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근면· 절약에 통큰 승부사 일생

다시 읽는 ‘정주영이야기’
이 땅에 태어나서
탄생100주년 맞아 ‘정주영 정신’ 회상
타고난 근면· 절약에 통큰 승부사 일생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鄭周永)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관훈클럽 신영기금(이사장 김창기)이 지난 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정주영과 남북관계’ 세미나를 가졌다. 최근 남북관계가 숨통이 트이면서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한 후 대북사업에 열정을 쏟는 모습이 다시 생각난다.

▲ <사진=현대그룹>

통천읍 아산리 어린시절의 추억

아산 정주영 회장이 ‘살아온 이야기’는 자전적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1998.3솔출판사) 속에 요약 정리되어 있다.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정 회장은 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천성의 근로자로서 말년에는 ‘왕회장’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재벌 회장이기 보다 돈 많은 근로자를 자임하며 일생을 보냈다.
‘이 땅에 태어나서’는 경영은퇴 후 서산농장에 머물고 있을 때 선친에 관한 회고로부터 시작된다. 서산농장은 시속 40km의 자동차로 한 바퀴 도는데 3시간이 소요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정 회장은 이 서산농장을 “한 뼘의 농토라도 아버님 인생에 바치고 싶었던 아들의 때 늦은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고인의 선친께서는 단 한 뼘의 농토가 소원이었고 장남 정주영이 상 농군이 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끝내 가출하여 3천만 평이 넘는 농토를 개간했지만 이미 선친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이때쯤 선친이 생존하여 서산농장을 찾아오시면 1,700여 두의 우사(牛舍)도 돌보고 장남의 효도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회상한 것이다.
정주영의 고향 강원도 통천읍 아산리 산촌에는 감나무 숲이 많았다고 한다. 선친은 가난으로 장가도 못가고 있다가 10살 아래 처녀를 만나 6남2녀의 농군(農軍)들을 출산했다. 모친은 ‘굴러온 복덩이’로 불리면서 길쌈과 농사일로 자녀들을 키웠다.
늘 장독대에 냉수 한 사발 올려놓고 자식 잘 되라고 빌고 큰 바위나 나무 밑에서도 “잘난 아들 주영이를 낳았으니 산신님이 주영에게 돈을 낳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었다. 그렇지만 먹는 입이 많아 늘 밥상머리에서 양식 떨어졌다는 걱정을 듣고 명절 때는 두루마리 하나로 형제들이 나눠 입고 순차적으로 세배(歲拜)를 다녀야만 했다.
맏이 정주영이 먼저 입고 마을 어른들께 세배 끝내고 오면 동생 인영(仁永), 순영(順永) 순으로 그 두루마기를 입고 세배에 나섰다.
경원선(京元線)이 개통되고 부산항과 원산항이 개항되고 고무신이 등장한 개화기였다. 정주영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비롯하여 논어·맹자를 읽고 뒤늦게 송전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월반을 거듭하여 2등으로 졸업했다. 1등 했던 친구는 뒷날 형무소 간수가 됐지만 2등 정주영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총수가 됐다.

자동차 수리업에서 건설업 진출

정주영의 마을 구장댁에는 동아일보가 배달되어 틈틈이 연재소설 ‘마도의 향불’과 ‘흙’을 읽을 수 있었고 청진항과 제철공장 공사장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있다는 기사도 읽었다. 정주영이 마을 친구와 같이 가출을 시작한 것은 이 같은 바깥소식 때문이었다.

▲ <사진=현대그룹>

4번째 가출에서 인천부두 하역노동과 부천에서 머슴살이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 신당동에 쌀가게 경일상회(京一商會)를 열어 정주영 사업이 출발했다. 배화여고, 서울여상 등 단골을 확보하여 쌀가게가 번창한지 2년 만에 일제가 쌀 배급제로 통제를 시작하자 이를 처분하여 논 2천 평을 구입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장가도 갈 수 있었다.
1940년에 다시 상경하여 아현동 고개에 자동차 수리점인 ‘아도서비스’를 개업하여 한창 신용을 얻을 무렵 화재사고로 몽땅 날리고 말았다. 당시 정주영은 사채업자 오윤근에게 3,000원 빚을 지고 있었지만 다시 맨입으로 3,500원을 더 빌려 신설동에 무허가로 자동차 수리공장을 열었다.
이때 동대문경찰서 보안계가 단속을 나오자 일인 곤도 보안계장 집을 새벽마다 한 달이나 찾아가 졸라대자 “대로변에서 보이지 않게 판자로 울타리를 치고 영업하라”며 묵인해 주기로 했다. 이로부터 10일 걸리는 수리업무를 3일 만에 끝내주는 서비스로 신용을 얻어 금방 사채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이 무렵 일제가 전시체제로 놋그릇 공출(供出)을 시작하니 견딜 수 없어 수리공장을 처분했다. 이때 실직자가 된 두 명 동생의 징용이 문제가 됐다. 정주영은 군수용 광산에 취직하면 징용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발상하여 진남포 제련소와 홀동금광 간의 광산운반 하청계약으로 운송사업을 시작했다. 산악지대 비포장 도로를 130km 달려야 하는 험난한 코스였지만 정인영, 정순영 등 두 동생은 징용을 면할 수 있었다.
전쟁말기에 접어들어 세상이 수상해 지자 광산운송사업을 정리하고 정주영 일생동안 모처럼 무직기간을 가졌다. 이때 서울 돈암동 자택에는 무려 20명의 대식구가 살았다. 다시 일을 해보겠다며 1945년 4월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 공업사’ 간판을 내세웠으니 현대자동차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 수리업에는 어느 정도 노하우가 축적되어 호황을 누리고 있었지만 정주영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월말 계산 때 보니 관청의 자동차 수리비는 겨우 30~40만원인데 토목 건설비는 1,000만원 단위로 결제되고 있었다. 이에 즉각 ‘현대토건사’를 설립하여 건설업에 착수했다가 1950년 1월에는 두 회사를 통합하여 오늘의 현대건설로 발족시켰지만 6개월 만에 6.25 전쟁을 만났다.

일본공영을 누른 소양강 ‘사력댐’ 발상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인 동생 정인영(鄭仁永)은 마지막 호외(號外)를 발간한 후 부산으로 피난하여 미군 통역관이 됐다. 이때 공병대 통역관으로 미군병사 숙소나 전쟁공사 발주 소식을 현대건설에 전해줄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사진=현대그룹>

1953년 4월, 현대건설이 무리하게 고령교 복구공사를 수주한 것이 악재가 되고 말았다. 대구에서 거창으로 통하는 고령교 복구는 공비토벌 작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공사였는데 현대가 5,400만원에 계약했지만 충분한 장비도 없이 덤벼 6,500만원의 공사비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이때 빚쟁이에게 너무나 시달려 정주영이 탈진했노라고 고백한다.
그 뒤 1957년 9월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로 현대건설이 재기하여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부고속도로와 중동건설로 오늘의 명문 현대건설을 이룩할 수 있었다.
소양강 댐 공사 때 전천후 토목인 정주영의 ‘사력댐’ 아이디어가 일본공영 구보다(久保田) 회장의 ‘콘크리트댐’을 압도했다. 소양강댐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했기에 일본공영이 설계 용역을 맡아 콘크리트 댐으로 설계하여 시멘트와 철근 등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야 할 처지였다. 더구나 구보다 회장은 수풍댐을 설계하고 건축한 권위자로 후발 현대건설로서는 대적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소양강댐 주변의 모래와 자갈을 이용한 ‘사력댐’으로 건설해야 기술용역에서부터 시멘트와 철근 등을 수입해야 하는 후진국 원조방식을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에 따라 세계의 댐 건설 자료를 끌어 모아 ‘콘크리트댐 대신에 사력댐’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미 정부가 일본공영의 설계 용역에 따라 콘크리트 댐을 승인한 뒤였다. 당시 건설부마저 “니들이 뭘 안다고…”라고 핀잔했고 일본공영은 ‘무식한 소리’라고 비하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세계적으로 100m가 넘는 댐은 모조리 사력댐”이라고 우겼다. 이에 당황한 건설부가 청와대로 올라가 “정주영이 설계 변경을 주장하니 큰일 낼 사람”이라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이 ‘무슨 큰일’이냐고 묻자 건설부가 “사력댐으로 건설했다가 홍수가 나면 난리가…”라고 대답하자 포병사령관 출신의 박 대통령이 반문했다.
“콘크리트댐이 만수(滿水)가 됐을 때 북괴가 포격하면 붕괴되어 난리가 나지만 사력댐은 포격해봐야 ‘펄썩’하고 주저앉아 그만 아닌가.”
이 말로 소양강댐은 공사비를 대폭 절감한 사력댐으로 바뀌었다. 당시 80대 노인인 구보다 회장이 정주영을 찾아와 큰절하며 “우리회사 하시모토 군이 큰 결례를 했다”고 사과했다는 이야기다.

조선 못하겠다는 ‘정주영 상대 말라’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정주영 회장의 역할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장기영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정부 내에서도 고속도로 공사가 불가능하다고 반대했다. 경제과학심의회의 소속 안경모 위원만이 찬성했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 경험을 쌓은 현대건설 정주영도 찬성하는 편이었다.

▲ 1945년 4월 서울 중구 초동에 ‘ 현대자동차 공업사’ 간판을 세운 것이 현대자동차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사진=현대그룹>

박 대통령이 공사비를 추정해 보라고 지시하자 건설부 650억원, 서울시 180억원, 재무부 330억원, 육군 공병감실 490억원, 현대건설 280억원 등 제멋대로였다. 박 대통령이 현대건설안을 기초로 330억원으로 결정, 착공했다. 실제 경부고속도로 공사비는 430억원 가량 소요됐다.
정주영은 대전에서 대구 구간을 2차선으로 계산하여 280억원으로 산정했노라고 해명했다. 결국 서울-부산 간 4차선으로 계산하면 현대건설 안이 적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는 정주영이 아도서비스 공장으로부터 꿈의 사업이었지만 현대중공업의 조선사업은 박 대통령의 꿈의 사업이었다. 박 대통령은 남북대결 상황에서 ‘유사시’에 대비하여 조선산업이 시급하다고 판단했지만 정주영은 고개를 내 저었다. 이에 박 대통령은 김학렬 부총리 등에게 “정주영을 상대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 <사진=현대그룹>

“한번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한다”며 괘씸하게 여겼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972년 3월 현대중공업이 기공식을 갖고 오늘의 세계 최대 조선소가 이룩되어 “나라가 잘 돼야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잘 돼야 나라가 산다”는 ‘정주영정신’이 빛을 낼 수 있었다. 이때 기공식에 참석했던 태완선(太完善) 경제부통리가 귀로에 대구시 만찬석에서 “아무래도 (현대중공업) 될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한마디 했다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호통을 받았다.
현대중공업 공사가 한창이던 1973년 11월 새벽 2시, 비바람 가운데 정주영이 지프를 몰고 구내 시찰 나갔다가 수심 12m에 풍덩 다이빙한 사고가 났다. 작업복 점퍼를 입고 있어 어느 정도 부력이 있었지만 안벽가지 800여 m를 수영하기가 너무 벅찼다. 경비초소를 200m 눈앞에 두고 정주영이 “야”라고 고함을 질렀더니 경비가 “누구요”라고 물었다.
정주영이 “나야”라고 대답했는데도 경비는 “나가 누구요”라고 되물으니 분통지경 아닌가. 한참 뒤에야 “아이고 회장님”이라고 겨우 알아보아 “빨리 밧줄 가져와”라고 하니 다시 “밧줄이 어디 있나요”라고 말한 먹통이었다.
정주영은 이날 천운(天運)으로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영빈관으로 돌아와 대강 옷을 갈아입고 먹통의 경비에게 “앞으로 하고 싶은게 뭐냐”고 물으니 “계속 경비직을 맡겨 주십시오”라고 대꾸하더라는 이야기다.

양복은 처가 갈 때만 입는 것

과연 ‘정주영정신’은 무엇이고 ‘현대정신’은 뭣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까.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경제기자에게 제발 돈만 밝히는 장사꾼이라고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주영이 부자가 아니고 부자 되기를 소망한 것도 아니라”라고 말했다. 또 회장이나 왕회장이라고 하지 말고 돈좀 가진 노동자라고 우겼다.
정 회장은 ‘이 땅에 태어나서’ 책 속에서도 현대는 장사꾼 모임이 아닌 나라발전을 이끈 진취적 건설그룹이라고 적고 ‘가장 큰 기업’이기보다 ‘가장 깨끗한 기업’이라고 자부했다. 정 회장의 근검과 절약정신은 태생적이다. 담배는 연기로 날려 보내는 낭비이기에 피우지 않고 전차 값이 아까워 걸어서 출퇴근 했노라고 밝혔다. 양복은 처가(妻家) 갈 때만 입으니 꼭 한 벌이면 족하다고 했다.
고인은 사업에 필요한 자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용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창업기 때 정 회장은 사채를 빌려 올 때마다 신용을 바탕으로 맨입으로 여러 차례 빌렸다. 정 회장은 학력은 소학교이지만 좋은 책을 찾아 열심히 읽었다. 전광석화식 아이디어 분출도 맨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독서와 현장감각에서 분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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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회장이 말년에 정치에 입문하고 대선에 출마한 것이 오점처럼 지적되지만 나라를 구하고 싶은 충정이었다고 해명한다. 당시 정 회장의 안목으로는 노태우 정부나 YS 정부가 비정상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대선에 실패한 것이 ‘나의 실패라기보다 YS를 선택한 실패’라고 주장한다.
실로 1991년 10월에 발간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가 아산 정주영의 진면목이 아닐까 싶은 소감이다. 오는 11월에는 중국에서 정주영 전기가 출판된다고 한다. ‘이봐, 해봤어?’…‘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라는 말이 너무나 실감나는 표현이라고 믿는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4호 (2015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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