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향우회 목소리에 소수 전락

대한민국 수도 서울
‘서울토박이’ 신세
지방 향우회 목소리에 소수 전락
옛 ‘문안사람’ 서울내기 기질있나요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가로수의 낙엽이 바람에 굴러가 가을의 정취가 깃든 10월 12일 오후 3시, 서울 을지로6가 국립중앙의료원 뒤편의 중구구민회관 1층 로비에는 어르신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해 서로들 인사를 나누느라 제법 부산한 분위기였다. 서울 토박이 중구지회에서 주최하는 ‘한마당 잔치’가 벌어지기 바로 전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눈을 씻고 봐도 젊은이는 한 사람도 없는 듯 했다. 장내에 들어가니 분위기를 띄우려고 이미 풍악이 울리고 있었고 곧 이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자 회장의 인사 말씀이 시작되었다. 초등교육에 오래 봉직한 경력의 김성완 회장은 그야말로 깍은 선비 같은 서울 말투로 팔순의 고령임에도 또박또박 개회사를 읽어내려 갔다. 중구의 토박이 회원은 282명이고 젊은이의 참여가 아쉽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연설은 노인 특유의 약간 고르지 못한 음성이 염려가 되었으나 아주 맑고 꼿꼿한 이미지가 그려지는 장면이었다.

서울인구 7%도 못미치는 소수신세

▲ 한양도성 옛지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서울 전체의 토박이 인구는 얼마나 될까요?
중구회장에 이어 축사를 한 이순영 (사)서울토박이전통문화진흥회장이 밝힌 순수 ‘토백이’(토박이의 서울 사투리) 인구는 1994년 3월15일 단체 등록기준으로 3,605세대 13,753명이라고 했다. 물론 조사에서 누락되거나 신고를 하지 않은 숨은 숫자가 있겠지만 1000만 서울 인구에 비교한다면 매우 적은 숫자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구 조사 기록으로 알려진 1428년(세종10년 윤4월)의 한성장계(漢城狀啓)에 성 안팎의 가호는 1만 8522호, 인구는 10만 9327명으로 되어 있다. 이후,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669년(현종10년)에 19만 4030명으로 얼마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나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기 전해인 1909년 기록이 23만 명인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 내내 대체로 20만 내외의 인구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에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면서 행정구역의 확장으로 30~40만 명으로 늘더니 1942년에는 11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광복이 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대규모 인구 이동현상으로 1960년에는 244만 명으로 크게 늘었고, 경제발전과 시역(市域)의 확장으로 70년대에 500만 명, 80년대에 800만 명을 넘어 2001년에 이르러 1000만 명을 초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구 증가 추세에 반비례하여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하던 해인 1994년의 서울 토박이 수효는 상대적으로 점유 비율이 점점 줄어 아주 빈약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담과 같이 정치, 사회, 경제, 문화가 집중된 서울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울시민 가운데 서울 출생은 4할에 불과하여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서 사는 사람이 더 많을 뿐 아니라, 3대 이상 살아온 서울토박이에 해당하는 인구는 서울인구의 7%에도 못 미치게 나타나는 것이다.

‘문안사람’과 ‘문내한’등 옛 차별

서울사람 중 ‘토박이’는 과연 어떤 조건으로 분류할까요?
조선시대 한성의 인구는 관할구역인 도성(都城) 안과 근교인 성저십리(城底十里)에 해당하는 구역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했다. 십리(十里)의 경계가 애매한 곳은 가오리(加五里)라 하여 오리(五里)를 더하여 획정하였다. 서울 우이동에 가오리라는 땅이름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흑산도 앞바다에서 올라오는 홍어를 연상하면서 ‘우이동에 웬, 가오리?’라며 궁금해 하기도 한다. 지금은 서울의 행정구역이 605.36㎢로 한성부의 38배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고 여기에 사는 서울사람 중에 붙박이로 서울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가리는 일이 토박이 인구조사이다.
역시 한성의 주민은 도성 안팎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 곧 왕족과 관료들, 그리고 그 권속을 비롯하여 중인 계층을 ‘문안사람’이라고 일컬어 문 밖에 사는 일반 농민이나 상인들과 차별하여 불렀다고 한다. 문내한(門內漢)이란 얄궂은 말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성 밖에 사는 백성들이 사대문 안에 사는 특권층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은연 중 나타난 비아냥 표현인 듯하다. 한(漢)이라는 글자는 악한(惡漢), 괴한(怪漢) 등 정의롭지 못한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므로 대부분 농민이거나 한강의 장사꾼들인 ‘문밖사람’들에게는 문안사람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이제, 만민이 평등한 지금 시대에는 문 안이든 문 밖이든 상관없이 서울시민이면 누구나 3대 이상 걸쳐 100년 정도 서울에 살았다면 모두 토박이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지방향우회에 밀려 토박이단체 유야무야

▲ 제13회 중구전통문화발굴사업 보존을 위한 토박이 한마당. <사진=필자 최종인>

그런데 토박이 인구는 왜 정체되어 있을까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사에서 누락되거나 신고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이보다는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집성촌 해체와 인구 이동현상으로 서울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서일 것이며 특히, 서울사람이라고 굳이 티를 내며 살아야 할 이유나 명분이 희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기회의 땅, 서울에 가득 찬 출세지상주의와 황금만능사상이 인간 평가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세상으로 변질되었기에 고루한 반상(班常)차별이나 가문(家門) 따위의 신분의식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는 얘기이다.
한때, 서울 정도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시의 후원을 받아 토박이단체가 결성되어 당시에는 꽤나 들뜬 분위기로 모임도 잦고, 행사도 빈번했지만 운영이 부실했는지 크게 결집력이 떨어져 유야무야 존재감이 오그라들었다. 그 이유는 지방 출신들의 향우회와 같이 고향을 떠난 사람들끼리의 애향심 같은 구심적 요소가 비교적 약하고, 도회지 사람 특유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작용해서 더 그랬을 걸로 추측된다. 따라서 토박이 인구는 당분간 정체상태가 계속되다가 인구이동 둔화 등의 요인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증가할 수 있으리라 전망된다.

과연 ‘서울내기’의 기질은 어떤 것일까

21세기는 서울이 수도로서의 위상마저 흔들리는 시대이다. 이러한 계제에 서울사람의 자화상은 어떻게 그려져야 할까요?
뉴요커(Newyorker)나 런더너(Londener), 또는 파리지엥(Parijean)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면서 그들의 기질(氣質)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서울에는 토박이란 말 외에 ‘서울내기’라는 단어도 있다. 아마도 서울토박이는 시공(時空)관념에 바탕을 두지만 서울내기는 성정적(性情的)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표현으로 여겨진다. 토박이는 세월 따라 만들어지지만 서울내기는 서울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할 만한 기질을 어떻게 형성해 가느냐에 의해 나타날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사람의 관념적 자화상으로 연상될만한 이미지가 어떤 것일까에 관한 문제라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서울사람 모두가 관심을 갖고 곰곰이 생각해 볼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
가능하다면 기존의 토박이단체가 나름대로 유지, 발전하면서 서울내기의 기질적 특성을 밝혀본다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는데 한번 숙고해 보시면 어떨까요.
과연, 21세기에 ‘서울사람 답다’라는 서울내기의 기질은 어떤 것일지 기대해 본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6호 (2015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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