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펑더화이 간 38선 돌파 이견

스탈린의 지도· 감독 전쟁
중공군의 한국전쟁
朴實 전의원, 중국측 공문서 분석해설
모택동 펑더화이 간 38선 돌파 이견

중공군의 6.25 참전을 중국 측 공문서 등을 통해 분석한 ‘중공군의 한국전쟁’은 언론인 박실(朴實) 전 3선의원이 지난 2013년 7월 발간했다.(청미디어) 저자는 ‘이승만 박사와 미국’, ‘박정희와 미국 대사관’ 등의 저서를 통해 한·미간의 외교비사에 관한 전문적인 분석력을 제시한 바 있다.

김일성, 40여차례 스탈린에게 간청

‘중공군의 한국전쟁’에 따르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승인 받고자 직·간접으로 40여 차례나 졸랐다. 1949년 3월, 3번째 모스크바 비밀방문에서 김일성은 남조선 해방의 적기가 도래했다고 강조했지만 스탈린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대꾸했다. 그 대신 군사원조는 약속했다.

▲ 중공군 개입초기에 만난 펑더화이(왼쪽)와 김일성

1949년 10월 모택동은 중국대륙의 내전에 승리한 후 스탈린을 만나 대만 정벌을 위한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김일성은 1950년 1월, 중국대사 이주연 환송파티에서 술에 취해 소련대사에게 중국이 해방되고 남은 문제는 남반부 인민해방이라면서 “남반부 인민들이 나를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뒤 3월 30일 다시 박헌영과 함께 크레물린을 방문 스탈린으로부터 남침계획을 승인 받았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전쟁 3일 내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오래지 않아 허풍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탈냉전 후 비밀문건 해제에 따르면 유엔군이 압록강변까지 북진할 무렵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만주에 망명정권을 세워 게릴라전으로 버티도록 지시했다. 망명정권 작업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1951년 3월까지 진행됐다.

지원군 명목 ‘항미원조’전쟁으로 위장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할 때 맥아더 장군이 항복하라고 통첩하자 김일성은 박헌영을 급히 베이징으로 보냈다. ‘키가 작고 살찐’ 박헌영이 김의 서신을 갖고 주은래 총리와 모택동 주석을 만나 중공군의 파병을 호소했다. 스탈린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노라고 밝혔다.
모택동이 의견을 구하자 반대론과 신중론이 많았다. 주은래도 신중론 편이었다. 모택동이 고심 끝에 참전을 결단하며 미국에 대항하여 북조선을 돕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규정했다. 정규군이 아닌 인민 지원군(志援軍)이란 이름으로 서방측과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택한 것이다.
모택동이 서북군구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를 조선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펑더화이가 1950년 10월 21일, 참모와 경호원만 데리고 지프 편으로 압록강을 건너 평북 창성군 동창 인근 운산(雲山) 금광 모퉁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펑더화이가 4개군 12개 사단, 3개 포병대대 26만명 및 예비군 2개군 8만명이 참전한다고 통고했다. 이어 2~3단계에 걸쳐 총 60만명이 지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감사 감사’(好好)하면서 쌀밥과 김치에다 닭고기를 내 놓으며 “형편이 이래서 대접을 잘못하오니 아쉬운 대로 드십시오”라고 조아렸다.

▲ 북경을 방문, 마오를 만나는 김일성(왼쪽)

당시 인민군은 겨우 3개사단, 공병연대, 탱크연대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중공군은 참전 직후 운산과 온정리 지역에서 국군 1사단과 6사단과 첫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이날 10월 25일을 ‘항미원조’의 기념일로 정해 기념해 온 것이 이 때문이다.

2차공세 후 작전상 애로로 38선 돌파주저

중공군은 공군력의 취약을 고려해 미군을 피해 국군을 중점 공격하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중공군의 2차 공세 때 모택동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 28)이 펑더화이 지휘본부 통역업무를 맡고 있다가 미군기 폭격으로 사망했다. 전황이 다급하여 그를 야산에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펑더화이가 일시 귀국하여 모택동에게 사과했다.
이때 모택동이 “많은 희생자 중의 한사람일 뿐”이라고 말하여 용서를 받았다. 그 뒤 마오안잉의 무덤은 평남 회창군 야산에 그대로 보존됐다.
펑더화이는 2차 공세 후 작전상의 애로를 들어 38선을 넘지 않고 2~3개월 휴식과 정비를 모택동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모는 미군의 재정비 시간을 줄 뿐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주은래도 38선은 이미 미군이 넘어섰기에 의미가 없다면서 38선을 돌파 남하해야 한다고 동조했다.
그 뒤 중공군의 3차 공세 이후에도 모택동과 펑 사이에 의견이 불일치했다는 사실이 1965년도 문화대혁명기를 통해 밝혀졌다. 이 무렵 평은 중공군 참전 이래 3개월 만에 유엔군이 예상보다 빨리 후퇴하여 보급선이 길어 졌는데다가 식량부족, 병기와 탄약 부족 및 신발 부족으로 동사자가 속출하고 공군력의 열세 등 작선상 애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3차 공세 후인 1951년 1월 평남 성천군 군자리 탄광촌 동굴에서 북한과 중국 확대 간부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도 펑더화이와 김일성, 박헌영 등이 논의 끝에 지구전과 사상전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고 뜻을 같이 했다.

중공군 지평리전투 패전후 5차공세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양평 지평리 전투에서 처음으로 심각한 참패를 경험했다. 지평리는 인민군이 점령한 곳이지만 미 24사단 23연대가 리지웨이 장군의 Round-Up 작전으로 탈환했다.

▲ 한반도 북동부 전선 장진호 전투에서 유엔군을 공격하는 중공군들

이 작전은 1951년 2월 소규모 정찰부대가 기갑으로 무장하여 공군의 지원 아래 적을 포위 섬멸하는 방식으로 Paul Freeman 대령이 지휘했다.
당시 중공군은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꽹과리와 나팔을 불어대며 미군부대를 공격하여 Freeman 연대장은 부상을 입고도 전투를 지휘하여 백병전으로 대항했다. 리지웨이 사령관도 헬리콥터를 타고 격전지 상공에 나타나 전투를 격려했다.
지평리 전투가 끝났을 때 중공군은 무려 3만 5천명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이를 두고 ‘제2의 인천상륙작전’이라고들 말했다. Freeman 대령은 이때의 전공을 기반으로 4성 장군까지 승진하여 NATO 사령관을 역임했다.
중공군의 5차 공세는 1951년 4월에서 6월말까지 두 달간 100만명을 동원한 춘계 대공세였다. 맥아더 사령관의 해임으로 미군 지휘부가 바뀐 틈을 이용하여 지평리 전투의 참패에 대한 분풀이 성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철원, 금화, 평강 ‘철의 3각지대’ 격전, 화천부근 사창리 전투, 현리 전투, 파로호 전투 등이 피아간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화천 사창리(史倉里) 전투는 중공군이 미 24사단과 국군 6사단을 공격하여 6사단이 참혹하게 패주했다. 6사단은 북진 때 압록강변으로 진격했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악몽 때문에 무기를 그냥 두고 흩어지고 말았다.
현리 전투는 중공군이 국군 7사단 정면을 포격으로 돌파하여 소양강을 건너 3사단과 9사단 등 국군 3군단을 와해시켰다. 이때 유재흥 군단장 등 지휘부가 분산 도주하여 군단이 해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벤프리트 8군 사령관이 헬리콥터 편에 패전을 시찰한 후 미 3사단을 긴급 투입함으로써 겨우 전선을 회복했다.
반면에 중공군 180사단 3개 연대는 미 24사단과 국군 6사단의 포위 공격으로 6만 2천여 사상자와 3만 8천여명이 포로된 파로호(破盧湖) 참패를 기록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의 휘호를 남겨 오늘에 이른다.

한국일보 기자, 3선의원, 국회사무총장 역임

▲ 박실 전 3선의원

‘중공군의 한국전쟁’ 저자 박실 전 의원은 전주고, 서울대 정치과를 나와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하여 미국 조지아대학원 신문학 석사, 서울대 박사과정을 이수했으며 한국기자협회장을 역임했다. 정계에 진출하여 3선 의원과 국회사무총장을 지냈다.
언론관련 전문 저술과 외교관계 논문, 저술도 많이 남겼으며 ‘중공군의 한국전쟁’은 해병대 전우신문에 1년간 연재한 글을 모아 청미디어에서 출판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1호 (2015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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