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개혁위원 박종규’
신념 외고집의 소신파
해운공사 공채 입사후 노동운동 체험
우리사주조합 결성, 민영화 불복사직

유별스런 개성으로 소문 난 박종규 KSS해운 창업주를 경제기자 시절 각종 정부위원회 회의에서 종종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신문칼럼 기고에서도 독특한 논리가 돋보였다. 당시 기업인으로서 박 회장의 첫인상은 강성에다 외골형으로 비쳤다.

▲ 대한해운공사 시절 브리핑하는 당시 박종규 과장(오른쪽).

소신과 원칙의 외고집에 금속성 목청

KSS해운 이전의 한국특수선㈜ 대표 시절의 박 회장은 해운업계 인물로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노태우 6.29 선언 이후 노사개혁위원회와 규제개혁위원회에서 만난 박 회장은 기업인 신분으로 고위관리들과 대화할 때 목청이 높고 주장이 명쾌하고 뚜렷하여 금방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노사 간 뜨거운 쟁점이 많은 노사개혁위원회의 경우 노사 간 얼굴을 붉혀가며 논쟁을 거듭하다 보면 지루하고 지쳐 학계와 언론계 등 공익계가 제시하는 중간안으로 타결됐으면 싶었다. 그러나 곧 타결되려는 무렵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다시 반론을 제기하는 양반이 꼭 박 회장이었다.
개성이 강하기도 하려니와 “원칙과 소신에 대한 양보와 타협만은 거부한다”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알고 보면 맨입의 강성은 결코 아니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공기업에 입사하여 노동운동, 우리사주조합 운동을 선도하고 스스로 해운사를 창업하여 다시 체험하고 겪어낸 실전에서 우러나온 의지와 신념을 노사개혁, 규제개혁 토론장에서 펼쳐낸 것이었다.
박 회장이 1993년 6월 바른경제동인회 창립 기념 세미나에 초청, 토론자로 참여하여 박 회장이 해운사 창업 이후 차근차근 준비해온 ‘바른경제’ 운동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날 ‘기업인의 신생활운동 선언’은 참신한 선구적 발상이었다. 그동안 느껴왔던 박 회장의 유별스런 개성의 바탕이 이를 통해 충분히 드러난 것이다.

반짝 아이디어 선원송출 성공

박 회장은 서울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나와 한국은행 입시를 준비하다 대한해운공사 공채 모집에 ‘실력 검증차’ 응시했다가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해운인의 길을 걷게 됐다.
1961년, 취직난이 극심할 때 국영기업 입사란 대졸생의 꿈이었다. 기획실 보험계로 첫 보직을 받고 보니 직속 상급자인 노정계장이 박종규 씨로 신입사원 박종규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편의상 노정계장은 ‘노박’(勞朴), 신입사원 박종규는 ‘보박’(保朴)으로 호칭했다는 이야기다.
보험계 말단 6개월 만에 부산지점 기획실로 전보되어 노동문제와 접촉하게 됐다. 선원들의 취업난이 심각하여 전국해상노조 지부장을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외국선박에 국내 선원들을 승선시키는 아이디어가 발상됐다. 박종규 씨가 노조명의의 영문 서신을 작성하여 미국과 유럽 등 각국 선사에 발송하면서 월 150~200 달러 정도로 우수한 한국선원들을 송출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가 크게 성공하여 많은 선원들이 외국선박에 승선할 수 있었다. 이 공로로 박종규 씨는 1962년 말 팔자에도 없는 전국해상노조 해운지부 부지부장 감투를 받아 노동운동가의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박종규 씨는 대졸 공채생의 젊은 혈기에다 두려움 없이 발상하고 행동했다. 나가다가 막히면 굽히지 않고 뚫고 나가는 성미였다.
이 무렵 인천항에 입항한 파나마선적 외국선에 15명의 한국선원을 승선시킬 기회가 왔다. 그러나 여권을 발급받을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당시 여권발급을 위한 신원조회에만 2주일이 소요됐다. 이때 박종규 씨의 아이디어는 일면식도 없는 청와대 외교담당 안광석(安光錫) 비서관 댁을 새벽에 방문하여 선원수첩을 여권으로 대신하여 선원들을 외국선에 승선할 수 있도록 긴급조치를 요청했다.
안 비서관이 이 당돌한 제안을 거절할 상황이 아닐 것으로 짐작된다. 박종규 씨가 그의 협조를 배경으로 법무부와 교통부 당국자를 면담하자 법무부 차관이 하룻밤 사이에 법무부 부령(部令) 개정안을 결재하여 15명의 선원이 승선할 수 있었다니 당시 박종규 씨의 젊음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저돌적 성격이 눈에 보이듯 느껴진다.

우리사주조합 운동에 박 대통령 서명

신입사원 시절의 ‘보박’(保朴)의 용맹성은 일을 저질러 내고 이를 해결해 내는 공격수쯤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이로부터 금방 선박계장을 거쳐 조선과장으로 승진, 간부가 됐을 때 정부의 해운공사 민영화 계획이 나오고 특정 재벌에게 불하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대응하여 박 과장이 민영화 반대운동으로 우리사주조합 결성을 주도했다. 조선과장 승진 축하 모임에서 박 과장이 각자 회사 ‘주식 100주 사기 운동’을 제안하자 모두가 호응했다. 종업원들이 회사주식을 매입하면 주식분산 효과가 있고 특정 재벌에게 불하도 막을 수 있다는 취지에 선임자들마저 동의했다.
박 과장은 공사의 이맹기(李孟基) 사장 댁을 방문하여 우리사주조합 결성과 1인 100주 사기 운동을 설명하자 사장도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 사장이 애사심(愛社心)의 발휘라고 평가하면서 다만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으니 신중하게 추진토록 당부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박 과장이 우리사주조합 관련 전문가 초청 강연회에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백영훈(白永勳) 박사를 초청, 격려를 받았다.
백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 시 통역관으로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눈물현장을 수행하여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때 강연비로 회사주식100주를 증정함으로써 백 박사도 해운공사 주식 사기 운동에 동참한 셈이다.
곧이어 박 과장이 이맹기 사장을 수행하여 청와대를 방문, 주식 100주 사기 운동을 설명하여 박 대통령의 서명을 받고 이후락 비서실장도 서명을 받아냈다. 이렇게 대통령이 주주로 참여한 우리사주조합 운동에 2,000만원이 모금되자 공개입찰 과정에 참여하여 3만주를 우리사주조합이 확보할 수 있었다.

끝내 민영화에 불복 사직후 창업의 길

그런데도 끝내 1968년 여름, 해운공사 불하설이 구체화되어 나오자 우리사주조합 명의로 ‘민영화 반대 성명서’를 J일보에 게재했다. 그러나 가판에 나온 광고성명서가 배달판에는 삭제되고 말았다. 정부기관이 이를 불순한 의도로 보고 개입했음이 틀림없었다. 이에 즉각 항의하면서 박정희 대통령마저 서명한 기록을 제시하여 광고 사태는 무사히 수습됐지만 해운공사는 한양대 김연준 박사의 한양그룹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한양그룹 계열로 편입된 후 해운공사 운명은 내리막길로 들어서 그 뒤 서주산업의 윤석민 회장을 거쳐 한진해운 계열로 흡수되어 이름이 소멸되고 말았으니 박종규 과장의 민영화 반대 운동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박 과장 성미에 이를 참을 수 없어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제출하고 퇴사했다. 국영기업 공채생에서 잘 나가다가 하차한 실직자 신세로 백영훈 박사가 추천해 준 월남 군납업체에 취업했지만 6개월 만에 퇴사하고 말았다. 기업주가 회사 돈을 개인 돈처럼 꺼내 사용하는 꼴을 잠시도 볼 수 없었던 성미였다. 그 뒤 해운공사 출신 동료들과 이맹기 전 사장의 호응으로 해운사를 창업하여 오늘의 KSS해운을 이룩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첫 직장에서 바다와 해운업을 배우고 익힌 경험을 자산으로 결국 필생 해운인의 꿈과 소망을 성취해 낸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