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수 DJ와 야권주도… 3당합당 집권

‘YS는 못말려’ 의 일생
돌파·격파의 민주투사
맞수 DJ와 야권주도… 3당합당 집권
적진 돌파 후 전· 노 구속처벌 결단

▲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1월 22일 서거했다.

민주화 투쟁의 상징, 3김시대의 거산(巨山),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정치9단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88세로 별세했다. 서울대병원 고인의 빈소를 찾은 국내외 조문객들의 발길이 거산의 정치인생을 잘 말해 주었다.
고인은 ‘국가장’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니 건국 대통령 이승만, 산업화 대통령 박정희 및 평생의 정치동지이자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 국가 유공자로 서로 가까이 영면하게 됐다.

9選경륜 태산준령 넘는 집념·오기

고인은 20대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무려 9선(選) 경력에다 야권 원내총무 5선(選)의 맹

▲ 1971년 신민당의 40대 후보 경쟁자들. (왼쪽부터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씨)

장으로 민주화 투쟁을 위한 특유의 돌격·격파의 정치술로 위기와 난관을 극복한 화려한 경륜은 국민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3선개헌 반대, 유신반대 등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은 결코 이길 수 없는 도전이었지만 그는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평생의 정치동지이자 서로가 넘을 수 없는 라이벌인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있었기에 YS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가 있었기에 DJ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구국의 결단’에 도전했기에 YS와 DJ가 부각될 수 있지 않았느냐는 역설도 가능하다.
어떻든 YS는 태산준령이라도 넘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거산(巨山)과 같은 집념과 오기와 확신으로 민주화 투쟁 일생을 화려하게 장식했고 3당합당을 통해 집권한 후에도 민정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목표대로 ‘변화와 개혁’을 줄기차게 추진하여 YS시대를 장식하고 일생을 마감했노라고 평가된다.

정치적 난관, 장애는 정면돌파·격파

YS가 돌파하고 극복해 온 정치역정은 박정희 시대의 철벽 장기집권을 허물고 집권 후에

▲ 1983년 5월 신군부의 정치 규제에 항의해 단식투쟁 중인 김영삼전 대통령을 부인 손명순 여사가 돌보고 있다.

는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연장을 단죄하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야당 지도자로서 대여투쟁에 앞서 야권 내부의 대립과 경쟁을 극복하는 과정에도 YS식 승부수가 돋보였다.
박정희 정권 절정기 야당의 40대 기수론으로 소석(素石) 이철승(李哲承)과 DJ 등 3인의 대결이 팽팽했다. 시중에서 관측하기로는 YS가 소석과 DJ에 비해 열세로 비춰졌지만 당내 경선을 통해 당수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것은 상도동계의 결속뿐만 아니라 소석보다는 DJ의 동교동계와 정치지향의 목표가 같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시 YS와 DJ가 팽팽한 대결 끝에 대선에 함께 출마했다가 6공 노태우 정권을 탄생시킨 것은 군부시대가 끝났다고 속단한 결과로 야권의 실수였다. 그 뒤 YS는 자신의 뚜렷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진(敵陣)으로 진군할 수 있다는 천만뜻밖의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바로 3당합당이었다.
3당합당 후 내각제 개헌 합의는 현실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당무거부 선언을 통해 차기 대선후보 조기 가시화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 민정계의 박태준 대표와 이종찬 씨, 공화당의 JP계 등과 비교하면 소수계인 민주계를 발판으로 기어이 후보로 선출되어 집권에 성공했다. 대선과정에는 정주영(鄭周永) 후보의 출마와 박태준·이종찬 등 민정계의 반발이 있었지만 DJ를 이겨 당선됐으니 역시 YS 특유의 돌파·격파력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YS의 일생 ‘대도무문’ 정치술은 정도(正道)와 일관성으로 자신의 정치 입지를 완성했다는 결론이다.

전광석화식 개혁 ‘YS는 못 말려’

YS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군사정권의 오랜 적폐와 부정부패를 척결하려는 개혁정치는

▲ 1984년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

한마디로 ‘YS는 못 말려’ 식이었다. 그의 취임 초 ‘YS는 못 말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고 대중인기는 90%대로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육사출신 엘리트 집단의 ‘하나회’ 척결은 함부로 거론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YS는 어느날 아침에 기무사령관의 정례보고를 취소하고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경질시키고 비 육사, 비 하나회로 군 수뇌부를 교체했다.
금융실명제는 5공 전두환 정권이 끝까지 추진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막바지에 포기했던 개혁과제였다. YS는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고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당부한 후 어느날 퇴근길에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경제계뿐만 아니라 집권당 내부와 문화계, 사회 각계 등이 경악할 수준의 선언이었다. 기득권 계층에서는 얼마 못가 포기 할 것이라고 했지만 금융실명제는 ‘YS는 못 말려’ 식으로 성공했다.
3당합당으로 집권에 성공한 YS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 단죄한 것은 ‘YS는 못 말려’의 백미로 기록된다. 어느날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을 폭로하자 즉각 YS가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바로 3당합당으로 자신의 퇴임 후 안전을 기대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시킨 명령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골목길 안 성명발표 후 고향 경남 합천에 가 있을 때 검찰소환을 통해 구속, 사형구형을 받게 했으니 5·6공의 청산이었다. 당시 5.18특별법 제정은 소급입법으로 위헌성이 있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YS는 “쿠데타는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반드시 처벌된다”는 신념을 확립하기 위해 특별법 제정과 구속재판 중형선고로 처벌한 것이다. 다만 YS 임기말 특사로 두 분 전직 대통령의 신분은 풀어주고 퇴임했다.

준비된 개혁에 벌떼처럼 저항 하소연

YS가 취임 후 부정부패 척결과 준비된 개혁과제 추진에는 저항이 많이 따랐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 1987년 11월17일 13대 대통령선거 유세장에서 지지를 호소하며 연설하는 김영삼 민주당 후보

민간인들로 구성된 행정쇄신위원회를 발족시킨 후 YS는 정부조직을 뜯어고쳐 몸집을 줄이고자 해도 이곳저곳에서 벌떼처럼 아우성이라고 지적했다. 문화부와 체육부를 통합하려니 체육부장관 출신의 노태우 전 대통령마저 반대한다고 탄식하며 행쇄위가 객관적 입장에서 개혁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때문에 행쇄위가 정부조직 개편뿐만 아니라 부처별 기득권·이기주의를 타파한 쇄신안을 마련하여 YS의 서명을 받아 시행한 사례가 많았다. 해양수산부는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의 건의안을 중심으로 YS가 적극 지지하여 신설될 수 있었다.
반면에 YS 임기말 IMF 외환위기는 당시 심각한 선단(船團)경영, 차입(借入)경영 및 고비용 저효율 경제구조 개혁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국회의 입법반대 등으로 실패하여 치욕스런 IMF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됐으니 YS정부의 과오다. 당시 노동관련법을 개정하여 정리해고 문제 둥만 해결할 수 있어도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노동권이 최고 수준으로 강화되어 정리해고를 위한 노동법 개정은 “헌법개정 만큼 어렵다”고 비유될 상황이었다.
YS의 일생을 되돌아보자니 집권 후반기의 실패나 둘째아들 김현철 씨의 비리 등 어두운 면을 회고할 시간이 없다. 고인은 철저한 신념과 철학으로 우리나라 민주정치 발전에 일생을 바쳤다는 평가로 충분하다고 보며 명복을 기원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6호 (2015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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