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통8달식…기자회견도 능수능란

[경제개발시대 EPB 취재기 (3)]

張基榮(장기영) 불도저 부총리
전부처 지휘권 발동
4통8달식…기자회견도 능수능란


글 /崔禹錫 (최우석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주필, 삼성경제연구소장· 부회장)

중절모, 목도리에 지프타고 쌀, 연탄 순회

그 즈음 어느 시중은행 주주총회 때에 있었던 광경이다. 그 은행에서 편타대출(便他貸出, 타은행의 미결제 수표를 담보로 대출을 하는 것인데 실제는 변칙이 된다)을 많이 했다고 공격을 받자 사회를 보던 은행장은 “정상적인 대출만 해서 어떻게 경제개발을 할 수 있습니까. 경제개발을 위해 대출은 나가야겠고 방법은 없으니 편타대출을 하는 게 아닙니까. 미국이 서부개척시대에 편타대출을 겁냈다면 어떻게 철도가 부설되고 오늘날 미국이 이렇게 발전했겠습니까.”하고 당당히 주장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재정안정계획이 불편한 존재였음은 틀림없는데 한국이 다른 후진국과는 달리 극심한 개발인플레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재정안정계획으로 유솜과 IMF(국제통화기금) 양쪽으로부터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란 평가도 있다. IMF는 대기성차관(stand-by credit) 한도를 주면서 매년 협정을 맺어 재정·금융·외환 부문의 목표를 정하고 그걸 꼭 지키게 했다. IMF의 스탠드바이 차관은 IMF로부터 언제든지 빌릴 수 있는 대출실링으로서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첫 협정을 맺은 1965년 한도는 9백30만 달러이고 그 후 1~2천만 달러로 늘었다. 해마다 IMF 조사단이 한국에 와서 협정상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을 하고는 평가보고서를 주고 갔다. 한국은 조심스럽게 경제운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관행은 197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1966년 들어서는 미국이 한국의 개발성과를 평가하기 시작하고 킬렌 처장 후임으로 온 번스타인(Joel Bernstein) 처장도 원만한 성품이어서 장 부총리의 운신폭도 훨씬 넓어진다. 1970년대 초까지도 미국 원조 없인 모든 것이 어려울 때였다. 우선 원조물자가 있어야 식량을 비롯한 주요 물자의 수급이 가능했고 정부예산도 원조물자를 판 돈, 즉 대충자금이 있어야 겨우 맞출 수 있었다. 공무원 해외연수나 외국전문가의 초청은 원조자금 없인 엄두도 낼 수 없었다. 1960년대엔 원조자금을 얼마나 받느냐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고 자주 신문의 톱을 장식했다. 심지어 기획원 청사 양 옆에 나란히 세워놓은 부총리(관9호)와 재무장관(관12호)의 관용차도 미8군에서 불하받은 검은색 세단이었다. 다른 국무위원들도 불하받은 큰 검은색 세단을 탔는데 장 부총리는 검은색 지프차를 고집했다. 그게 편하다는 것이다. 검은색 중절모를 쓰고 검은색 목도리를 두르고 검은색 지프차를 타고 늘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청와대, 국회는 물론 용산 쌀창고, 이문동 저탄장과 연탄공장, 동대문, 남대문 시장에도 수시로 갔고 밤엔 요정순례를 했다 한다.

박 대통령 참석 월례보고 풍경

장 부총리가 가장 신나한 것은 월례 경제동향보고 때였다. 1965년경부터 박 대통령이 참석하는 ‘월경(月經)’이라 부르는 경제동향보고가 아연 활기를 띄었다. 청와대 수출확대회의와 더불어 경제개발을 견인하는 양대 바퀴였다. 기획원 3층 회의실에서 매월 초에 열리는데 국무총리 여당의 고위당직자, 각부 장관, 경제과학심의위원, 한은·산은 총재, 경제부처 주요간부들이 참석하여 지난달의 경제동향과 애로요인을 점검하고 쟁점사항을 협의했다. 처음엔 경제에 생소한 박 대통령에 대한 교육을 겸해 시작했으나 차츰 경제문제에 대한 정부 여당의 컨센서스를 넓히는 역할을 했다. 기획원이 준비하고 주관하기 때문에 기획원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장 부총리는 행사준비에 정성을 다해 박 대통령을 만족스럽게 했다. 엘리베이터 청소부터 유리창 닦기, 집기 배치 등도 손수 챙겼다. 박 대통령이 걸어 들어올 동선(動線)을 직접 걸어보았다. 한번은 총무과장이 기자실에 와 유리창을 얼마나 깨끗하게 닦았던지 어느 내방객이 정문 유리창에 부딪혀 부상을 입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기도 했다. 출입기자들도 2명씩 월경에 교대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은 슬라이드를 쓰기 때문에 약간 어두운데 며칠씩 공들여 만든 브리핑 차트를 나무 막대기로 짚어 넘겨가며 기획원 국장이나 기획관리실장이 설명을 했다. 만약 보고 중에 부진 부문으로 찍히면 치명상을 입기 때문에 각 부처는 기획원이 무엇을 보고할지 매우 신경을 쓰고 또 치열한 로비전도 벌어졌다 한다. 회의가 시작되면 맨 처음 지난달의 경제실적을 부문별로 보고한 다음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특별보고가 있었다. 외자도입의 진행상황이라든지 고속도로건설 또는 쌀농사 현황 등이었다. 박 대통령이 관심을 가질만하면서도 잘돼가는 아이템을 고르기 위해 무척 고심했다.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고 나서는 새마을 성공사례를 한 두건씩 넣었다.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하다 실수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그달에 선정된 지방군수나 지역 독농가(篤農家)는 사전에 철저한 예행연습을 해야 했다. 박 대통령은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좋아했으므로 보고도 거기에 맞추었다. 기획원도 월경을 앞두고 비상체제에 들어가 부총리가 직접 차트와 내용을 챙기고 실제와 꼭 같이 리허설도 했다. 리허설 때 부총리에게 찍히면 출셋길이 막히는지라 긴장감이 팽팽했다. 그 땐 물가가 가장 관심사항이어서 큰 비중으로 보고되었고 또 논의되었다.

▲ 1967년 1월 4일 경제기획원에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오른쪽)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브리핑하는 모습.

브리핑 연출에 대통령은 2~3시간 꼿꼿

그 브리핑을 듣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령 어느 달 물가가 많이 오른 수치가 나오면 “이번 달 수치는 이렇게 올랐으나 그동안 억지로 미뤄왔던 학교수업료와 전기요금 때문으로 그것을 빼면 평년보다 오히려 낮습니다”라든지 “이번 지수가 많이 오른 것은 마늘, 고추, 채소 등 농산물 때문인데 이것은 다른 면에서 보면 농가소득증가로 연결 됩니다…” 등등 정말 유창하고 자신 있게 설명했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장 부총리는 브리핑 도중에 보충설명도 하고 더러 미리 준비한 기습질문도 하여 참석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장 부총리는 정부미 재고나 방출량, 산지(産地)의 석탄재고, 시멘트 수송상황을 조사해놨다가 담당 장관에게 묻곤 했다. 갑자기 질문을 받으면 여러 사람 앞에서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참석자들은 주요숫자가 깨알같이 적힌 수첩을 들고 왔다. 맨 앞줄의 박 대통령은 담뱃갑과 메모지, 만년필을 가지런히 놓고 가끔 담배를 피우면서 2~3시간동안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부처 간 입장 때문에 가끔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때에도 박 대통령은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간단명료하게 결론을 내리곤 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외국인이 드나드는 곳엔 한글 간판 외에 영어와 한자를 같이 써서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 “새로 취임한 상공장관을 중심으로 금년 수출목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성토록 하라”, “밀수품이나 부정외래품을 단속한다고 세관원이 사람들의 몸을 함부로 몸을 뒤져 말썽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곧 추석이 닥치니 특히 농수산물가격이 오르지 않게 미리 대비하라” “영농기계화를 위해 경지정리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라”, “새마을 사업은 협동해서 잘하는 마을만 도와주고 노력 않는 마을은 도와 줄 필요 없다”, “정부부처에 뭘 해달라고 하면 잘 검토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해주고 할 수 없는 것은 이유를 설명하고 납득을 시키라” 등등. 그때는 공장건설, 증산, 수출에 일로매진할 때였는데 한번은 학자들이 공장건설에 따른 공해문제를 제기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데 도시에 살면서 공해를 걱정할게 아니라 그런 사람은 공기 좋은 시골에 가서 살면 될 것이라고 잘랐다. 요즘에야 공해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관념이 적었다.

기획원 위상높이고 브리핑 간부들 출셋길

월경(月經)은 장 부총리와 기획원에 크게 힘을 실어 주었고 브리핑을 담당한 기획원 간부는 대통령의 기억에 남아 나중 출세들을 많이 했다. 보통 10시경에 시작된 회의가 12시쯤 끝나면 박 대통령 일행은 부총리실에서 식사를 했는데 메뉴는 구내식당에서 마련한 설렁탕 혹은 국수였다. 그날은 청와대 경호실직원이 층마다 쫙 깔려 지키는 바람에 모두들 얌전히 있어야 했다. 한번은 회의가 끝난 후 작은 회의실에서 간단한 칵테일파티가 열리고 기획원 출입기자들을 모두 참석케 했다. 장 부총리가 옆에 서서 기자들을 한사람씩 소개시키는데 박 대통령은 날카로운 눈매로 말없이 악수만 했다. 장 부총리가 마지막에 웃으며 “모두들 우리 사쿠라(은근한 동조자라는 뜻)들입니다” 하고 농담을 해도 말이 없었다. 나중 기자실에 올라와서 장 부총리가 우리를 대통령 앞에서 사쿠라라고 했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이 월경은 1979년 박대통령이 시해된 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5공 전두환(全斗煥)대통령 때 그 자리에서 다시 열렸다. 그 때는 경제부장으로서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박 대통령은 조용히 듣는 편이었는데 전 대통령은 혼자 발언을 많이 하면서 회의를 주도했다. 가령 회의 벽두 “요즘 경기가 나쁘다는 말들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면서 경기가 나쁘지 않은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러니 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았다. 전 대통령은 모든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었고 식사 때도 수출을 많이 한 기업인에게 농담을 섞어가며 격려했다. 그러나 회의 긴장도는 많이 떨어졌다. 한 10년 만에 들어가니 참석자들이 싹 갈려 정말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곳 없네”를 실감할 수 있었다.

능수능란했던 기자회견 풍경

장 부총리는 회의뿐 아니라 기자회견도 최대로 이용했다. 기자회견 내용이 그야말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이었다. 기획원 소관뿐 아니라 경제문제 전반에 걸쳐 거침없이 발표하고 또 견해를 밝혔다. 회견자료를 미리 준비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메모나 기억에 의존했다. 은행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숫자에 밝고 기억력이 비상했다. 오랜 취재수첩을 뒤져 장 부총리의 발표내용을 재생해 보자.
때는 1966년 8월 24일 한창 쌀값이 문제될 때였다. “금년은 농사가 잘 돼 쌀 3천만 석은 수확할 수 있습니다. 그 중 10만 톤(약 70만 석)은 수출할 것입니다. 그 전에 밀가루용 소맥 5만 톤을 수입합니다. 요즘의 쌀값 소동은 햅쌀이 나오기 전의 단경기(端境期)인데다 일부 변두리 상인들의 상술 때문입니다. 서울에 필요한 쌀은 하루 1만 2천~1만 3천 석인데 어제 3만 석이나 풀었어요. 아직 정부 보유미가 34만 석이나 있으니 추석 연휴까지 서울, 부산을 중심으로 무제한 방출하겠습니다. 9월 초엔 경기미(京畿米)와 강원미(江原米) 7~8만 석이 나옵니다. 금년 가을엔 쌀을 많이 구입해 비축합니다. 농림부는 2백 80만 석을 희망하는데 유솜은 2백 10만 석을 주장해 협의 중에 있습니다. 재정안정계획상의 양특적자(糧特赤子)를 각오하고 쌀값을 안정시켜 소비자를 보호하겠습니다.”
현금차관이 문제 되자 “현금차관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허가는 하되 현금차관의 용도를 철저히 관리하면 됩니다. 외자도입의 적정비율, 가령 30%에서 50% 정도의 현금차관이 붙는 것이 외자도입 사업의 촉진을 위해 좋습니다. 내부적으로 비(非)인플레적인 내자조달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현금차관은 불가피하고, 또 빨리 물자로 바꿔 들여와야 합니다. 현금차관은 억제가 아니라 엄선주의로 나가겠습니다.”
“어제 침방위(浸防委) 회의에서 관리통화제도 아래서 경제행정담당자의 책임에 대해 엄숙하게 논의하였습니다. 물가안정은 화폐가치와 노동가치의 안정으로서 하나의 신앙이며 종교입니다. 국민재산 가치의 변동에 대해선 절대적인 책임을 통감합니다. 공정한 시장질서의 형성과 선의의 자유경쟁의 보장은 신과의 약속입니다. 신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절대적인 것이고 인류의 물질적 정신적 활동의 총화입니다.”
“내년은 재정과 금융의 종합적인 균형예산을 편성하겠습니다. 밀가루 값 안정을 위해 우선 정부에서 소맥 5만 톤을 도입하고 보리 대신 밀을 많이 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시중은행의 예금 중 일정 부문을 농협과 중소기은에 예치토록 하여 영농자금과 중소기업자금으로 쓰겠습니다. 증권금융을 위해 현금차관을 하자는 이야기가 있는 데 상식적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전 부처 지휘권 행사하듯 4통8달

정말 사통팔달(四通八達)이었다. 곧이어 8월 31일엔 추석을 앞두고 물가단속 등 부문별 책임자를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즉 밀수단속은 재무부 세관국장, 밀조주(密造酒)는 국세청 간세국장, 암달러는 재무부 외환국장, 대중요금은 서울시 보사국장, 혼식장려는 농림부 양정국장, 특정외래품은 내무부 치안국장 등이다. 쌀이 워낙 귀할 때라 혼식을 장려한다고 음식점도 점검하고 학교에서는 도시락을 검사했다. 쌀로 술 담그는 것을 엄하게 단속했다. 일주일에 두 번 분식일을 정해 국수류만 팔도록 했다. 양주와 양담배 등 외래품과 밀주는 수시로 단속반이 나갔는데 어떨 땐 장부총리 자신이 점퍼 바람으로 따라나서기도 했다. 기획원은 물가억제란 명분 아래 거의 모든 행정부처에 지휘권을 행사했다. 그 땐 밀수(密輸)와 탈세가 많아 정부가 골치를 앓았다. 1965년 7월 정부는 밀수범엔 최고 사형, 탈세범엔 무기징역에 25배의 벌금을 물리겠다고 서슬 푸른 경고를 했다.
장 부총리는 기자들을 어려워하지 않고 후배나 동료쯤으로 대했다. 기자들도 한국일보의 창업사주인 장 부총리를 선배로서 정중히 대했다. 신문사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자신은 신문사에서 두 개의 만년필을 썼다고 말했다. 하나는 회사 수표에 사인하는 용이고, 다른 하나는 사설 고치는 용이라는 것이다. 신문제작도 알고 경영도 안다는 뜻을 자랑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기자회견 땐 먼저 발표를 하고 기자들이 질문을 하면 답변을 하는 방식이었다. 얼렁뚱땅도 많았다. “이번 원조자금을 빨리 쓰기로 했어요. 워싱턴이 아니라 현지에서 허가를 한답니다. X 과장, 그렇지?” 하고 배석한 과장에게 묻는다. 깐깐한 X 과장은 “그게 아니라…” 하고 설명을 한다. 그러면 “이번 케이스는 이렇고 이렇게 된 거 아냐” 하고 다짐한다. 그래도 X 과장은 “아직 통고를 못 받았습니다만…” 하면 “자넨 잘 몰라서 그래. 내가 유솜 처장하고 이야기 했어”하는 식이다.

추궁식 질문에 ‘장관이 기자의 밥이야’

장 부총리는 발표에 대해 질문이 없으면 곤란해 했다. 기자실과 비교적 원만하게 지냈지만 늘 좋을 수는 없었다. 한번은 무슨 일이 있어 장 부총리에게 불만을 구체적으로 표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장 부총리가 발표가 끝난 후 늘 하던 대로 “질문 있어요?” 하고 쭉 돌아보자 기자실 대표가 일어나 “발표 끝났습니까? 오늘은 질문 없습니다” 하고 일제히 일어나 퇴장해 버렸다. 그 때 당황하던 장 부총리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곧 사태조사에 들어가고 기자실과의 현안문제는 바로 해결되었다. 그 다음 회견 때 “기습을 당해 깜짝 놀랐잖아. 다음부턴 말로 해, 말로” 하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좌우간 큰 그릇이었다. 장 부총리는 비판적 기사에 대해서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쁜 기사가 났다 하여 밑에 야단치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획원 기자실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러나 물가가 올랐다거나 무슨 물자가 모자란다는 기사는 예외였다. 인플레 심리와 매점매석 사태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즉각 항의하고 집요하게 정정을 요구했다.
또 언론계 선배인 장 부총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선 예민하게 반응했다. 당시 청구권자금의 낭비가 많고 또 잘못 쓴다고 정치권에서 공세가 심했다. 한번은 기자회견 때 어느 기자가 투박한 경상도 말로 청구권자금이 잘못배분 되었다고 추궁하듯 물었다. 처음엔 조용히 설명하다가 계속 거친 표현으로 따져 들어가자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속으로 참는 것 같더니 추궁이 계속되자 “당신 질문 태도가 그게 뭐야. 질문을 해도 예의가 있어야지. 기자가 검사야? 아무리 그래도 언론계 선배고 신문사 사주인데 그럴 수 있어. 장관이 기자의 밥이야?” 하고 화를 내는 것이었다. 워낙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라 그 기자는 퇴장하고 부총리와 기자들이 같이 사과해 분위기를 수습했다. 그 일 빼곤 장 부총리가 공개적으로 화낸 일은 없었다. 당시 기사에 대해선 기획원보다 정권안보 차원에서 정보기관이 더 난리를 쳤다. 부정적 기사는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숙적인 북괴(北傀)를 이롭게 한다는 명분이었다. 선거 때엔 특히 더 했다. 기관담당자가 기획원을 출입하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늘 체크했다. 공무원들도 이들에 매우 신경을 썼다. 기관원들은 기자들에게 물가폭등 같은 기사를 쓰면 ‘기타의 방법으로 적을 이롭게 한 자(者)’로서 반공법 4조 1항에 걸린다고 겁을 주었다.

일도 많고 사람도 붐볐던 기획원

기획원 기자실은 늘 바빴다. 기획원 하는 일이 많은데다 회의도 매일 열렸다.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장 부총리의 발이 넓으니 경제인은 물론 정치인, 문화인, 언론인도 많이 드나들었다. 온갖 민원이 장 부총리에게 몰렸다. 어느 국보급 여류국악인이 평소 잘 아는 장 부총리를 찾아와서 차관도입 건을 부탁한 모양이다. 장 부총리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유를 물었다. 그 국악인은 이 차관 건을 해결해주면 국악연구소를 차릴 돈을 대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장 부총리는 며칠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며칠 뒤 국악인을 만난 장 부총리는 봉투를 하나 주면서 그 안에 국악연구소를 차릴만한 돈이 들어 있으니 다시는 이런 청탁은 받지 말라 했다 한다. 장 부총리는 돈도 많이 조달했지만 여러 가지로 쓰기도 많이 한 것 같다. 아는 사람들이 와서 어려움을 호소하면 그냥 보내지는 않았다 한다. 나중 큰 소동을 일으키는 김두환(金斗漢) 의원도 가끔 찾아왔는데 기다리는 동안 기자들을 상대로 구수한 입담을 풀어 놓았다.
장 부총리는 사람들을 많이 모았다. 정책설명도 하고 협조도 구한다는 명분이었다. 한번은 여류문인들을 모았다. 회의실에 이름 있는 문인들이 많이 모였다. 장 부총리는 자기는 젊은 시절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으며 지금도 창작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운을 떼었다. 그러면서 정부가 물가안정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사회지도층인 여러분이 근검절약과 물가안정에 솔선수범해 달라는 요지의 말을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한 작가가 “무슨 책을 읽었으며 감명 받은 책이 뭐냐”고 물었다. 무슨 일본작가의 이름을 대자 왜 한국작가는 모르냐면서 창작이란 얼마나 고통스런 사색과 고뇌가 따르는 것인데 그렇게 바쁘게 사는 장 부총리가 제대로 이해를 하겠느냐고 말했다. 장 부총리가 정부의 물가정책을 설명하고 가정주부들이 알뜰하게 살림을 살아줘야 한다고 말하자 어느 분이 대뜸 일어나 “지금 물가가 비싸 가정주부들이 시장에서 콩나물 값 오십 원, 백 원도 깎는 판인데 왜 남자들은 하루 저녁 요정에서 몇 만원 어치 술을 먹느냐. 근검절약해야 할 사람은 가정주부가 아니라 사회지도층 남자들이다”라고 응수했다. 장 부총리는 약간 당황해 하면서 “남자가 밖에서 쓰면 여자가 안에서 절약해줘야지 남자도 쓰고 여자도 쓰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농담 삼아 말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좌중이 웅성웅성했다. 더러 일어나려는 사람도 있었다. 겨우 좌중을 수습하고 장 부총리는 요정 가는 일이 장려할 일은 아니나 낮에 열심히 일하고 밤에 스트레스를 풀어야 그 다음날 원기왕성하게 일할 수 있다고 변명했다. 사실 장 부총리의 요정 출입은 소문이 나 있었다. 장 부총리는 얼른 다른 화제로 돌렸다. 그리고 능수능란하게 화제를 끌고 나갔다. 약 2시간 넘는 간담회가 끝나고 문인들은 비서실에서 준비한 국산화장품 세트를 들고 기분 좋게 나갔다.
이런 회의도 모두 취재해야 하는데다 일도 복잡하여 기획원 담당기자는 재미있으면서도 힘들었다. 5개년계획 같은 것은 이론적인 것이라 기초가 있어야 했고 차관사업이나 예산, 물가 기사도 공부가 필요했다. 그 때 상대(商大) 출신의 젊은 기자들이 한국은행 출입을 거쳐 많이 올라왔다. 그 전에는 영문 자료는 안심하고 책상 위에 두었다는데 이들 젊은 기자들이 온 후에는 자료 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기획원 관리들은 관료 티가 덜 났고 다른 데 비해서는 자유 분망하여 기자들과 잘 지냈다. 위에서 옳지 않다 싶은 일을 강요하면 슬쩍 내용을 흘리기도 하고 일부러 서류를 책상 위에 두고 자리를 잠시 피해주기도 했다. 당시 정보기관의 위세가 대단할 때여서 무슨 기사가 문제가 되면 자료를 준 것과 기자가 훔쳐본 것과는 책임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론이 강한 부처라 무식한(?) 기자들을 많이 가르치려 들었고 자존심이 강해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계속)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1962년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제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한 후 1995년부터 10년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필자는 1965년부터 71년까지 경제기획원을 출입하며 장기영, 박충훈, 김학렬 부총리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취재했다. 필자는 경제기획원 시절의 수기를 묵은 취재수첩과 관계기록, 신문스크랩 및 출입기자 시절의 보고 들은 내용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 형식의 사적 기록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2호 (2015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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