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정시절 항공력 중요성 예견

자랑스런 공군인
노백린 장군 이야기
상해 임정시절 항공력 중요성 예견


글/김동호 외교국방연구소 이사장, (예)공군소장 공군 역사기록 자문위원장

벌써 26년 전의 일이지만 1989년 10월 일제 강점기 우리 선인들의 항일유적지를 직접 보기위해 두 번째 중국여행 첫날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듣던 대로 임정 청사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좁은 골목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망명정부의 처지를 보여주듯 작고 초라한 김구 주석 집무실과 국무위원석 및 각료 회의실을 쓰린 마음으로 돌아본 기억이 생생하다.

상해 임시정부 첫 방문소감

올해 9월 3일, 대한민국 임정수립 96주년 해 박근혜 대통령께서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 후 중국정부의 협조로 리모델링한 임정 청사를 방문하셨으니 늦은 감이 있지만 애국선열과 독립투사들의 한(恨)이 다소나마 풀렸을 것으로 믿는다.
상해 망명정부 시절 세계정세는 서양 강대국들의 영토확장 탐욕이 식민지를 쟁취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이 무렵 조선의 이웃나라이자 동양의 초대국이던 대청황국(大淸皇國)은 멸망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전국 각지에서 군벌이 봉기하고 광동지역을 기반으로 손문(孫文)의 혁신세력과 정부 내 개혁파가 이전투구로 청조(淸朝)가 기울었다. 이 공백기를 손문과 장개석 중심의 국민당 정부와 진덕수, 모택동 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메우고 있었다. 이때 레닌과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방(소련)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여 중국대륙의 공산화가 시작되고 세계의 판도는 자유진영과 공산세력간의 첨예한 대결의 장으로 급변했다.
그로부터 두 차례에 걸친 국공(國共)합작이 성립되고 항일전의 공동전선으로 승리하지만 곧바로 1945년부터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간의 4년간 치열한 분열과 대립 끝에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나고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을 지배하게 됐다.

상해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 <사진=독립기념관 홈페이지>

한편 일본은 400여년 맥을 이어온 무사(武士) 막부 정권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족국가로 출발하였지만 절대군주 천황을 축으로 한 서구식 입헌군주 국가로 개조하는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아시아의 신흥 패권국가로 등장했다.
일본은 부국강병 정책을 앞세워 제국주의로 변신하여 서구세력의 동진(東進)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대한제국을 침탈하여 그들의 첫 번째 식민국으로 만들었다.
1919년 3월 1일 기미년 3.1만세운동은 세계각지로 유랑하며 망국의 슬픔에 젖어있던 대한인(大韓人)은 물론 식민지 하의 약소국과 피지배국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면서 우리 민족 내부에도 경각심과 단합심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망명정부지만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해외 도처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불길도 3.1운동의 힘이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독립전쟁과 그 위대한 여정’ 전시회가 오는 11월 15일까지 열린다. 전시회에는 상해 임정과 민족 지도자들의 활약상 및 항일 독립군의 기상이 일목요연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전시회에는 자세히 소개되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현 국방부장관) 노백린 장군을 중심으로 한 항일 항공독립 전쟁은 너무나 감동적인 역사이다.

미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노백린 장군에 관한 스토리는 지난 3월 공군역사기록 관리단이 편찬한 ‘자랑스런 공군·공군인’에 잘 소개되어 있다.
노백린 장군이 1920년대 초 하와이를 경유, 도미하여 캘리포니아 Redwood 공군 비행훈련 기지를 방문하고 윌로우스에 한인 항공인 양성학교 ‘Willows 비행학교’를 설립한 것은 당시 열악한 여건과 일제의 악랄한 방해공작을 고려할 때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비행학교는 불과 1년여 후에 이 지역의 대홍수와 세계의 대공황으로 폐교되고 말았지만 이곳에서 양성된 항공인과 중국 본토 및 일본 항공인 양성소에서 배출된 인사들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김구, 안창호, 노백린 등 상해 임정요인들이 장차 전쟁에서는 항공(공군)력이 승패를 좌우한다고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세계 1차 대전에서 초기 항공력이 등장했을 무렵이기에 이 같은 혜안을 가졌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고 존경스럽기 그지없다는 소감이다.
그로부터 수많은 민족의 수난과 격변을 겪어냈지만 최근 국민의 역사안보 의식이 너무나 약화되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러다가 요즘 시중 극장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암살’, ‘연평해전’, ‘국제시장’ 등이 청소년들의 안보의식 강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 싶다. 특히 지난 8월 북의 DMZ 목함지뢰 도발사건 이후 젊은 장병들이 자진하여 복무연장 함으로써 국민들을 감동시킨 것도 젊은 세대의 달라진 국가안보의식으로 인식된다.

노백린장군 영령 환국 현충원 봉안

상해 방문 시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 자매 생가를 방문하고 중화민국 건국 유공자 묘지도 둘러봤다. 뜻밖에도 이곳에 한국인 묘비 3위가 안치되어 있는 현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높이 30cm, 폭 15cm의 조그마한 묘비에는 ‘노백린 지묘’라고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고 옆의 두 분은 존명이 퇴색되어 해독할 수 없는 백색의 위패나 다름없었다.
우리 공군의 태두(泰斗)라 할 수 있는 노백린 장군의 위패가 안치된 묘역에 장군의 후예인 대한민국 전투기 조종사 출신의 필자가 방문하여 예를 올릴 수 있었으니 뜻 깊은 일이었다.
그 뒤 한·중 외교관계 정상화에 따라 이들 건국 영령들은 환국하여 서울 국립현충원에 봉안되었다. 노백린 장군을 추앙하는 것은 이미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대한민국의 항공력이 태동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5호 (2015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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