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 기공식 참석중 해임 소식

[경제개발시대 EPB 취재기⑥]

張基榮(장기영) 불도저 부총리
질풍노도 시대의 종막
포항제철 기공식 참석중 해임 소식


글/崔禹錫 (최우석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주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

베트남 파병과 특수 협상

1965년엔 베트남 문제로 기획원이 바빴다. 베트남 파병은 1965년에 시작되었는데 그에

▲ 장기영 경제부총리

따른 미국과의 경제적 보상 교섭을 기획원에서 맡았기 때문이다. 외자총괄과에 가보면 늘 부산했다. 베트남 파병에 따른 정치 외교적 교섭은 외무부에서 했지만 구체적 보상 문제는 기획원에서 다루었다. 이때 나온 것이 브라운(Brown) 각서(覺書)다. 당시 미 브라운 대사의 명의로 베트남 파병에 따른 여러 경제적 보상을 문서로 약속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외무부, 상공부, 재무부 등 관계부처 담당자들이 기획원에서 모여 회의를 하고 그것을 토대로 기획원이 미국대사관 측과 협의를 했다. 외자총괄과의 양윤세 과장과 박필수 사무관이 매우 바빴다.
일본이 한국전쟁에 따른 특수(特需)로 전후 경제부흥의 기틀을 잡았듯이 한국도 베트남 특수를 최대로 이용코자 했다. 박·존슨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1억 5천만 달러의 개발차관 외에 한국군 파병에 따른 건설·군수품 용역 수입을 최대한 얻기 위해 끈질기게 협상했다. 심지어 한국군의 월급이나 전투수당, 보상금, 보험금도 악착같이 챙겼다. 사정이 급했던 미국은 한국의 요청을 많이 들어 주었다. 미국 원조자금에 의한 베트남의 수입이나 미국의 BA(미국상품 우선구매) 정책완화에도 배려를 많이 했다.
베트남과의 경제장관회담에도 기획원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회담에 참석했던 실무자가 “저쪽에서 너무 많은 것을 달라고 해 골치 아프다”면서 한일회담과는 정반대라고 웃었다. 그 즈음 기획원에 베트남 진출업자들이 드나들고 파월국군용이라고 김치 통조림과 조미 오징어, 밀림용 장화 샘플이 보이기도 했다. 베트남 진출의 선두기업은 한진(韓進)과 현대건설이었다. 뒤를 이어 삼환기업, 경남기업, 대한통운 등 여러 업체가 물밀듯이 진출했다. 1966년부터 베트남으로부터의 외화수입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많을 땐 한 해 2억 달러가 넘어 한국경제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미군 군수품의 하역, 수송, 세탁, 사진업으로도 돈을 많이 벌었고 기술자들도 국내보다 파격적 수입을 올렸다. 한국군 수비지역에선 건설용역도 한국 업체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국에서 미8군 공사나 군납을 많이 해본 한국기업들은 그 기준이나 규격을 잘 알아서 미군이 베트남에서 발주하는 공사를 따는 덴 유리했다. 이 기준은 중동에서 미군들이 발주할 때도 그대로 적용되어 중동특수를 누리는데 도움이 됐다. 베트남에 간 군인들도 달러로 후한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을 집에 송금했다. 이들이 본국에 돌아올 땐 당시로선 귀중품인 TV와 냉장고를 많이 사왔는데 통관 때문에 실랑이가 자주 벌어졌다. 그래서 아예 베트남에서 티켓을 주고 그것을 가져오면 국산 냉장고를 면세가격으로 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 통에 국내에서 면세티켓이 유통되어 냉장고 보급에 많이 기여했다.
베트남 특수는 한국군이 철수하는 197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금액으론 총 1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됐다. 베트남 파병은 국가 이미지나 외교적으론 손실이 있었지만 경제적으론 큰 도움을 받았다.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한국은 본격적으로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70년대 후반 중동진출의 밑거름이 되었다.

비원(悲願)에 끝난 종합제철

장 부총리가 또 하나 힘을 쏟은 것은 종합제철 건설이었다. 종합제철은 1950년대부터 구상되어 5.16 직후부터 서둘렀으나 잘 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종합제철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장 부총리는 어떻든 일을 만들어 보려고 서독과 미국, 일본에도 사람을 보내는 등 여러 시도를 했다. 그래서 한때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차관단(KISA)까지 구성했으나 경제성과 차관조건 때문에 매듭을 못 짓고 있었다. 기획원에서 “종합제철차관 드디어 타결”이란 기사를 몇 번이나 썼다. 기획원은 건설자금의 차관교섭을 하면서 국내공사부터 서둘렀다. 영일만을 낀 경북 포항으로 장소를 정하고 토목공사부터 시작했다. 입지선정부터 요란했는데 마지막 유력후보지로 포항(浦項), 삼천포(三千浦), 비인(庇仁), 여수(麗水)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다가 결국 포항으로 낙착됐다. 이 작업도 건설부를 제치고 기획원에서 주도했다. 당시는 각 지역마다 큰 공장을 유치하기위해 서로 경쟁을 벌일 때여서 인구 7만 여명의 포항에선 큰 잔치가 벌어졌다. 경북지사를 중심으로 용지매수에 적극협력하자는 운동을 펴 3백 50만 평의 제철소 부지매수를 몇 달 만에 끝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이다가 탈락한 삼천포에서는 실망한 나머지 삭발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포항은 허허벌판이었다. 기획원 기자들이 포항에 갔을 땐 바닷가에 임시본부로 쓰는 바라크(baraque) 한 동만 있었는데 이름하여 롬멜하우스라 했다. 2차 대전 때 아프리카에서 사막전을 지휘한 독일 롬멜 장군의 임시지휘소를 본뜬 것이라 했다. 모두들 워커화를 신고 있었고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 황무지가 세계적인 철강단지가 될 줄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장 부총리는 차관도입을 좀 더 순조롭게 하기 위해 IECOK(대한국제경제협의기구)를 출범시키고 거기를 통해서도 종합제철 차관교섭을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장 부총리는 포항제철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았다. 박 대통령은 빨리 지으라고 재촉하고 경제성 때문에 국제차관단구성은 잘 안되고 하여 무척 고심했다. 한번은 종합제철 이야기를 하다 ‘흰 코끼리(white elephant)’ 비유를 들었다. 동남아에선 보기가 좋고 근사한 사업이지만 쓸모없는 사업을 흰 코끼리라 한다는데 종합제철도 잘못되면 흰 코끼리가 될 수 있으니 정말 경제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 때 여러 가지로 위기감을 느낀 장 부총리는 획기적인 외자도입으로 돌파구를 삼으려고 IECOK에 몹시 정성을 들였다. IECOK는 세계은행을 의장으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한국과 차관제공 등 경제적 관련이 깊은 나라들의 협의체 형식이었다. 1966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창립총회 때 장 부총리는 “IECOK가 이륙단계에 들어간 한국경제의 국제 관제탑 역할을 해 달라”고 연설했다. IECOK는 1년에 한 번씩 모여 한국경제를 점검평가하고 회원국끼리의 이해조정도 했다. 한국경제에 대한 평가보고서도 발표했다. 한국은 총회 때 한국경제의 현황과 전망을 브리핑하고 차관이나 투자희망 리스트를 제시했다. 큰 구속력은 없어 구체적 사업은 별도로 교섭해야 했다. 그러나 해마다 외국의 유력한 투자관계자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무대가 되었고 세계은행이 은근히 투자를 보증하는 효과가 있었다. IECOK 총회에서 세계은행 아시아국장이 의장을 맡아 각국 대표들의 격도 높지 않았으나 실질효과 때문에 한국에선 역대 부총리가 기획원과 재무부의 관계국장들과 같이 꼭 참석했다.

“나의 시체를 밟고 가야할 것”

1967년이 되자 장 부총리의 돌격정책에도 여러 후유증이 생기기 시작한다. 서둘러 도입한 차관사업에 부실사태가 번져 외자사업의 사후관리 문제가 심각해졌다. 정책적 독주에 대한 비판과 견제도 많았다. 일을 거침없이 많이 하다 보니 이권을 둘러싼 의심도 받았다. 여러 가지 잡음과 중상모략도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그래서인지 박 대통령과의 관계가 옛날보다 못했다. 절대적인 신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이 경제에 자신이 생기면서 부총리의 독주가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자 공손하던 경제부처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상공부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각광을 받으며 기획원에 뺏겼던 고유영역의 실지회복에 나섰다. 박 충훈 상공장관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공산품 가격과 수급이라든지 석유화학단지의 입지와 실수요자 선정을 둘러싸고 상공부가 기획원에 맞섰다. 옛날과 달리 대통령도 장 부총리 편만 들지 않았다. 비교적 관계가 좋았던 경제계도 가격규제와 공정거래법 제정을 둘러싸고 비판세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9월 중순 장 부총리는 경제계와 간담회를 가졌는데 거기서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경제인들이 증세정책 등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고 장 부총리는 경제개발을 위해 세금을 많이 안내려하면 어떡하느냐고 공박했다. 마지막엔 “나의 시체를 밟고 가야 할 것”이라는 끔찍한 말도 했다. 1967년 10월 2일 청와대에서 경제관계 회의가 열린다고 했다. 기획원 기자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참석했던 황병태 경협국장이 뒤늦게 안 좋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회의에서 공박을 좀 받았다고만 말했다. 당시 장기영-황병태 팀과 박충훈-오원철(중공업국장) 팀이 태그매치를 자주 벌였는데 그 연장전 정도인 줄 알았다.
장 부총리는 다음날 열리는 포항제철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항 출장을 간다고 말했다. 그날 장 부총리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한다. 작심한 듯 장 부총리를 야단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 부총리에게 박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절차가 필요하며 포항 출장은 취소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장 부총리는 태연하게 출장을 강행했다. 너무 자신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장 부총리는 출장 중인 3일에 해임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것도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공식 인사를 하는 중에 라디오로 개각이 발표되었다. 후임은 장 부총리와 많이 다투었던 박충훈 상공장관이었다.
박 대통령이 오랫동안 신임했던 장 부총리를 왜 그토록 비정하게 잘라야 했을까. 정말 작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냉혹한 권력과 정치의 생리를 실감했다. 기자들은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랐는데 저녁 늦게 김포공항으로 가서 출장에서 돌아오는 장 부총리를 만났다. 다른 말은 안하고 그동안 힘껏 일했으니 내일 하루 쉬고 모레부터 신문사로 나가 일하겠다고 말했다. 장 부총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일보사에서 돈을 가져다가 부총리실의 외상값을 갚는 일이었다 한다. 4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로 장 부총리를 불러 출장 중에 발령을 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한다.
5일 기획원에서 신구부총리의 이취임식이 열렸다. 아침에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이 급히 다녀갔다. 상의 윗주머니에 흰 손수건을 꽂은 단정한 차림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이례적으로 정일권 총리가 참석했다. 원만한 성품의 정 총리와 불도저 장 부총리는 그동안 좋은 콤비를 이루어 많은 일을 했다. 정 총리는 장 부총리가 그런 식으로 해임된데 대해 많이 미안해했다. 장 부총리는 이임식에서 태연하려 했으나 결국은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그동안 고생한 직원들에게 정감어린 인사를 하고는 방에 있던 사물을 전부 나누어 주었다. 누구는 병풍을, 누구는 화병을, 누구는 도자기를, 또 누구는 넥타이를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탄 엘리베이터에서도 수위에게 금일봉을 주었다. 그리고 기획원에 올 때 데리고 왔던 단 한사람 김기병(金基炳, 후에 롯데관광 회장) 수행비서를 데리고 3년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드나들었던 기획원을 떠났다. 기획원의 질풍노도 시대가 간 것이다.

박충훈 시대의 개막

박충훈 부총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임 장 부총리와 대조를 이루었다. 우선 언행과 스타일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장 부총리가 자유 분방한 복장과 말솜씨를 보인데 비해 박 부총리는 단정한 복장에 자로 잰 듯한 언어를 구사했다. 박 부총리는 첫 기자회견 때 조끼를 받쳐 입은 빈틈없는 옷차림에 적확한 단어로 자신의 소신을 밝혔는데 장 부총리 스타일에 익숙한 기획원 기자들이 약간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 뒤에도 늘 그랬는데 모두(冒頭)에 “박 대통령의 통치이념과 정 국무총리의 지도를 받들어…”라는 말을 하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어찌나 말을 정확하게 하는지 한 말을 옮겨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될 정도였다. 정부조직법상 기획원은 국무총리의 지시를 받게 되어 있는데 그걸 충실히 이행했다. 무슨 물가정책 같은 것을 만들어도 반드시 총리실의 결재를 받은 다음 발표했다. 장 부총리 땐 없던 일이다.

무리 있는 지름길보다 원칙 선호

첫 기자회견도 원칙적이고 교과서적으로 했다. 자유기업의 원칙 아래 국민과 기업인들이 자기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정부의 할 일이며 명랑한 경제 분위기와 경제부처간의 기능조정에 관심을 갖겠다고 말했다. 민간의 자체추진력이 많이 배양되었으므로 그걸 활용하겠다고 했으며, 또 2차 5개년계획을 조기달성하기 위해 무리를 않겠다고 말했다. 전임 장 부총리가 2차 5개년계획을 3년 반 안에 조기달성 하겠다면서 여러 무리를 한데 대한 방향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박 부총리는 과열된 경제를 진정시키고 지속성장을 위한 안정기반을 다지는데 역점을 두겠다고 했다. 외자도입도 선별하고 물가안정에도 매우 신경을 쓰겠다는 것이다. 장 부총리가 어떻든 외자를 들여와 경제성장을 시동시키고 물가문제는 그때그때 대처한다는 발상인데 비해 일단 바닥부터 다지면서 차근차근 가자는 주의였다. 무리 있는 지름길보다 다소 우회하더라도 원칙대로 한다고 했다. 상공장관 때 부총리의 독주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인지 경제부처에 자율권을 많이 주어 각자 책임지게 했다.
이러한 구상과 이상은 좋았으나 막상 시행해보니 일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각 부처의 자율성을 강조하다 보니 팀워크가 잘 안되고 따로 따로 노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그래도 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언론에서 얼마안가 너무 원론적이고 교과서적이라고 꼬집자 박 부총리는 어느 연설문에서 “나를 교과서적이라 해도 고깝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고 소신을 견지했다.
기획원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웅성웅성하고 장터 같은 분위기가 질서 있고 차분해졌다. 박 부총리는 밤늦게까지 남아 일하거나 일요일에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간부들에게도 자유시간을 갖고 공휴일엔 쉬도록 배려했다. 오랜 관료생활이 몸에 밴 박 부총리는 원칙과 질서를 중시했다. 공사를 엄격히 구분했다. 사생활도 조심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점심도 여럿이 요란하게 먹기보다 소박하게 먹었다. 그래도 만날 사람은 성의껏 만났는데 정 급하면 식사 때를 이용했다. 기자들에게 허물없이 터놓지는 않았지만 정중하게 대했다.

초창기 수출 붐에 큰 기여

한번은 급하게 만날 일이 있어 집무실로 식사 때 들어갔는데 집에서 가져온 설렁탕을 혼자 들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박 부총리는 관리 생활을 하다 공군에 입대, 공군소장으로 국방부 경리국장을 지냈다. 빠듯한 예산으로 일을 하는데 익숙하여 검소하고 허례허식을 싫어했다. 정부예산을 짤 때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고 불만을 적정 배분하는데 중점을 두라고 강조했다. 기업인이 찾아오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장 부총리는 먼저 행동하고 비서들이 따라다닌데 비해 박 부총리는 비서실에서 만든 일정표에 따라 움직였다. 저녁 술자리는 거의 가지 않았다. 파티 같은 데서도 장 부총리가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주도한 데 비해 박 부총리는 칵테일 잔을 들고 서서 조용히 듣는 스타일이었다. 기업인을 만나면 “당신 돈으로 당신 돈을 버는 것은 좋으나 정부 돈으로 당신 돈을 벌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는 말을 했다 한다. 소문으로는 자수성가하여 재산을 모은 박 부총리의 부친이 부족한 돈은 대줄 테니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소신껏 일하라는 분부를 내렸다는 말이 있었다. 박 부총리는 5.16 후 상공부 차관과 장관으로 7년여를 보내면서 초창기 수출 붐을 일으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상공장관 땐 스스로 재산을 공개하면서 간부들도 그렇게 하도록 했다. 박 대통령이 ‘깨끗한 사람’이라 평했다는 말이 돌았다.

원칙과 순리 중시

박 부총리는 상공장관 때부터 기획원과 마찰이 많았다. 물가와 외자도입을 명분으로 기획원이 상공부 일에 번번이 간여하자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박 대통령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은 박 상공은 더러 반격을 하기도 했다. 수출증진을 위해 상공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기획원이 물가안정을 내세워 브레이크를 자주 걸었다. 그 후 경제정책 결정 과정을 보면 기획원, 재무부, 상공부는 체크 앤드 밸런스(check & balance) 관계를 유지했다.
가령 수출증대를 위해 상공부가 수출 선수금 확대 등 인센티브를 요구하면 주무부서인 재무부가 통화증발을 이유로 반대를 했다. 그러면 상공부는 기획원에 호소를 하고 기획원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중간에서 조정을 하곤 했다. 기획원은 물가안정과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정책을 써야 했기 때문에 더러 상충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상공부가 산업적인 측면에서 전기요금이나 시멘트 값 등을 올리려 해도 기획원이 물가안정을 이유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상공부가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개방을 안하려 하면 기획원은 물가안정을 이유로 개방품목을 늘리라는 압력을 가했다. 추곡수매값을 정할 땐 억제 쪽으로 기획원과 재무부의 이해가 일치했다. 기획원은 대형사업의 부담을 상당부분 금융으로 넘기려 하고 재무부는 예산사업으로 하려 했다. 차관업체가 현금차관을 들여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재무부는 반대하고 기획원과 상공부는 한편이 되었다. 환율이나 금리현실화 등 여러 정책에서 세 부처는 입장에 따라 한편이 되기도 하고 반대편에 서기도 했다.
부총리의 조정력이 강할 땐 그런대로 돌아갔으나 마음씨 고운 부총리가 오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경제정책이 헛돌았다. 장 부총리의 마지막엔 석유화학공업단지의 입지를 둘러싸고 인천을 선호하는 기획원과 울산을 주장하는 상공부가 첨예하게 맞섰다. 지켜보던 박 대통령이 상공부의 손을 들어 주면서 장 부총리 경질설이 나돌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악연이 있어 박 부총리가 취임하자 기획원 고위직들은 바짝 긴장했다. 박 부총리는 비서실장, 공보관, 총무과장, 비서관 등 한 팀을 데리고 왔다. 상공부에서 온 진주군이라면서 기획원에서 약간 경원하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장 부총리와 한 조를 이루어 상공부와 가장 많이 싸웠던 황병태 경협국장을 어떻게 처우할 것인지 숨을 죽이고 주시했다. 박 부총리는 한동안 지켜보더니 황 국장을 통계국장으로 보내고 그 후임을 기획원 정통관료로 채웠다. 인사이동도 별 하지 않았다. 박 부총리는 정책도 그렇지만 인사도 원칙과 순리를 지켰다. 서열을 중시하고 파격인사가 없었다. 개별 사람을 부리기보다 관료조직에 의한 팀워크를 중시했다. 전임 때는 기획원 간부들이 장 부총리를 태양으로 하여 행성(行星)같이 돌았는데 박 부총리 때는 직제에 의한 피라미드 조직으로 움직였다. 직원에 대해서도 점잖게 공식적으로 대했다. 파격적으로 칭찬하거나 꾸지람하는 일도 없었다. 장 부총리 스타일에 익숙한 기획원 직원들은 한동안 적응에 고생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계속)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1962년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제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한 후 1995년부터 10년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필자는 1965년부터 71년까지 경제기획원을 출입하며 장기영, 박충훈, 김학렬 부총리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취재했다. 필자는 경제기획원 시절의 수기를 묵은 취재수첩과 관계기록, 신문스크랩 및 출입기자 시절의 보고 들은 내용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 형식의 사적 기록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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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5호 (2015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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