상 지속되었다.

새로운 바람, 불굴의 의지와 비지땀의 결실

1982년, 활기를 잃어버린 연구소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로 故한필순 박사가 한국원자력연구소의 분소인 대덕공학센터의 분소장으로 부임해 오면서, 부존자원이 전무한 한국의 미래는 오직 “원자력기술자립”뿐이라는 대 전제하에, 원전기술자립의 뿌리가 된 “중수로(월성로)형 핵연료 기술개발 국산화 사업”이라는 국가과제를 만들어 격려와 지원을 해줌으로써 우리 연구원들은 흩어졌던 마음을 다시한데 묶어 연구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82년 말 우리 연구자들은 ‘지난 3년여 간의 기초실험’을 바탕으로 완성한 UO₂분말 년 1톤 규모의 아주 작은 파이롯트 플랜트를 건설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설을 통해 생산한 UO₂분말이 핵연료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는 확신과 함께, UO₂분말 제조 공정인 AUC(Ammonium Uranyl Carbonate)공정 개선을 위한 엔지니어링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83년에는 UO₂분말 생산을 위한 상용공장 규모로의 스케일업(Scale up)에 필요한 엔지니어링 데이터 및 월성원자력발전소에 장전할 핵연료를 직접 생산 공급할 목표로 10톤 규모의 파이롯트 플랜트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구실에서 비커만 가지고 기초 연구만을 했을 뿐, 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연구원들로서는 년 10톤이라는 작은 규모의 파이롯트 플랜트 조차도 대단한 도전이었다.
이 조그마한 파이롯트 플랜트가 건설되던 ‘83년의 여름은 유난히도 무덥고 길었다. 90%가 넘는 습도에 40℃를 오르내리는, 흡사 한증막 같던 대덕공학센터(현 한국원자력연구원) H-동 3층에서 전 연구원들이 밤을 새우면서 흘린 비지땀이 밑거름이 되어 그해 9월 17일에 액체 폐기물 처리 공정을 제외한 전 공정, 즉 증발-여과-배소·환원-안정화 공정을 우리의 기술과 손으로 성공리에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룬 성취감을 만끽할 겨를 없이, 월성원자력발전소에 공급할 핵연료 생산이라는 절대 절명 아래 서로를 위로하며 하루 24시간 조업에 들어간 것은 10톤 규모 파이롯트 플랜트 준공식이 끝난 직후 부터였다.

잃어버린 밤잠 보상 받은 ’84.7.13 Good Friday’

핵연료 제조에 사용하는 UO₂분말은 적합한 물리화학적인 특성을 갖추어야 하는데, 특히 우라늄과 산소구성 비율, UO₂입자의 모양, 그 크기의 분포, pore의 크기와 분포, 비표면적, 그리고 밀도(tap density) 등의 모든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키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더욱이 증발조, 침전조, 유동층 반응기 등에 있어서 우리의 기대와는 달라 사소한 사고 등으로 시운전 기간은 예상을 훨씬 빗나가 약 10개월 만인 ‘84년 7월 13일(good friday)에야 비로소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UO₂분말을 만들 수 있었다. ‘84-7-13-good Friday’는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흘린 많은 땀과 잃어버린(?) 밤잠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히 기쁜 날이었다. 그 후 UO₂분말 생산에 박차를 가하여 40여일간 2조2교대의 연속 철야조업을 강행한 결과, 1,200kg의 UO₂분말을 생산할 수 있었다. 동시에 공정의 신뢰성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영원히 선진국의 소유인양 생각되어 왔던 “기술자립의 꿈”이 이루어질 날이 우리에게 멀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배소·환원 공정에 사용하는 유동층 반응기는 외부로부터 공급되는 AUC분말과 스팀, 수소 및 질소 가스들이 잘 혼합하여 고온상태에서 그 유동성이 계속 유지되어야만 한다.
유동층 반응기는 놀랍게도 마치 인체의 심장과 비슷하여 심장마비에 해당하는 초킹(choking)현상이 가끔 일어남으로 인해 유동성이 중지되고 모든 분말이 바닥에 가라앉아 버려 이 UO₂분말은 핵연료 제조에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이 초킹 현상을 제어실에서 전혀 감지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번은 2kg의 UO₂분말을 유동층 반응기에서 실험 중 연결 파이프가 터져서 그 작은 공간이 까만 UO₂분말로 꽉 차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함께 있던 연구원 모두가 옷을 다 벗고 수돗물 호스를 가지고 뛰어들어 몇 시간 동안 실험실 전체를 물로 세척한 후 서로 돌아보니 눈 코 귀 할 것 없이 온 몸이 새카만 UO₂로 덮여있는 모습을 보고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서로를 마음으로 위로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기관지를 통해 우라늄이 우리 몸속에 많이 들어갔지만 며칠 후 검사를 해 본 결과 별 이상이 없었다. 이는 물에 녹지 않는 분말이므로 모두 밖으로 배설되었다고 생각 한다.
유동층 반응기 실험에 대한 우리의 고충은 간호사 출신인 한 연구원 부인의 ‘청진기 아이디어’로 해결되었다. 만일 조업중에 초킹 현상이 나타나면 청진기를 통해서 관찰 미리 감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때 심장마비 환자에게 응급조치하는 전기충격과 똑같이 고압 질소 가스로 강한 충격(pulse)을 주어 초킹 현상을 파괴시켜 유동현상을 되돌려 줌으로써 정상조업을 할 수 있었다. 유동층 반응기의 조업상태 점검에 청진기의 사용은 비파괴검사법으로 최고의 특허감(?)이 아닐까?
마치 환자를 진찰하듯 유동층 반응기의 유동성을 청진기로 관찰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추억이며, 기술자립의 성공은 연구원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의 관심과 바람으로 가능했다는 생각을 해 본다.

▲ AUC의 전자현미경 사진 - 원래 모습의 AUC입자(좌), 구형의 AUC입자(우)

기술자립 의지의 승리, 85% 국산화율 달성

우리는 10톤 규모 파이롯트 플랜트 건설과정에서 축적된 엔지니어링 데이터와 조업경험을 토대로 건설 추진 중이던 상용공장에 적용될 전 공정의 자동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다시 25톤 파이롯트 플랜트 건설에 착수하고 ‘85년 10월 18일 그 준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전 공정의 자동화는 작업환경의 개선 및 경제성 제고의 효과 이외에도 공정제어의 균일화를 통한 최종 생성물의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일을 담당한 몇몇 연구원들이 집념어린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국산부품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한결같은 전 연구원의 뜻대로 플랜트 건설에 필요한 재료, 부품 및 기기에 관한 국내업체의 자료를 수집함과 동시에, 서울 구로구 공업지대와 청계천 상가를 탐방하여 찾아낸 국산 부품을 이용하여 국산화율을 85%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모든 장치는 본소 공작실 직원들의 3개월에 걸친 헌신적인 작업의 결과로써 기대이상 훌륭히 제작 되었다.
그 후 한때 내외부의 논란 및 압력으로 사장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본 핵연료변환·재변환공정은 자체 기술개발에 의한 핵연료 국산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준 한필순 소장의 강한 기술자립 의지에 힘입어 ‘85년 1월에 년 200톤 생산 규모 상용공장 건설 방침이 확정 되었고, 동년 3월에 국내 엔지니어링 회사와 설계계약을 마쳤으며, ’87년 12월에 그 준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 상용공장의 많은 방문객 가운데, 미국 국무성의 Dr. Colton과 서독 RBU사의 Mr. Laucht 등의 핵연료 전문가들은 이 변환 공정의 자동화, process layout 및 안전성을 위한 탱크류와 process area를 완전 분리시켜 놓은 것에 대하여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설비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건설비가 자기들 생각의 1/10밖에 들지 않은데 몹시 놀라워했다. 건설비 11억원은 약 4년간에 걸쳐 모두 8개의 연구과제로부터 모은 것임을 밝혀두고 싶다.
필자가 국내 대학의 연구실에서 석사학위 논문 실험을 수행 중이었던 지난 60년대 초 만해도 실험에 사용한 모든 기자재 중에서 국산품이 있었다면 고작 증류수와 질소가스 정도였다. 그러나 4 반세기가 지난 80년대 후반 핵연료 생산공장의 전 공정을 완전자동화 하는데 있어 85%이상 국산부품을 사용하여 자체기술로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발전이며 앞으로 10년 이내에 100%국산화가 가능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간의 연구중 8건의 국내외 특허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또 하나의 수확이며, 이중 일부는 공정에 이용되고 있다.

국가브랜드 “대한민국의 원자력발전기술”

비커를 기울이며 시작한 지 4년 반 만에 우리 손으로 설계 제작한 파이롯트 플랜트가 건설되고 이로부터 생산한 핵연료가 상용발전소에 장전되어 우리 부모형제의 가정마다 불을 밝혀준다는 사실에 그동안 냉난방하나 없는 연구실에서 그 많은 밤을 지새웠던 우리 동료 연구원들의 힘든 연구생활이 충분히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중수로형 핵연료 국산화 사업의 결실은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는 물론 원자로계통 설계기술 자립으로까지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빈손으로 시작하여 오늘날 이 만큼의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연구원간의 인화와 협동이 바탕이 된 연구의 결과라고 확신한다.
냉난방 시설하나 없는 유난히 높은 연구실과 그 구석에 두 면은 앵글과 아크릴로 벽을 만들고 나머지 두 벽은 스티로폼으로 덮은 5평짜리 다락방에서 7명의 연구원이 매년 3~4개월의 철야 작업을 하면서 우리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깊은 밤에 라면과 앞 동네 아낙네의 별미인 닭죽을 서로 나눠 먹으면서 공동운명체라는 한국인의 동질감을 뜨겁게 느낄 수 있었다는 점과, 어느 한해는 연속조업을 위해서 전 연구원이 크리스마스 휴일을 반납했던 일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재변환연구실장이었던 박진호 박사는 그 당시 본인과 가족이 열망했던 미국에서 1년간의 박사후 연수 기회를 기꺼이 포기하고 핵연료 제조를 위한 연구에 헌신을 다해 주었다.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졌던 기술자립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친숙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박진호 박사와 같은 연구자들의 값진 노력의 대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연구자들은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통해, 순수 연구를 위한 연구보다는 실용화(상용화)를 목표로 연구를 할 때 확실히 연구방향을 다각도로 유도하고 보다 많은 고민과 생각과 토론을 유도, 집약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기술개발이야말로 우리 연구자들이 사회와 신뢰를 쌓을 수 있는 현명한 방법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초기에 핵연료 국산화 연구에 대한 좀 더 확고한 정책과 적극적인 인력 및 연구비 지원이 있었다면 적어도 2년 정도의 연구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는 점을 첨언해 두고 싶다.
핵연료를 생산하기 위한 분말 제조 연구라는 작은 열매가 이후 핵연료국산화, 연구용원자로 개발, 한국형원자로개발 그리고 스마트 중소형 원자로개발로 이어지면서, 명실공이 원자력기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함으로써 굴욕적인 원자력기술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원자력기술을 해외 여러 나라에 수출하는 선진 원자력기술수출국이 되었다. 이는 분명히 “대한민국기술브랜드”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할 것이다.

기술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이룬 절반의 꿈

마지막으로 연구실에서 실험실에서 혹은 현장에서 대중이 알지 못하는 많은 어려움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눈부신 과학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역설적으로 인류의 세계사 측면에서 보면 그 많은 전쟁이 없었다면 아마도 과학은 오늘날 같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학사는 어쩌면 전쟁사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유학중 가장 위험한 불소화학 연구실에서 박사과정 논문 준비 중에 폭발 사고로 세 번의 고통스러운 피부이식, 2년의 긴 치료 생활을 이겨내야만 했다. 당시 육체의 고통 보다 귀중한 시간의 낭비가 필자를 더욱 힘들게 했지만, 그 대가로 필자는 강한 정신력을 선사 받았다.
필자는 연구자는 언제나 좀 부족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10명이 할 일을 10명이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대신 7-8명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부족하면, 보다 아끼고, 지혜와 힘을 더 모으게 된다.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함께 고생하고 협동하다보면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게 된다.
1980년대 원자력발전기술 자립 당시, 우리 연구자들은 빈손으로 원자력발전기술을 개발하면서 선진국의 기술자료를 하나라도 더 접하기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했고, 선진 장비를 구할 수 없어 발품을 팔아 손에 넣은 부품으로 직접 설비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의 원자력발전기술에는 우리 연구자들의 희생과 노력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그렇다고 가진 게 없어 버려야했던 연구자들의 자존심과 희생이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어디든 안정적으로 전기가 공급되는 것을 보면서 ‘원자력발전기술자립’에 참여한 연구자로서 보람을 느낀다.
원자력을 하면서 아무 대안도 없이 원자력을 무조건 반대하고 적대시 하는 환경단체를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등산가가 왜 죽음을 무릅쓰고 그 높은 산을 오르겠는가? 원자력이 위험하고 어렵기 때문에 도전할 가치가 있고, 성공하면 그 만큼 큰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은 결코 후퇴 하지 않고 계속 전진 할 것이다. 반핵 단체가 ‘90년대에 KEDO 사업을 통해서 북한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할 때 한번도 반대하지 않았고, 더욱이 북한이 핵 실험을 하고 불바다 운운 하는데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모든 원전운영을 중단하면 고통 받을 사람이 누구이며, 누가 제일 좋아 할까? 고통 받을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고, 좋아 할 사람들은 우리와 원자력기술을 경쟁하는 원자력 선진국일 것이다. 빈손으로 원자력기술개발을 하면서 자료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자존심도 버리고 구걸했던 생각, 장비가 없어 장비 대신 몸으로 대신해야 했던 시절, 기술식민지 국가의 과학자가 받는 비굴함과 굴욕은 무엇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이제 기술식민지로 부터의 해방은 우리가 원하는 절반의 꿈을 이룬 것이고, 나머지는 세계 제일의 원자력발전 수출국으로 도약하고, 그를 통해서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후손들이 청정에너지인 원자력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1호 (2015년 7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