嚴親 아래 ‘자유분방 아들’ 사이 갈등

삼성家 황태자 李孟熙씨
20년전 ‘묻어둔 이야기’
嚴親 아래 ‘자유분방 아들’ 사이 갈등
동생과 불화, 아들 중병 때 객지 별세

▲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빈소.

최고 재벌가(家)의 불운 이야기를 언론이 ‘비운의 황태자’라고 불렀다. 이맹희(李孟熙) CJ그룹 명예회장이 삼성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후계자 선정에서 밀려나 야인(野人)생활로 일관했으니 비운이었다. 그러나 고인의 여든넷 일생은 화려한 삶과 자유분방 성격 그대로 누리고 향유하다 불운을 겪은 두 개의 얼굴로 기억될 수 있다.

CJ와 삼성그룹의 중환이 겹친 시기

이맹희 명예회장이 지난 14일 베이징의 어느 병실에서 운명하던 날 CJ그룹과 삼성그룹 모두 우환이 겹쳐 우울했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은 중병으로 재판을 받고 있으면서 광복절 특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회장은 50대의 젊은 나이로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조직거부 반응 후유증에 시달리고 고혈압과 유전병마저 겹쳐 투병 중이니 부친의 임종도 지켜볼 수 없었다.
이 회장은 병보석으로 입원 중인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부친이 운구 되어 오면 휠체어 신세를 지고라도 상주노릇이나 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다.
이맹희 명예의 동생,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도 의식불명의 중병으로 서울삼성병원에서 무기한 투병 중이다. 형제간에 상속재산 분쟁으로 재판을 받기도 했지만 뒤늦게 ‘돈보다도 가족관계 회복’을 선언, 화해를 선언했지만 이제 망자(亡者)와 중환자 사이로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범 삼성가의 우환 중에 장남이 타국에서 쓸쓸히 별세했으므로 분명히 말년의 비운이다. 그렇지만 고인이 삼성의 후계자에서 밀려난 것은 스스로 과복(過福)에 도취되어 선친의 엄격·치밀한 잣대를 벗어나 ‘멋대로’ ‘마음대로’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조선조 양녕대군과도 유사한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얼음같은 절제’ ‘정확·치밀한 거인’ 존경

고인은 1993년 6월, 회상록(回想錄) ‘묻어둔 이야기’ 속에 “나이 60이 넘어 부모형제와의 반목시절을 반성한다”는 고해(告解)의 대목이 있다.
그는 선친 호암(湖巖) 이병철 창업주를 ‘얼음 같은 절제’(節制), ‘정확·치밀한 거인’(巨人)이라 묘사하고 삼성경영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일관이라고 기록했다. 이 같은 선친에 대한 평가에 따르면 자신이 후계에서 밀려난 것이 부친의 꼼꼼·촘촘한 감시망에 걸려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묻어둔 이야기’에 앞서 ‘이맹희의 경제단상’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서는 삼성경영에서 밀려나 20년이 지난 시점까지 경영복귀의 꿈을 버리지 못했음을 밝혔다. 이때 고향 의령(宜寧)에 유기질 비료공장을 세워 농토를 개혁하고 싶다는 의욕으로 1993년 ‘제일비료’를 설립했다. ‘제일비료’란 삼성의 ‘제1주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취지였지만 10여년 고전 끝에 2003년 폐업했으니 독자적인 사업구상은 끝내 실패를 기록했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동양최대의 한국비료 건설에 실패하여 명성에 흠결을 낳고 장남 이맹희 씨가 ‘제일비료’로 재기하려다 실패한 공통점이 있지만 식량증산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던 시절 비료생산은 ‘사업보국’의 사업 종목이었다.

경북중 시절 미래 대통령 등과 교우

‘묻어둔 이야기’ 속에는 고인의 성장시절 자유분방한 성품과 재벌가 장남으로 거침없이 활동해 온 과정이 솔직하게 기술되어 있다.
청소년 시절 대구 삼성상회(三星商會) 앞 개천 건너 빈민촌에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형제들이 ‘개천 너머 아이들’로 활달하게 살고 있어 종종 어울렸다. 당시 ‘개천 너머 사람들’은 이병철 사장이 경영하는 국수공장에 품을 팔러 다녔다고 한다.
이맹희 씨가 경북중학에 입학했을 때 정호용, 김윤환, 김복동, 유수호, 김상조 등 미래의 국가 인재들과 함께 공부했다. 노태우 학생은 4학년 때 대구공고에서 전학 와서 함께 다녔다. 당시 공부는 정호용이 가장 잘 했고 다른 친구들도 다 잘했지만 자신은 싸움판에 따라 다니느라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고 실토했다. 또 대구중학에 다닌 윤필용도 두 살 위이지만 의기투합으로 자주 어울렸다. 이 때문에 윤필용 보안사령관 시절에도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었다.
8.15 해방공간 당시 대구시는 남로당 폭동 이후 이념갈등이 극심했다. 경북중학에도 남로당과 서북청년단이 조직되고 학련 조직도 들어왔다. 이맹희 씨는 학련에 가입하여 종종 몽둥이를 들고 나선 행동에 참여했다.
경북중학 시절 이맹희 씨는 이미 재벌 장남의 지위로 두각을 나타내어 미래의 대통령, 유명 정치인, 장군, 언론인 등과 어울려 친교를 두텁게 쌓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뒷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 이야기가 많지만 중앙일보 부사장이 되어 친구사이인 조선일보 김윤환 기자, 동아일보 권오기 기자를 좋은 조건으로 불렀지만 끝내 사양했다. 김윤환 기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집권당 거물 정치인이 되고 권오기 기자는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으니 각자 자신의 신분에서 최고의 명예를 누린 것이다.

▲ 왼쪽부터)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 범 삼성가 인사들이 잇따라 장례식장을 찾았다.

인민군 치하 이병철가의 도피생활

이병철 회장의 대구사업은 일제하의 삼성상회로부터 돈을 끌어 모아 조선양조장(탁주)과 동인양조장(청주)을 인수함으로써 계열회사를 거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 말기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인근 왜관지역에 논밭을 장만하고 과수원을 인수하여 농장으로 피신했다가 해방 후 이를 사업재건의 밑천으로 삼았다.
1948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종로 YMCA 부근 명보빌딩에 삼성물산공사(三星物産公司)를 설립했으니 오늘의 통합 뉴 삼성물산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삼성물산은 동향 출신인 조홍제(趙洪濟) 씨와 동업 형식으로 홍콩과 마카오 무역으로 번창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6.25로 수입물자를 다 잃고 말았다. 당시 이병철 사장은 전용차로 신형 시보레를 구입하여 중학생이던 이맹희 씨가 운전면허를 취득하여 몰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6.25 때 피난을 못가 혜화동 한옥 등에 숨어 지낼 때 시보레 승용차는 남로당 두목 박헌영(朴憲永)과 인민군 중장이 타고 다녔다는 소문을 들었다.
적치(敵治) 피난생활 중 이 회장의 운전기사 위대식 씨가 인천에 있는 삼성물산 창고에서 수입물품을 꺼내와 암거래상에 판 달러화를 갖다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위 씨는 자전거를 타고 인천으로 가서 인민군에게 뇌물을 주고 물자를 끄집어 낼 수 있었다니 용감하고 신기한 노릇이었다. 이 공로로 위대식 씨는 오랫동안 이 회장 전담기사로 이사대우까지 받았다고 기록했다.
이병철 회장 일가는 1.4후퇴 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 다시 ‘삼성물산’을 재창업했다. 이때도 조홍제 씨와 합작하고 김생기(金生基) 씨를 임원으로 초빙했다. 그 뒤 조홍제 부사장은 삼성을 떠나 효성물산(曉星物産)을 창업하고 김생기 씨는 영진약품을 경영, 제약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6.25때 병역기피 ‘부끄러운 인생’ 고백

6.25 전쟁 때 이맹희 씨는 20대 청년으로 군 입대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경북중 동기들도 모두 입대했다. 그러나 그는 병역의무를 기피코자 누나 이인희 씨 시댁이 있는 마산으로 달려가 밀항선을 흥정, 대마도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다시 일본 세계일보 기자증을 빌려 도쿄로 상륙하여 동경 농업대학에 입학했으니 온통 불법, 편법 투성이였다.
삼성 이병철 회장 장남이란 위세를 앞세워 돈으로 매수하고 주일 한국공관으로부터 보증, 편의제공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로부터 1년 뒤 삼성가 둘째인 이창희(李昌熙)와 효성가 장남 조석래(趙錫來)가 이승만 정부의 최초 합법적 유학으로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이맹희 씨는 동생과 조석래 등과 만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노는데 눈이 팔려 공부는 건성건성했고 동생 이창희는 열심히 공부하여 일본의 명문가 규수를 만나 부모님 허락 없이 제국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맹희 씨는 동경농업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미시건 주립대로 진학했다가 부친의 귀국령을 받고 돌아와 결혼했다. 처가는 선대끼리 20년 전에 약속한 손영기 전 경기지사 따님으로 이대 교육과를 나온 손복남 씨로 지금의 CJ그룹 고문이다. 이맹희 씨는 결혼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공업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안국화재 근무시절 5.16을 맞았다. 이맹희 씨 여동생 이숙희 씨는 미국 유학시절, 친구사이인 LG 구자학(具滋學)과 결혼하여 삼성과 LG양가가 사돈간이 됐다.

5.16과 이병철 부자와 한비사건

5.16 직후 부정축재자 단죄 조치로 삼성물산은 조홍제 부사장이 많은 기업인들과 함께 마포 형무소에 수감되고 이병철 사장은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혁명군 측에서 여러 채널을 통해 귀국을 종용하자 이병철 회장이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부정축재 재산 국고반환을 약속하고 귀국했다.
이 사장은 귀국 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면담 후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 초대 회장을 맡아 국가 기간산업 건설에 전 경제인들이 동참토록 결의하고 삼성은 한국비료공장 건설을 맡았다. 그러나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이병철 사장과 박정희 정권과는 갈등이 극심했다.
이 사건으로 이병철 사장을 대신하여 차남 이창희 상무가 6개월간 수감생활을 겪었다. 이로부터 이병철 사장은 회장 직함으로 평생 결재 도장을 찍지 않고 군림, 통치했으며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 간의 갈등과 반목도 심해졌다. 또 이병철 회장은 공화당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이맹희 부회장에게 그룹경영을 맡긴 1967년 총선에서 공화당 후보 5인의 낙선운동을 지시하여 중앙일보 조직과 돈봉투를 동원하여 4명은 낙선에 성공했지만 평소 ‘잘 아는 사이’인 이만섭 후보는 당선되어 국회발언에서 밀수왕 이병철 규탄발언이 쏟아져 나왔었다.

제정신 아닌 시절의 돌출도 고백

대구 삼성상회 시절 ‘개천 너머 아이들’ 가운데 전두환이 중령으로 승진, 청와대 근무시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이맹희 삼성 부사장한테 “전 중령한테 도움을 많이 주셨느냐”고 물었다. 이때 대수롭지 않게 그가 육사 11기생 동기회장이라 종종 ‘불고기 값’을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그 뒤 박 대통령이 전두환을 불러 “삼성돈 수백만원을 받았느냐”며 호통을 쳤다. 알고 보니 김형욱이 수년동안 ‘불고기 값’을 멋대로 계산하여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보고했던 모양이다.
당시 재벌 아들의 빗나간 행태에 관해 중앙정보부의 도청 감시가 심했다. 김재규 중정부장 시절 이맹희 씨는 20대 간호사와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그녀가 계약결혼 차 미국으로 건너간 후 귀국을 시키고자 고심했다. 중정이 이때 전화를 도청하여 젊은 여인과의 외도를 이병철 회장에게 전해주어 모친과 아내에까지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이를 ‘부끄러운 사실’로 고백한 것이다.
이맹희 씨는 한국비료 사건 이후 7년간 사실상 삼성그룹 후계자로서 활동하다가 동생 이건희에게 후계구도가 넘어가 야인생활로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 이병철 회장의 ‘일본여인’ 구라다(倉田)관련 발언으로 난생 처음 부친으로부터 손찌검을 당했다. 당시 이 회장은 폐암 선고 후 숨겨 놓은 ‘바깥자식’의 호적 입적을 추진했다.
이때 바깥자식 아들 이태휘와 딸 이혜자가 호적에 등재됐지만 끝내 재산 상속에서는 빠졌다고 이맹희 씨는 기록했다.
또 부끄러운 집안일의 하나로 동생 이창희 씨의 ‘모반사건’을 간단히 설명했다.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창희 씨가 아버지 이 회장을 경제계에서 추방시켜 달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한 사건이다. 재산 100만 달러의 해외 밀반출, 현충사 조경사업의 비용 부풀리기 생색,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탈세혐의 등 깜짝 놀랄 내용을 담았다.
이때 박 대통령은 재산 100만 달러 해외밀반출 혐의만 조사 후 엄중처벌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 회장은 둘째 아들을 미국으로 추방했다. 이창희 씨는 그로부터 6년간 미국에 머물다가 1977년 귀국하여 새한미디어그룹을 설립, 독자경영하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아들 이재현 투병중 타향서 별세 불운

삼성그룹 황태자 지위에서 밀려난 이맹희 씨는 창업주 비서실장 소병해(蘇秉海) 씨가 어느 날 ‘이맹희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듣고 “아버님이 날 버렸구나”라고 깨우쳤다. 그로부터 전국을 도피 유람하고 사냥과 골프에다 해외도 자주 들락거렸다. 그러나 부친의 감시망은 늘 가까이 추적하고 따라다녔다.
부산 해운대 별장시절에는 월 생활비에 낭비가 많다는 보고서가 전달되어 곤혹을 겪기도 했다. 부친 이 회장이 끝까지 장남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않았던 것이 이 때문이었다.
이맹희 씨는 부친이 별세하기 두 달 전에야 한남동으로 문병하여 ‘아부지’라고 부르며 큰 절로 사죄했다. 이때 15년 만에 모처럼 부친의 따뜻한 미소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 회장이 별세한 후 모처럼 이맹희, 이창희, 이건희 3형제가 한 자리에 모여 상주 노릇하는 모습을 언론에 보여주었다.

▲ 고인의 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

그 뒤 이맹희 씨는 장남 이재현 회장이 일궈낸 CJ그룹 명예회장으로 말년을 소일하다 베이징 병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묻어둔 이야기’에는 장남 이재현이 고대 법대를 졸업하면서 ‘아무개의 맏손자’(이병철 회장 손자)라는 지칭이 듣기 싫다면서 삼성그룹 입사를 거부하고 외국계 은행에 공채 입사한 사실을 소개했다.
이재현 씨는 자습으로 영어와 경영학을 익혀 단 2명을 선발하는 외국계 은행에 합격, 근무하고 있다가 할아버지(이병철)의 호통으로 제일제당에 입사하여 뒷날 계열분리로 오늘의 CJ그룹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맹희 씨는 자신의 아들이 이병철 회장의 맏손자라는 지칭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애비로서 가슴 아픈 일’이라고 기록했지만 막상 임종 시에는 그 아들이 중병과 사투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타계해야만 했으니 삼성가 황태자의 비운이자 가문의 불운이 아니냐고 보는 것이다.
경제기자로서 고인의 활달한 생전 모습을 회상하며 명복을 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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