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명 금융인대회 소집에서

[경제개발시대 EPB 취재기⑤]

張基榮(장기영) 불도저 부총리
3000명 금융인대회 소집
3시간 설명·훈계·독려
일본언론, “부총리가 장관을 국장부리듯…”


글/崔禹錫 (최우석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주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

▲ 장기영 경제부총리

1965년 9월 금리현실화를 할 땐 대출금리보다 예금금리를 높게 하는 역금리(逆金利) 체제를 밀어붙였다. 원래 금리 작업은 재무부와 한은에서 하는 것이지만 장 부총리는 경제팀장으로서 양쪽 실무자들을 데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두지휘했다. 마침 홍승희(洪升憙) 재무장관은 해외출장 중이었다. 역금리 체제에 대해 반대가 있자 지금 급한 것은 방대한 사(私)금융 시장을 공(公)금융으로 흡수하는 것이라며 이럴 땐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높은 이자맛 알게 해야 은행 찾게 돼

높은 이자 맛을 알게 해야 사람들이 은행으로 몰려든다는 것이다. 역금리로 인한 은행수지 악화는 정부에서 채워주면 될 것이고 그것은 공금융 정상화를 위한 코스트로 생각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장 부총리는 실무진들은 물론 박 대통령과 여당 당직자를 설득하여 사상 초유의 역금리 체제를 밀어붙였다. 이 작업을 할 땐 실무책임자인 재무부 김용환 이재과장이 매일 불려왔다. 그리고는 밤마다 은행장 회의를 열어 금융동향을 챙겼다. 금리현실화의 승패는 은행예금이 얼마나 늘어났느냐에 달렸다며 일일 계수를 체크하면서 예금을 독려했다. 예금이 매일 늘어나는 것에 좋아하면서 신문에서도 많이 써달라고 요청했다.
확실히 예금실적은 눈에 띄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때까진 은행이 금리가 낮고 제 구실을 못해 은행예금 대신 계(契)를 이용하거나 사채(私債)를 주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공금리가 대폭 높아지자 돈이 은행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정부의 강력한 채찍질도 있고 하여 1965년엔 은행예금이 배나 늘었다. 이 추세는 1966년에도 계속됐다. 이때를 전후하여 은행 간에 치열한 예금전쟁이 벌어지고 예금실적이 바로 은행원의 평가기준이 됐다. 신문에선 예금이 늘었다고 처음 몇 번 쓰다가 뜸해졌는데 장 부총리는 산하의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 기자를 불러 매일 예금증가액을 기사로 쓰라고 지시했다. 그 자료는 매일 밤 이재과장이 가져왔다. “이건 말이야 독자한테 편지를 쓰는 거야. 독자들이 예금이 얼마나 늘었는지 얼마나 궁금하겠어” 했다. 기자로선 궁금하지도 않고 별 재미없는 기사였다.

금융인대회 3시간 동안 설명, 독려, 훈계

금리인상이 되고 약 보름 뒤인 10월 17일 장 부총리는 당시 서울시민회관에 전국금융기관의 책임자급 3천여 명을 모아 금융인대회를 열었다. 금리인상의 이유를 설명하고 업무독려를 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대회는 완전히 장 부총리의 독무대였다. 약 3시간 반 동안 혼자서 설명하고 설득하고 훈계하고 독려했다. 연설 내용도 기상천외하고 파격적이었다. 장 부총리는 공식 연설문도 딱딱한 관청식 문장을 쓰지 않았다. 비유가 많은 감성적 문장을 썼다. 역사에 남을 명연설을 만든다고 종래 무미건조하고 딱딱하던 예산안 제안 설명서도 그런 식으로 만들었다. 장 부총리 연설문엔 신문사 논설위원이나 명문가(名文家)가 많이 동원되었다. 장 부총리는 금융인대회에서 금리인상을 한 이유는 정치적으로는 금융의 이권화를 막아 사회정의를 이룩하고 경제적으로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내자동원을 기하며 사회정책적으로는 고리채를 없애 공금융으로 흡수하는 것이라 했다. 금리현실화는 마마 같은 것으로서 한국경제가 성인이 되기 위해선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진통이라고 말했다. 1964년에 단행한 환율현실화는 홍역 같은 것으로서 이런 현실화 작업을 통해 한국경제가 정상적으로 클 수 있다고 말했다. 금리현실화를 했으니 금융인 여러분은 낚시 하듯 연날리기 하듯 예금을 끌어 모으고 그에 따라 대출을 늘려 공금융 시장을 넓혀가자고 호소했다. 비유가 기발하고 재미있긴 했지만 워낙 혼자 떠드는 독무대라 나중엔 조는 사람이 많았다. 이 모험적인 금리현실화는 사금융을 줄이고 공금융을 넓히는 계기가 됐고 그 후의 저축증강운동을 통해 경제개발을 위한 내자조달에 큰 몫을 했다.
미국 원조당국에서도 1964년 환율현실화에 뒤이은 금리현실화 작업을 지지하고 한국 정부의 정책수행 능력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세계은행 등은 줄기차게 환율과 금리의 현실화를 요구해왔다. 특히 환율에 대해서 그랬다. 그러나 원조자금을 받아쓰고 수출보다 수입이 압도적으로 많은 한국으로선 환율인상을 기피해왔다. 자유당 때의 이승만 대통령도 저환율을 고집했다. 당시 수출은 많지 않았고 미군이 쓰는 전쟁비용은 한국은행에서 일단 갖다 쓰고 나중에 달러로 갚았는데 저환율일수록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 UN군 대상금(貸上金)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어 한국은행에 앞뒤로 호위를 붙인 미군 트럭이 달러 뭉치를 갖고 와서 원화로 바꾸어 사이렌을 울리며 가져가곤 했다. 장 부총리 이후로도 환율현실화는 항상 늦었는데 그래서 달러 환율은 공정가는 낮고 시장가는 높은 이중가격이 형성됐다. 1960년대엔 한국은행 앞 골목과 명동에 암달러상이 무척 많았다.
금리도 마찬가지였다. 장 부총리가 금리를 대폭 올렸지만 기업부담을 이유로 점차 내렸고 그 후로 쭉 공금리는 낮고 시장금리는 높았다. 금리의 이중구조는 사채시장의 번창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누적되어 1972년 8.3 사채동결 같은 충격조처가 나온 것이다. 장 부총리는 우격다짐으로만 금리를 현실화한 것이 아니다. 금융인 출신인 장 부총리는 금융의 속사정도 잘 알아 예금 최고금리가 연 30%, 대출이 26%라고 해도 예금 중에 금리가 싼 요구불(要求拂) 예금이 많아 평균 예금코스트는 11%정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대출금리는 평균 23%정도이기 때문에 은행이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높은 금리의 정기예금이나 적금을 많이 유치해야 하기 때문에 은행수지 보전을 위해 은행의 지불준비금에 대해 연 3.5%의 이자를 주도록 했다. 무리는 했지만 앞뒤는 맞게 일을 풀어간 것이다. 장 부총리의 뛰어난 능력이다. 장 부총리는 은행은 밑지지도 남지도 않는 장사를 하는 것이 국민경제를 위해 가장 공헌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금융인대회는 장 부총리가 그만둘 때까지 계속됐다.

이낙선 불도저청장, 세수 700억 달성

금리인상으로 내자조달의 한 축을 마련한 경제팀은 조세수입의 증대에 박차를 가 했다. 1966년 정부는 종래 재무부 사세국(司稅局)에서 담당하던 내국세업무를 국세청으로 독립시켜 세금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초대 국세청장은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청와대에서 세무행정 특별감사업무를 담당했던 이낙선(李洛善)씨가 맡았다. 이 청장은 강직하고 충성스러우며 일을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박 대통령은 세금이 부정 때문에 많이 새고 있다고 생각하고 강직한 사람이 가면 세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청장은 취임하자마자 유능한 참모진을 구성하곤 세금걷기에 일로매진했다.
우선 관용차(검은 색 포드 세단) 번호를 700으로 바꿨다. 세수 7백억 원을 달성하겠다는 결의의 표시였다. 1965년의 세수 실적은 4백 21억 원. 당시는 확실한 자료에 의한 과학적인 과세가 아니라 세무원의 재량에 의한 임의과세가 많았기 때문에 세정강화는 바로 세금증수로 연결되었다. 이 청장은 국세청 직원들의 교육부터 강화한 다음 어떤 압력에도 굽히지 말고 세금을 거두라고 지시했다. 세금을 많이 거두는데 따른 문제는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대통령이 빽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7백억 세수를 상징하는 007가방을 사서 나누어 주었다. 이 청장의 채찍질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국세청 직원들은 007가방을 들고 가차 없는 세금걷기에 나섰다. 1966년 예산안에 당초 세수목표가 6백 60억 원이었으나 이 청장의 분투 끝에 7백억 원을 넘어섰다. 1965년보다 무려 66%가 늘어난 것이다. 세금을 계획보다 40억 원이나 더 거두게 되니 장 부총리가 기자회견 석상에서 40억 원만큼 재정안정계획상의 민간대출을 늘릴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갑자기 세금이 무거워지니 부작용도 생기고 조세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징세가 강화되면 부패가 생기기 마련이다. 정보를 입수한 검찰에서 몇몇 세무서를 덮쳐 부정세무원들을 잡아갔다. 그러자 다른 세무원들도 일제히 도망가 세무서 기능이 마비될 지경이 됐다. 당시는 세무서에서 부정으로 걷은 돈을 독식하지 않고 적당히 분배하는 게 관행이었다. 이 청장은 박 대통령을 독대해 고충을 호소하고 세무공무원의 부정은 자기 책임 아래 척결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정부패에 대해선 단호한 박 대통령이었지만 경제개발을 위한 세수확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심사숙고한 박 대통령은 앞으로 수사기관에서 세무공무원을 수사할 때는 반드시 이 국세청장과 협의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용기백배한 이 청장은 도망간 세무원들을 불러들이면서 앞으로 여러분이 살길은 세금을 잘 걷는 것이라며 더욱 맹렬히 세금징수에 매진했다.
이 청장은 3년8개월 동안 막강한 국세청장으로 군림하면서 초창기 국세청의 기틀을 확실히 잡았다. 이 청장의 추진력에 감탄한 박 대통령은 이 청장을 국세청장에서 바로 상공장관으로 발탁하여 막 뻗어나가기 시작한 수출신장에 채찍질을 휘두르게 했다. 박 대통령은 이 청장 후임도 해병대 출신의 오정근(吳定根)씨를 기용하여 3년 5개월이나 재임케 했고 그 다음도 역시 군 출신의 고재일(高在一)씨를 5년 9개월이나 쓰고는 건설장관으로 발탁했다. 이렇듯 국세청장은 박 대통령이 직접 골라 썼기 때문에 역대 부총리나 재무장관도 간여하지 못했다. 장기영 부총리도 이낙선 청장의 추진력에 대해선 한목 놓아주는 분위기였다.

외자도입 다다익선론…일본자본 유치 노력

은행 저축과 세금징수라는 내자조달의 두 수레바퀴를 정비한 장 부총리는 외자유치에 전력을 경주한다. 종래 외자유치의 주종이었던 미국원조는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민간 베이스의 상업차관과 외국인 투자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5.16 후 외자도입촉진법으로 외자도입에 애를 썼으나 실적이 부진했다. 이·불(伊·佛) 어업차관의 악몽도 있었다. 5.16 후 어업을 현대화 한다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무려 1억 달러의 어업차관 도입협정을 맺었으나 무참하게 실패하고만 쓴 경험이 있다. 의욕만 앞세워 기술적경제적 검토도 없이 최고회의에서 정치적으로 덜컥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뒷수습을 맡은 기획원이 무척 고생을 했다. 1억 달러의 차관을 4천만 달러로 줄이고 이 사업을 맡아하기 위해 수산개발공사를 설립했다. 당초 경제성 없이 시작한 사업이라 끝내 좋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처음엔 외자도입에 대해 국민정서상의 거부감이 있었다. 외자를 많이 들여오면 우리경제가 외국에 예속된다는 것이다. 외자에 대해선 매판자본(買辦資本)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심지어 64년 한일협정 반대 학생데모가 벌어졌을 때 서울 시청 앞에 있는 조그만 재일교포의 건물 앞에 몰려가 “매판자본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장 부총리는 이런 풍조에 정면으로 맞서 “빚도 자산”임을 강조하면서 외자도입의 다다익선(多多益善)론을 주장했다. 빚을 겁낼 것이 아니라 잘 쓰면 자산이 되니 적극적으로 외자를 도입하여 경제개발을 하자는 논리였다. 당장 가까운 일본에서 자본과 기술을 들여오자 했다. 청구권 자금으로 공적자금은 들여오게 되어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민간자금과 재일교포의 재산을 유치하자는 것이다. 장 부총리에겐 미국이나 유럽보다 일본이 익숙했다. 아는 사람도 많았다. 일본자본 유치를 위해선 먼저 일본정부를 설득해야 하고 또 외자를 받기 위한 국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보았다. 외자도입법을 고치고 차관에 대한 정부지불 보증제도도 만들었다.
일본과의 협의를 위해 한일경제각료간담회가 1966년 8월 워커힐호텔에서 사흘 동안 열렸다. 한국은 장 부총리가 수석대표가 되고 재무·상공·농림장관 등이 참석했다. 일본 측은 후지야마(藤山愛一郞) 외상을 수석으로 후꾸다(福田赴夫) 대장상(후에 수상)등 경제 각료들이 참석했다. 한일각료회담에 참석한 일본 경제각료 중 나중 수상이 된 사람이 많다. 각료회담의 고정 멤버인 외상(외무장관), 대장상(재무장관), 통산상(상공장관) 은 일본 여당의 실력자들이 차지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후쿠다를 비롯해 다나카(田中角榮), 미끼(三木武夫), 오히라(大平正芳), 미야자와(宮澤喜一), 나카소네(中曾根康弘)씨 등은 각료회담에서 자주 보았는데 후에 모두 수상이 되었다. 일본각료들이 대거 온 것은 그 때가 처음이라 큰 관심을 모았다. 간담회 후 리셉션에서 만난 일본각료들은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막 시동한 한국의 개발상에 대해 호기심을 나타냈다. 일본각료들은 모두 정치인들이라 실무형의 한국 장관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각료간담회라 하지만 장 부총리의 독무대였다. 일본을 잘 아는데다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주로 차관을 늘려달라는 요청을 했고 곁들여 무역역조 시정과 한국산 김의 수입쿼터 증액 등이 이야기 되었다. 한국 측의 요청에 대해 일본은 즉답을 피하고 내년에 다시 정식회의를 열어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하여 1967년부터 한일각료회담이 동경과 서울에서 번갈아 열리게 됐다.

철야회담 끝에 얻은 2억 달러 차관

1967년 동경에서 열린 제1회 한일각료회담은 장 부총리의 전성기라 할만하다. 장 부총리는 동경에 기획원 기자단과 같이 갔는데 기자들의 대거 해외 수행취재는 처음이었다. 여권 내는 일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신원조회가 엄격하여 본적지부터 해방 후 모든 거주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정보부에 넘어가면 친인척에 대한 대공혐의를 추적 조사했다. 본인도 모르는 친인척의 부역혐의로 여권이 안 나오는 케이스가 많았다. 남자들은 병역관계로 병무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병종(丙種)으로 병역면제를 받은 사람은 군병원의 재검사가 필요하기도 했다. 기자들의 여권발급을 위해 기획원이 특별지원 하는데도 한 달 이상 분주하게 뛰어야 했다. 대부분 첫 외유였는데 동경 하네다공항에 내리니 그 번화한 모습에 모두들 감탄했다. 장 부총리의 공항 도착 성명부터 요란했고 그 다음날 열린 개회식은 더 유난스러웠다. 개회사를 아침까지 뜯어 고쳐 회의 직전에야 자료가 배포되었다. 외무부의 최광수(崔光洙) 과장(후에 외무장관)의 통역으로 개회사를 읽었는데 한일 간의 인적·물적 교류 확대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므로 양국 정부가 할 일은 이 흐름이 잘되게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차관 등 민간경협의 확대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회의는 일본 영빈관에서 열렸는데 마무리를 해야 하는 이틀째 회의는 밤이 깊어도 끝날 기미가 없었다. 나중 알고 보니 담당장관끼리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안 나니 장 부총리가 일본장관 5명과 직접 담판을 했다. 역시 핵심은 상업차관 확대였다. 한일협정에서 약속한 3억 달러 플러스알파 외에 추가로 2억 달러를 더 달라는 것이었다. 장 부총리의 논리는 2차 5개년계획을 3년 반 만에 조기 달성하려는 목표 아래 추진하고 있고 한국의 대일무역적자가 1년에 2억 달러를 넘으니 그 절반인 1억 달러씩을 2년간 추가로 제공해달라는 것이다.
한국은 장 부총리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지만 일본은 장관들이 각기 결정해야 했다. 장 부총리는 일본 각 장관들을 따로 만나 담판을 지어 나갔다. 일본은 장관 마음대로도 할 수 없었다. 장관이 동의를 하고 싶어도 담당국장이 안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실제 결정권은 국장들이 쥐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한국 관리들이 “일본은 정말 이상하더라. 장관이 국장 눈치를 보더라”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장 부총리는 이들을 모두 납득시키느라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그 다음날 새벽 3시 충혈된 눈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난 장 부총리는 “일본이 5개년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상업차관 3억 달러 플러스알파 외에 2억 달러를 추가로 지원키로 합의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이 차관을 얻기 위해 장 부총리는 조세협정이나 주한 일본상사 과세문제 같은 것은 깨끗이 양보했다. 관계장관 동의 같은 절차를 거의 무시했다. 차관을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것은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언론, “장 부총리가 장관을 국장부리듯…”

그 다음날 장 부총리 방에 갔을 때 서봉균(徐奉均) 재무장관이 같이 있었는데 그 표정이 무연했다. 서 장관으로선 장 부총리의 독주가 불만스러웠지만 드러내놓고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낙선 국세청장은 직선적인 성격이라 불만스런 표정으로 "이런 회의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별 역할도 없는데다 처우가 말이 아니라고 했다. 카운터파트인 일본 국세청장의 격이 차관보다 낮아 자기도 그런 대우밖에 못 받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막강한 이 청장이 화를 낼 만도 했다. 그 다음날 일본신문에서 "에너지 넘치는 한국의 장 부총리가 나이 많은 일본각료들을 상대로 철야협상을 벌여 양보를 받아냈다.”, “장 부총리가 한국의 장관들을 국장 부리듯 했다” 등의 기사가 나왔다.
밤을 새운 장 부총리는 오전 중에 사토(佐藤榮作) 수상 예방과 전체회의를 서둘러 끝내고 점심 땐 예정대로 일본 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양윤세(梁潤世) 과장의 통역으로 진행된 회견은 장 부총리의 독무대였는데 “한국에선 경제개발이 시동되어 한국의 색깔이 달라지고 있다. 국토의 색깔이 달라지고 옷 색깔이 다채로워지고 무엇보다 국민의 눈빛이 밝게 달라지고 있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장 부총리의 배려로 기획원 기자들은 산업시찰과 일본 구경을 했다. 가와사키(川崎) 제철, 스미토모(住友) 석유화학공장, IHI중공업, 롯데제과 공장, 오사카의 사카모토(坂本) 방적공장 등을 보고 그 규모와 현대적 시설에 많이 놀랐다. 가와사키제철소는 전후 최초로 건설한 민간종합제철로 한국이 그런 공장을 꿈꾸고 있었다. 안내자는 “임해공업단지에서 최신공법으로 지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싼 원가로 철강을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원료인 철광과 석탄이 안 나는데 어떻게 싼값으로 철을 생산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세계 각국에서 가장 싼 원료를 골라서 들여올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IHI중공업에선 자기들이 만든 30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의 건조과정을 기록영화로 보여 주었는데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식사자리에서 조선소장이 일본의 조선기술은 세계최고라고 자랑했다. 그래도 2차 대전 때 미국의 해군력에 지지 않았느냐고 짓궂게 물었더니 자기들은 물량공세에 진 것이지 절대 기술에선 지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당시 경제신흥국인 일본의 자신감과 의욕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롯데의 최신식 제과 공정과 사카모토의 방직공장도 대단했는데 이들은 후에 재일교포 재산반입 케이스로 한국에 진출했다. 거기에 백화점의 갖가지 상품과 풍부한 전자제품엔 부러움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한국이 아직 후진국이로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땐 해외여행이 어려워 온 식구가 김포공항에 마중 나올 때였는데 모두들 카메라와 TV 수상기, 녹음기를 한 대씩 사들고 왔다. 또 회사 선물용으로 필기용 볼펜과 일본 담배를 사들고 짐을 잔뜩 안은 채 공항에 내렸다. 장 부총리는 다음 회견 때 “여러분 일본 가보니 소감이 어때요? 우리나라도 빨리 경제개발을 해서 일본을 따라가야지요. 그런 방향으로 기사를 써주세요.” 하는 말을 했다.

한비 밀수사건과 김두한의원 오물투석사건

장 부총리는 어떤 돈이든 끌어다가 공장을 건설하는데 전력을 경주했다. 그 땐 농사에 쓸 비료부족이 심각했다. 원조자금을 비료수입에 많이 쓰고 비료수입액만도 1년에 1억 달러가 넘었다. 그래서 미국 상업자본을 들여다가 울산과 진해에 비료공장짓는 것을 추진했다. 미국 투자자들은 이익보장을 요구했다. 그것은 비싼 비료 값과 농민부담을 의미했다. 일부에선 신중론도 있었으나 장 부총리는 비료공장 건설이 시급하다며 이익보장을 수용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것이 울산의 3비(肥)와 진해의 4비(肥)다. 3, 4비는 비슷할 때 지은 5비(한국비료)보다 원가가 높아 두고두고 부담이 되었다.
삼성(三星)그룹에서 한비(韓肥)를 지을 때 화제가 많았다. 우선 연산 뇨소(尿素) 33만 톤이라는 세계 최대 규모가 놀라웠고 건설 도중에 파란이 많았다. 기획원에 무려 4천 3백만 달러의 차관도입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큰 공장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당시엔 웬만한 공장도 2백만~3백만 달러면 되었다. 기획원 분위기는 한비는 비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책사업이므로 지원해야 하지만 너무 규모가 커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원가가 싸게 먹혀 3, 4비의 비싼 원가를 물 타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했다.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되던 한비 건설에 사고가 난 것은 1966년 추석 무렵이었다. 소위 OTSA 밀수사건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했다. 기획원 기자실은 외자관리 차원에서 한비사건을 다루었다. “한비를 국가에 헌납 하겠다”는 이병철 삼성 회장의 발표에 대해 코멘트를 구하자 장 부총리는 “지금 뭘 바쳐. 다 지어놓고 바쳐야지” 하는 말을 했다. 한비사건을 다루던 국회에서 김두환 의원으로부터 오물세례를 받고 기획원에 돌아온 장 부총리는 장관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기자들을 만나 “상식이 아쉽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리곤 자세한 뜻은 다음에 말하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한참 뒤 기자회견 때 “김 의원하고 가까우신 걸로 아는데 미리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했더니 “나중 만났더니 나를 찾았으나 못 만나 그래도 조심해서 뿌렸다더군”하면서 웃었다.
오물사건으로 전 국무위원이 일괄사표를 냈는데 장 부총리는 반려되고 모처럼 호흡이 맞았던 김정렴(金正濂) 재무장관은 물러났다. 그 뒤 한비 헌납과 그 뒤처리를 둘러싸고 장 부총리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병철 회장과의 친분관계도 그렇지만 적극 지원한 한비를 하루빨리 정상 가동시켜야 했으므로 흥분된 여론 속에서 노심초사해야 했다. 한비는 장 부총리 재임 중에 완공되었지만 헌납 문제는 다음 박충훈 (朴忠勳) 부총리 때 매듭되었다.
장 부총리는 일을 벌이기를 좋아했다. 울산의 유공(油公) 공장만으로는 늘어나는 기름수요를 댈 수가 없어 제2정유공장을 지을 때도 실수요자 공모 공고를 냈다. 정유공장이 노다지라는 소문이 있어 럭키, 롯데, 한국화약, 한양(漢陽), 범양(汎洋) 등 내로라하는 큰 기업들이 많이 응모했다. 공공 차관과에서 담당했는데 황병태 과장은 또 열심히 석유공부를 하여 그 때만 해도 무척 생소했던 국제원유 사정과 메이저(국제석유재벌) 등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부총리실에도 재계 거물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요란한 소문과 치열한 경합 끝에 럭키(LG의 전신)에 넘어갔는데 오늘날 여수 호남정유가 바로 그것이다. 럭키와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로서 가까운 서정귀(徐廷貴)씨와의 합작형식이었다. 이 때문에 청와대는 일찍부터 럭키로 결정해 놓았는데 장 부총리가 공모한다고 일을 어렵게 만들어 괘씸죄에 걸렸다는 소문이 나중에 돌았다. 실수요자 발표를 하면서 장 부총리는 경제성이나 코스트 면에서는 인천 등 경인지방이 유리하지만 공업 분산과 호남지방의 공업화를 위해 여수에 짓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나중 인천에 제3정유(경인에너지)를 짓는 포석이 이때 깔린 것이다. 서정귀씨는 호남정유 사장을 맡았는데 박 대통령과의 친분 때문인지 3공 때엔 은근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석유판매업과 민간전력사업에도 간여했고 72년엔 연산 5백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 구상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제차관단을 구성해 7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해서 경남 삼천포(三千浦)에 최신 일관제철공장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워낙 규모가 방대하여 정부당국도 반신반의했는데 서 사장의 저력을 아는지라 정면으로 반대는 못했다. 그러나 모두들 포항제철 완공에 매달릴 때여서 제2제철 구상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계속)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4호 (2015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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