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의 中庸, 公先後私 정신 신앙

▲ 삼양그룹 남고(南皐) 김상하 회장

家學으로 家業 수성
묵묵히 걸어온 길
삼양훈 계승 金相廈 회장 회고록
선대의 中庸, 公先後私 정신 신앙

양반가문 장수기업 삼양(三養)그룹 남고(南皐) 김상하(金相廈) 회장의 회고록 ‘묵묵히 걸어온 길’이 타고난 성품과 일생의 화려한 활동상 및 삼양의 전통적인 기업문화를 잘 말해준다. 김회장은 부귀다남(富貴多男) 가문의 다섯째로 태어나 선대로부터 배운대로 가업(家業)을 지켜 오면서 대물림 회장직을 맡아 국가와 사회에 대한 온갖 봉사활동으로 자신과 가문을 빛낸 재계의 원로이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 축복받은 인생

김회장은 회고록 서문에 ‘행복한 삶에 남는 아쉬움’이라고 표현했다. 아쉽지만 ‘익숙한 것들’ ‘정든 것들’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됐다는 심정을 적어 놓은 것이다. (1926. 4. 27생)
“좋은 집안에 태어나 고생 모르고 성장하여 가업(家業)을 잇는 심정으로 일했고 선대(先代)의 은덕과 형제들의 도움으로 큰 탈 없이 삼양을 수성(守成)할 수 있었으니 어지간히 축복받은 인생이 아니겠는가”
경제기자의 눈으로 보면 삼양정신에 딱 맞는 말이다. 과욕(過慾) 허욕(虛慾)이 필요없을 만큼 좋은 집안에 태어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김회장은 선대의 가르침을 ‘순리’라고 요약한다. 세상이치 따라 물처럼 처신하라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풀이한다. 이를 가학(家學)이라는 신조어로 설명하니 실감이 난다.
김회장의 아호 남고(南皐) 역시 선대로부터 고향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 따라 형제들이 모두 ‘남쪽 고향 따뜻한 물가 언덕’을 아호로 삼았다는 내력을 소개했다. 맏형 김상준 남계(南溪), 둘째 김상협 남제(南齊), 셋째 김상홍 남령(南嶺), 넷째 김상돈 남온(南溫)에 이어 자신이 남고를 받았으니 일생 ‘묵묵히 걸어온 길’의 내력을 알만하다.

수당과 인촌으로부터 家學 학습

김회장의 울산김씨 가문은 신라왕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부 김경중(金璟中) 아래 선친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삼촌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혈통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 만주 여순고등학교 재학 시절. 뒷줄 가운데가 김 상하 회장

삼양의 기업정신은 분수를 지키라는 양복(養福), 욕망을 절제하는 양기(養氣), 낭비를 금하는 양재(養財) 등 삼양훈으로 설명된다. 삼양그룹의 기업문화가 지금껏 보수적 이미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은 바탕이 바로 이 3대 삼양훈이다.
여기에 선대의 중용(中庸)과 인촌의 공선후사(公先後私) 정신이 가학(家學)으로 김회장에게 전승되어 왔다는 설명이다.
김회장은 셋째형 남령 김상홍을 회고록에서 ‘영원한 동지’라고 호칭했다. 60년간 삼양경영에서 형님, 아우님으로 서로 예우했으니 동지라고 부를만 했다. 남령은 지난 2010년 5월, 88세로 별세했지만 연지동 사옥의 집무실과 집기, 서류 등을 아직껏 보존해 두고 있다.
남령 생존시에 형님이 먼저 출근하고 동생이 조금 뒤에 출근하여 아침인사 나누고 구내식당에서 점심 같이 먹고 하오엔 형이 “아우님, 나 먼저 퇴근하오”라고 인사했으니 너무나 다정한 동지였다.
남령도 지난 99년 9월에 출간한 회고록 제목이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동생의 ‘묵묵히 걸어온 길’과 똑같은 의미다. 남령의 경영철학도 수성(守成)과 중용(中庸) 그대로였다. 근검절약에 청부(淸富) 정신을 실천한 점도 똑같았다.
남고는 김상홍 회장 시절에 대한상공회의소, 대한농구협회 등 대외활동으로 늘 자리를 비웠지만 “매달 월급을 꼬박꼬박 챙겨 주셨다”고 회고했었다.

‘수당의 자제’로 각종 명예직 수락

남고 김회장은 활달하면서도 누구와도 벽이 없는 4통8달 성품이라 부탁을 하면 야박하게 거절을 못해 대외 명예직, 봉사직을 주렁주렁 달고 늘 바쁘게 살았다. 한때 김회장과 대담하며 대강 명예직을 챙겨 보니 무려 50개가 넘었다.
거절 못하는 성품으로 명예직을 맡았다가 임기가 돼도 후임이 없어 중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회장은 명예감투를 맡는 것이 돈과 시간이 소모되는 줄 알면서도 “수당(秀堂)의 자제께서 꼭 맡아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요청하는 바람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비롯하여 민간경제위원회 등을 통한 경제외교 분야, 각종 정부위원회, 환경, 산업관련 기관 등 수많은 명예감투를 받고 나면 단지 명예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업무를 챙기고 행사를 주관하고 인사말을 해야 하는 일정을 직접 소화하는 성품이었다.
이들 대외활동에서 만난 김회장은 논쟁을 조정하고 화합을 도출해 내는 대화와 협상의 명수였다. 회의가 끝난후 회식때는 따뜻한 건배사로 좌중을 활짝 웃겨 친교(親交) 모임으로 바꿔 놓는다.
김회장이 한국장묘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 이사장을 10년이나 맡았던 사연이 있다. 고건 서울시장이 몇차례나 부탁하여 어쩔수 없이 맡았다가 화장문화를 3D 기피 업종 쯤으로 여기는지 후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3차례나 중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묘문화개혁이 선대의 유훈이기도 했다. 선친 수당(秀堂) 선생은 전통적인 부잣집 창업주인데도 “나라의 국토가 좁아 장묘문화를 개혁하지 않고는 후대가 감당할 수 없다”면서 화장을 유언했다. 이에 따라 김회장의 형님들의 장례를 모두 화장으로 치뤘다.
이같은 집안 내력 때문에 장묘문화개혁 이사장 자리를 오랫동안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수습사원으로 입사 가업정신 승계

▲ EU상의와 업무협력의정서를 체결하고 있는 대한상의 김상 하 회장.77.9.19

김회장은 지난 2008년 ‘자랑스런 전북인상’을 수상했지만 선대가 전북 고창에서 터를 잡았을 뿐 자신은 종로 3가 단성사 뒤편 봉익동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다.
교동 초등학교 시절의 소년 김상하는 쾌활한 개구쟁이였다. 중학교는 여러 형님들이 다닌 경복(景福)으로 진학하여 농구선수 활동을 했다. 나중에 대한농구협회장을 맡은 것도 이때문이었다. 고등학교는 선친이 남만방적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벌이고 있는 만주로 건너가 여순고등에 진학했다.
일본인 고관들의 자녀가 많이 다닌 여순고등 입시에 조선인 4명 가운데 한명으로 합격통지 전보를 받고 문과의 독일어반을 선택했다. 그러나 일제의 패전으로 삼양사가 현지사업을 그대로 두고 철수하여 김상하 청년은 8.15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서 졸업했다.
1946년 동숭동 시절의 서울대에는 좌우익 학생간 이념대결이 극심했다. 졸업을 앞둔 1949년, 금융계 진출을 준비하고 있을때 가업을 승계해야 한다는 선친의 뜻에 따라 삼양사의 수습사원으로 입사했다.
삼양사가 창업한지는 25년의 연륜이 쌓인 때였으나 아직 삼수사(三水社) 시절의 농업기업에다 삼양염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사장은 고모부인 김용완(金容完), 농장경영은 농대출신 최태환(崔泰煥)씨가 맡고 있었다. 김상하 사원은 경리과장 밑에서 주판 배우기부터 시작했다.
이듬해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1951년에는 도쿄사무소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수출입 업무를 익혔다. 이로부터 제당과 섬유 등으로 근대산업을 일으키는 과정에 실무와 임원으로 가업을 수성한 일생으로 일관하게 됐다.

3세 경영은 진취적인 깃발 세워야

김회장의 일생 경영철학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선대의 가르침을 전승했노라고 회고한다. 이 때문에 삼양그룹이 보수적 이미지로 포장되어 스타 플레이어 없고 고속승진 인사가 없는 장수기업으로 오늘에 이른 것 같다고 해석한다. 지금와서 보면 시대와 세월의 변화에 신속대응 못하여 발전이 정체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받을수 있다고 인식한다.
그렇지만 우직하고 끈기있게 이끌어온 삼양의 기업문화가 장수기업의 저력이자 자부심이며 자신감이라고 여긴다. 자신이 선대의 가르침 따라 사전계획에 철저하고 웬만하면 바꾸지 않고 약속을 지키며 현장을 우대하고 공평무사(公平無私)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온 것도 이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만 창업 3대 시대에는 삼양훈의 기본정신은 지키되 보다 진취(進取)적인 깃발을 세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도전정신을 펼치는 것이 3세대의 역할이라는 지적이다. 구체적으로 현 김윤(金鈗) 회장을 중심으로 김량(金亮), 김원(金沅), 김정(金楨) 등 4촌끼리 늘 화합하며 진취적인 기상을 펼치라는 당부이다.

종횡무진했던 민간경제외교 회고

김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아 장수한 배경은 정수창(鄭壽昌) 회장이 연지동 사옥으로 방문하여 “수당의 자제께서 맡아 주셔야...”라고 권고하여 주변의 뜻을 모아 수락했었다는 이야기다.
1992년 7월 북한 김달현(金達玄) 부총리가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서울을 방문했을때 여의도 63빌딩의 환영 만찬으로 남북 경제협력 대화를 나눴다. 이날 행사에는 전경련 유창순(劉彰順) 회장, 무역협회 박용학(朴龍學) 회장, 경총 이동찬(李東燦) 회장, 중소기업중앙회 유기정(柳琦諪) 회장 등 5대 단체장 외에 농협 한호선(韓灝鮮) 회장, 한국노총 박종근(朴鍾根) 회장 등이 참석하여 대화 분위기가 고조됐다.

▲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상의 초청 만찬 간담회에 참석해 환담하던 중 자신의 좌우명을 휘호로 남겼다.

이때 김상하 회장이 먼저 만찬 축배를 한후 김달현에게 축배를 제의하자 술잔으로 가르키며 “이걸 술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좀더 독한 술은 없습니까”라고 말하여 좌중이 깜짝 놀라면서도 화기애애했다. 이에 안동소주와 문배주를 가져다 권하자 김달현이 문배주를 선택하여 모두가 흠뻑 취할만큼 술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김회장은 이날 자신의 술이 남북경제대화를 이끌어 낼만큼 세다는 실력을 과시했노라고 기록했다.
1992년 9월, 한중 국교수립 이후 대통령의 중국방문시 한중경제협회 회장 자격으로 수행했을때도 김회장이 술 실력으로 중국측 경제인들과 매우 우호적인 대화를 이끌어 낼수 있었노라고 회고한다. 1995년 3월,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국빈으로 방한하여 신라호텔에 투숙했지만 제주도에서도 1박했다. 제주도 만찬에서는 헤드테이블에 장쩌민 주석과 중국측 장관급 3명 외에 한국측에서 동아제약 강신호(姜信浩) 회장, 금호그룹 박성용(朴晟容) 회장 및 사전에 부탁이 있은 한전 이종훈(李宗勳) 사장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 자리에서 김회장이 장쩌민 주석의 외국어 실력을 미리 듣고 독일 의학박사인 강신호 회장과는 독일어 대화, 박성용 회장과는 영어대화, 엔지니어 출신인 이종훈 사장과는 기술관련 대화를 이끌어 내어 장주석이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이때 장주석이 “피아노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길래 연주자를 불러오니 중국 공산당의 전진을 다짐하는 ‘장강(長江)의 노래’를 열창하여 국내 경제인들과 너무나 친숙한 만찬행사가 됐다.
그뒤 1996년 김회장이 경제사절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을때 장주석이 40여 기업인들을 인민 대회장으로 초청하여 한·중 경제협력 분위기를 한껏 조성해 주셨다고 감사한다.
김회장은 호주가로서 삼양그룹 기업문화 속에 술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회고록에 담았다. 선대로부터 술에 관해 관대하여 웬만하면 상하 구분없이 술잔을 나누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김회장이 각종 위원회와 친교행사 때마다 단골 축배사, 건배사의 주역을 맡은 것도 이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대외활동을 접고 그룹회장으로 한발 물러나 3세들이 경영하는 요즘에는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끊은 모습이 너무나 아쉽게 여겨진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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